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오늘날은 전세계적으로 3차원 애니메이션의 전성시대다. 이는 단순히 <토이 스토리> 같은 컴퓨터그래픽 애니메이션의 경우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1990년대 초 <팀 버튼의 크리스마스 악몽>, 닉 파크의 <월레스와 그로밋>이 거둔 엄청난 대중적 성공에 이어 인형, 점토 등을 이용한 고전적인 3차원 형식의 애니메이션도 큰 각광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월레스와 그로밋>으로부터 수년 뒤 마침내 피터 로드와 닉 파크가 발표한 장편 <치킨 런>은 점토 애니메이션에 대한 일반의 높은 관심을 또다시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했다.
점토 애니메이션의 탄생은 약 100여년 전 영국인 윌리엄 하버트(William Harbutt)가 왁스와 오일을 혼합하여 유성의 가소성 모델링 재료인 플라스티신(plasticine)을 발명했던 때까지 거슬러올라간다. 물론 그것이 등장하자마자 곧바로 영화에 도입된 것은 아니지만, 하버트의 플라스티신 사용에 관한 지침서는 이미 그 가능성을 충분히 시사하고 있었다.
편의상 점토라 통칭되는 플라스티신은 재료의 속성상 형식적으로 매우 유연한 표현수단이다. 다만 이제까지는 인형 형식의 점토 애니메이션이 지배적으로 선호돼왔기 때문에 점토라는 재료가 지닌 풍부한 예술적 가능성이 제대로 인식되지 못했다. 엄밀히 말해 <치킨 런>과 같은 형식의 점토 애니메이션은 점토인형 애니메이션으로서 점토와 인형의 교집합적인 장르다.
그렇지만 점토 애니메이션이 언제나 3차원 형식인 것은 아니다. 영화학자 마이클 프리어슨은 점토 애니메이션의 대안적 방법론으로서 점토 회화와 점토 절단을 제시하면서, 회화 형식의 점토 애니메이션 영화인 <계단을 내려오는 모나리자>(Mona Lisa Descending a Staircase, 1992)로 1993년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조앤 그라츠(Joan Gratz), 그리고 점토예술의 새로운 형식 실험으로서 스트라타 컷(strata-cut) 기법을 개발한 데이비드 대니얼스(David Daniels)를 두 영역의 대표적인 인물로 언급한다.
대학 시절부터 공동작업을 시작한 피터 로드와 데이비드 스프록스턴이 아드만을 설립할 때 그들은 이미 의 어린이 프로그램인 <비전 온>(Vision On)을 제작하고 있는 중이었으며, 특히 어린이를 위해 26화의 시리즈로 만들어진 <모프의 모험>(The Adventures of Morph)은 기록적인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그뒤 두 사람을 포함한 아드만의 작가들은 점점 더 성인 관객에게 눈을 돌려 근대문명을 상상력 넘치는 유머와 냉소로 비판하는 작품에서부터 영국사회의 일상을 다큐멘터리적인 감각으로 그려내는 작품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스펙트럼을 제시해왔다. 특히 후자의 사례는 1989년에 와 <채널4>의 지원 아래 이루어진 립싱크(Lip Sync) 시리즈와 대화작품(Conversation Pieces)이라는 일련의 프로젝트로 대표된다. 이때 만들어진 작품들은 영국인의 극히 일상적인 삶의 단편들을 리얼리티 넘치는 점토 캐릭터를 통해 재현해낸 결과 당시 영국 대중의 열광적인 반응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인간의 언어와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심도있는 연구였던 아드만의 이 프로젝트에는 닉 파크도 역시 참여하여 <동물원 인터뷰>(Creature Comforts, 1990)를 만든다.
우리가 <월레스와 그로밋>을 그렇게 좋아했으면서도 닉 파크의 필모그래피 속에서 유일하게 다큐멘터리적인 경향을 띠고 있는 이 참신한 소재의 작품에 대해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은 의외이다. 사실 <치킨 런>의 경우만 봐도 감독으로 닉 파크와 함께 피터 로드가 참여하였고 그래서 제2차 세계대전의 아우슈비츠를 연상시키는 그 묵시록적인 양계장의 풍경이 작품세계의 커다란 변화를 초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부분은 국내의 영화 담론들 속에서 거의 무시되고 있다.
처음에도 언급했듯이 현재 점토와 인형을 포함한 고전적인 3차원 형식의 애니메이션 분야는 머나먼 영국으로부터 가까운 일본에 이르기까지 국제적으로 재인식되어 그에 따라 산출되는 풍부한 결실들도 대중적으로 널리 환영받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결실은 두말할 나위 없이 애니메이션 예술의 새롭고 다양한 가능성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과 실천이 낳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국제적인 현황에 비하면 한국사회는 산업에서든 예술에서든 교육에서든 애니메이션 예술의 가능성에 대해 아직도 퍽 무관심하다. 그것은 아마도 애니메이션이 ‘만화예술’의 하위 장르라는 근본적인 오해, 그리고 ‘3차원 컴퓨터그래픽’이 아니면 안 된다는 근거없는 집착, 이들 두 가지의 극단적인 인식론적 장벽에 갇혀 있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