[스페셜1]
아드만 스튜디오와 그들의 애니메이션 [1]
2001-01-02
글 : 김혜리

<쥬라기공원>의 컴퓨터 테크놀로지가 부활시킨 완벽한 티라노사우루스가 관객을 향해 육중한 입을 쩍 벌렸을 때, 성급한 이들은 모델을 한 프레임씩 움직여 찍어내는 ‘미련한’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의 멸종을 말했다. 하지만 컴퓨터로 아예 중생대를 통째로 불러낸 <다이너소어>가 지축을 울리고 픽사의 <토이 스토리>가 컴퓨터 애니메이션의 지성까지 증명한 2000년에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전장에서 여봐란 듯이 날아오른 점토 애니메이션 <치킨 런>은 그런 호사가들의 속단을 민망하게 했다. 미국 개봉 열흘 만에 제작비 4천만달러를 깔끔히 회수하고 1억1천만달러의 박스오피스 수입을 올린 <치킨 런>은 한국 크리스마스 극장가에서도 만만치 않은 기세. 지난 12월16일 개봉해 나흘 만에 10만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한 <치킨 런>의 배급사 CJ엔터테인먼트는, 아드만의 전작 <월레스와 그로밋> 흥행 스코어의 3배인 서울 관객 40만명 이상을 기대하고 있다.

<치킨 런>의 힘센 촌닭들을 배출한 본가는 영국 항구 도시 브리스틀에 둥지를 튼 아드만 스튜디오. 예쁜 부둣가에 터를 잡은 스튜디오의 지붕 아래 300여명이 넘는 스탭과 3개의 오스카 트로피, 아드만이 창조한 모델들이 기거하고 있는 이곳은 이제 도쿄의 지브리나 마린 카운티의 픽사와 더불어 애니메이션의 한 문법을 일컫는 색인이 됐다. 디지털 기술이 영화사를 다시 쓸 것이라는 풍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로-테크’ 기법을 고집하는 그들의 행복한 노역을 지탱하는 믿음과 저력은 무엇일까.

슈퍼맨 아드만, 세상 밖으로

혹시 <월레스와 그로밋>과 <치킨 런>에서 부뚜막의 온기, 쿠키 굽는 향기를 느꼈다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1960년대 말 영화에 반한 두 소년 데이비드 스프록스턴과 피터 로드가 방과후 홈비디오 카메라로 습작을 시작한 부엌 식탁에서 아드만 스튜디오의 역사는 시작됐다. 또래들이 철도에 앉아 트레인스포팅을 하거나 프라모델을 조립하는 동안, 로드와 스프록스턴은 칠판에 분필로 한 프레임씩 그림을 그리거나 오려낸 잡지 사진, 장난감 자동차 등을 사용해 고물고물한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 접시 위의 소시지, 콩, 감자가 동물로 변해 걸어나가는 장면의 클레이메이션을 처음 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이아손과 아르고 호 선원들>을 비롯한 전설적인 애니메이터 레이 해리하우센의 작품들과 테리 길리엄이 연출한 <몬티 파이튼> 코미디, 영국 TV의 인형영화 시리즈가 두 소년을 가르쳤다.

많은 영국 영화인처럼 로드와 스프록스턴도 TV를 통해 세상을 노크했다. 방송국 프로듀서였던 스프록스턴의 아버지의 도움으로 의 청각장애아동용 프로그램 <비전 온> 시리즈의 패트릭 다울링 프로듀서에게 소개된 로드와 스프록스턴은 100피트의 필름을 선물을 받았다. 분필과 셀, 플래스티신(세공용 점토)을 소재로 한 다양한 실험 가운데 는 한심한 슈퍼맨 캐릭터 ‘아드만’이 등장한 셀 애니메이션 시퀀스를 15파운드에 사주었고, 이때 두 친구가 개설한 ‘아드만 애니메이션’이라는 이름의 은행 계좌가 오늘날 스튜디오의 씨앗이 됐다.1960년대 말과 70년대 초 브리스틀은 ‘프라하의 봄’ 이후 체코에서 망명해온 세계적인 애니메이터들이 모여든 곳이었다. 마치 멸망한 동로마제국의 학자들을 거둬들인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도시처럼 브리스틀은 애니메이터, 모델 메이커들의 공동체를 이루기 시작했고 로드와 스프록스턴은 1972년에 거기 합류했다.

부엌 작업실에서 TV광고의 명가까지

애니메이션을 사랑하는 두 청년의 작업장으로 출발한 초기부터 아드만 스튜디오는 작품의 타깃과 소재, 매체에 대해 금을 긋지 않았다. 아드만의 첫 스타 모프가 1976년 탄생해 에서 5분짜리 26부작 시리즈로 어린이들의 애정을 한몸에 모으고 아드만 브랜드를 널리 알렸지만, 로드와 스프록스턴은 애니메이션이 성인 관객을 매료할 수 있는 예술이라 믿었다. 실생활에서 녹음한 일상적인 대화에 클레이 애니메이션을 입힌 1978년작 <애니메이티드 컨버세이션>(Animated Conversations)은 의 OK 사인을 받지 못했으나 <채널4>로 넘어가 유사한 포맷의 <컨버세이션 피시스>(1982∼83)로 발전했으며 뒷날 <립 싱크> 시리즈(1989∼90)로 이어지며 세련된 위트와 리얼리즘을 과시했다. 또한 답답하고 지루하게 사는 사람들의 인터뷰를 우리에 갇힌 동물의 입을 빌려 들려준 <립 싱크> 시리즈의 5번째 단편 닉 파크의 <동물원 인터뷰>(Creature Comforts)는 아드만에 첫 번째 오스카를 선사했다. 한편 아드만 스튜디오는 1984년 이래 모델 애니메이션 형식 TV광고의 명가로 자리를 굳혔다. 버터 사나이가 식탁 위를 활주하는 ‘루어팩’ 버터 광고나, <월레스와 그로밋> <치킨 런>에 드러난 복잡한 기계 취미가 엿보이는 ‘폴로’드롭스 광고, ‘레고’ 조각이 저절로 헤쳐모여 하는 장난감 광고는, 아드만 스튜디오에 돈은 물론 진행중인 단편 작업과 발맞춰 마음껏 형식을 실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1980년대 초 <컨버세이션 피시즈>의 성공 이후 젊지만 개성있는 작풍을 지닌 애니메이터들을 식구로 영입하면서 아드만 스튜디오는 감독, 프로듀서, 모델 메이커, 기술 스탭, 프리랜서의 공동체로 변모했다. 아드만에서 인형 애니메이션 <넥스트>를 발표하고 뒷날 <오페라복스>의 ‘리골레토’ 편, 아킬레스 신화를 동성애적 시각으로 해석한 조각 애니메이션으로 주목받은 배리 퍼브스, <렉스 더 런트>의 리처드 골레조프스키, <핍 앤 포그>의 피터 피케, <무대공포증>의 스티브 복스의 참여로 아드만은 풍성한 외연을 갖게 됐다. 그중에서도 1985년 아드만에 합류한 ‘스타’ 닉 파크는 <동물원 인터뷰> <전자바지 소동> <양털도둑>으로 윌리엄 와일러, 프랭크 카프라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오스카 3관왕의 자리에 오르면서 ‘아드만=닉 파크의 클레이메이션’이라는 어쩔 수 없는 오해를 퍼뜨리기도 했다.

디지털보다 섬세한 진흙 한줌

원숭이의 털 한올 한올에 일련번호를 매겨 컴퓨터로 바람에 날리는 각도를 입력한 애니메이션을 보고도 “뭐 그럭저럭 볼 만하네”라는 평이 심상하게 나오는 ‘인색한’ 시대에 가장 원초적이고 고풍스런 방식으로 빚어지는 아드만 모델 애니메이션이 발휘하는 위력은 무엇일까. 첫째로 아드만 스튜디오의 애니메이션은 진흙이라는 소재가 가진 비교할 수 없는 유연성과 기억력, 섬세한 표현력을 깊이 이해하고 발현시킴으로써 클레이 애니메이션의 잠재력을 극치로 끌어올린다. 특히 표정의 뉘앙스를 살리는 데에 발군인 점토의 장점을 살린 아드만 작품의 연출은 의인화와 미묘한 심리표현에서 돋보인다. <전자바지 소동>의 그로밋이 수상쩍은 하숙인 펭귄을 처음 만나는 장면을 보자. 아드만은 캐릭터의 눈을 튀어나오게 하고 혀를 잡아늘리는 대신 그저 이맛살을 살짝 눌러줌으로써 감정을 설명하고 복선을 깐다. 또한 점토뿐 아니라 나무, 폼 라텍스, 실리콘, 금속으로 수공된 아드만 애니메이션의 세트와 소품은 표면의 질감까지 촉지하게 한다. 그러나 그 실감은 최고의 3D 컴퓨터 애니메이션의 싱겁도록 매끈하고 감쪽같은 실감과는 좀 다르다. 아드만 클레이메이션의 수작들은, 다른 장르 애니메이션이 결코 따를 수 없는 물리적 실존감을 내면서도 판타지의 마술을 잃지 않는 것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아드만 스튜디오의 또다른 힘은 실사영화에 꿀리지 않는, 예민한 현실 관찰과 성숙한 접근이다. 영국인들의 일상 상황에서 녹음한 실제 대화 사운드트랙에 점토 인형의 입을 맞추는 식으로 연출된 시리즈 <애니메이티드 컨버세이션>과 <컨버세이션 피시즈>는 대표적인 예. 보호관찰관을 설득해 가족을 방문하려는 집행유예 죄수의 안간힘, 물건을 살 생각이 없는 노부부를 상대로 끝까지 웃는 낯으로 소득없는 대화를 나누다 돌아서는 어느 세일즈맨의 피로 등을 절묘하게 포착한 이 단편들은, 우리가 소통에 실패하는 다양한 광경을 신랄하게 스케치했다. 흥미로운 것은 서로 중첩되고 미처 맺어지지 못한 채 일상에서 스쳐가는 흔하디 흔한 말들이 인형의 입을 통해 나옴으로써 묘한 집중력과 진한 페이소스를 획득한다는 점이다.

디즈니나 워너의 브랜드화한 애니메이션과 달리 다양한 재능의 공존을 보장하는 작업 환경을 유지함으로써 오스카 수상작부터 광고, 비주류 감성의 개인적 소품에 이르는 다채로운 작품을 생산한다는 점도 스튜디오로서 아드만이 보유한 가능성이다. 스튜디오의 성장과 함께 연출보다 조정과 관리 역할을 맡게 된 창립자 스프록스턴은 이를 가리켜 “아주 자기중심적이었던 애니메이션 만들기의 즐거움이 여러 자식을 통해 삶을 사는 부모의 즐거움으로 바뀌었다”고 표현한다. 한편 할리우드 셀 애니메이션과 달리, 실사영화급 조명과 세트가 구비된 스튜디오가 필요하고 모델이 훼손되기 쉬워 인건비가 싼 지역에 하청을 줄 수 없다는 모델 애니메이션의 장르적 특성은 아드만 애니메이션의 고급한 품질과 이미지를 자연스럽게 유지하고 있다.

심슨 가족 즐겨, 파우스 파크 못 즐겨

그러나 총명한 미인이라고 꼭 사랑받는다는 법이 없듯이, 대중의 마음을 건드릴 수 없었다면 아드만 스튜디오는 애니메이션에 중독된 두 젊은이의 공방으로 머물렀을지도 모를 일이다. <채널4>로 방영돼 인기를 끈 아드만의 시리즈물과 최고의 히트작인 <월레스와 그로밋> 연작은 온화한 정서, 총기 넘치는 패러디와 은근한 농담을 결합한 유머로 관객의 사랑을 얻었다. “시나리오와 풍성한 아이디어가 빛나는 <심슨 가족>을 좋아한다. 저열함을 보여주는 애니메이션은 싫다. <사우스 파크>는 즐기고 싶었지만 실패했다. 하지만 비비스와 벗헤드는 민감한 캐릭터들이라 마음에 든다.… 팝 음악은 관심없지만 힙합의 포즈와 리듬에는 왠지 절대적인 매력을 느낀다”고 한 인터뷰에서 밝힌 피터 로드의 취향은 아드만의 체질을 잘 설명해 준다. 디즈니 재직 시절인 1990년경부터 아드만에 줄기차게 프로포즈를 했다는 드림웍스 공동대표 제프리 카첸버그가 냄새맡았던 상품성도 아마 미국 만화와 다른 아드만의 부드러운 정서와 세련된 위트였을 것이다.

남은 것은 기사작위 수여뿐?

아드만 최초의 장편 <치킨 런>은, 디즈니와 워너의 구애를 물리치고 5천만달러와 완벽한 창작의 자유를 약속한 드림웍스와 지난해 10월 체결한 다섯편 제작 계약의 첫 이행이다. 이 밖에 현재 대기중인 작품으로는 이솝 우화의 <토끼와 거북이>와 장편 <월레스와 그로밋>이 있다. <치킨 런>의 캐릭터와 줄거리가 디즈니 클래식과 유사하다는 점을 지적하며 우려하는 목소리에 대한 닉 파크와 피터 로드의 반응은 지극히 무덤덤하다. 처음 만드는 장편이라 전작보다 평이해졌을 뿐이라는 것. 아드만이 아쉬울 것 없이 굴러가는 상황에서, 드림웍스가 있는 그대로의 ‘아드만 애니메이션’말고 다른 걸 원했다면 애초에 왜 계약을 했겠냐고 그들은 반문한다. 또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영국 수탉이 미국인을 비난하는 대사나 영국 속어를 쓴 것에 대한 반대 입장의 걱정에 관해서도 “영국인들은 미국 영화에 나오는 문화적 레퍼런스를 100% 이해 못하는 데에 익숙하다. 그 반대 경우가 있으면 어떤가”라고 속편한 소리를 한다. 할리우드와의 파트너십을 해석하는 아드만 스튜디오의 느긋한 시선은 컴퓨터 테크놀로지에 대한 그것과 비슷하다. “변화라면, 작업을 하며 결과를 동시에 기록할 수 있어 덜 갑갑하다는 정도? 옛날에는 모델에 붙인 낚싯줄 그림자가 보일까 조마조마했는데 이번에는 컴퓨터로 지웠다. 컴퓨터가 없었으면 아마 훨씬 오래 걸렸을 테고 위궤양 환자가 더 많이 나왔겠지.” 요컨대 할리우드나 컴퓨터나 빠르고 편리하긴 하지만 본질은 달라질 게 없다는 말이다.

미국시장에서 자국 문화상품이 거두는 성공에 짐짓 무심한 척하면서도 내심 매우 기뻐하는 영국인들의 습성을 생각하면, 아드만의 애니메이션 장인들이 왕실로부터 기사 작위를 수여받았다는 뉴스도 머잖은 미래일지 모른다. 오래 전부터 그들만의 왕국을 유유자적 다스려온 이 과묵하고 진흙 나라의 조물주들에게 작위쯤이야 그리 대수로운 감투가 아닐 테지만 말이다.

자료협조 서울 애니메이션 센터, CJ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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