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승범 | 며칠 지나고 다시 외부에서 이야기가 들어오니까 오히려 외부적인 강압을 받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흔들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감독님 만났던 것 같아요. 모질게 단념을 시켜야겠다는 생각으로. 그리고 또 서로 정답도 없는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어. 서로 자기 입장만 이야기하는 거지. 그러다가 감독님이 편지를 한통 건네주는데, 그 편지를 읽고 이 감독님을 돕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그게 나여야만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조근식 | 마지막으로 승범이를 만나자는 생각을 했는데, 만나서 답답하고 뭐라고 이야기도 잘 못하겠고 마지막으로 연애편지 쓰듯이 편지를 써야겠다고 생각했어. 일년 넘게 작업하면서 만나면서 느꼈던 감정들, 같이 해보고 싶은 것. 이렇게까지 해서 승범이가 안 한다고 하면 못하는 거다.
류승범 | 사실 그 캐릭터를 탐냈던 배우들이 많잖아요. 그런데 감독님께 감사한 건 끝까지 나를 놓지 않고 있었다는 거예요.
동물적인 반응이 나오는 그 순간까지
조근식 | 캐스팅되고 나서 지방으로 배우들하고 스탭들하고 워크숍을 갔어요. 승범이가 그때 <더 네임> 뮤직비디오 찍고 밤에 왔는데 급하게 술을 많이 먹더라고. 그러고 술 취해 가지고 내 앞에 딱 오더니. 감독니∼임, 나 정말로 감독님 보고 시작하는 거예요. 감독님이 그 편지를 영화 들어가려고 거짓말로 썼는지 진짜로 썼는지 난 잘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나 감독님 믿어요. 나 친형처럼 생각하고 찍어볼게요, 하더니 푹 쓰러지더라고.
류승범 | 아… 기억이 안 나요.
조근식 | 그때 마음이 짠했어요. 이 아이가 이걸 이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는구나. 이 선택에 이만큼의 의미를 가지고 있구나. 내가 처음에 시작한 마음에서 거짓되면 안 되겠다. 이 아이만은 내가 다치지 않게 하고 기억에 남게 찍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것말고도 이 영화 찍으면서 잊을 수 없는 국면들이 많았죠.
피크는 마지막 싸움신이었는데 어떻게 찍을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원래 시나리오에서는 어이없게 칼 맞고 그런 거였는데, 힘을 주고 싶었거든요. 원치 않는 자리에 있는 중필이가 생존하려고 발버둥치는 상황을 리얼하게 찍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엑스트라만 해도 수백명이고 장비만 해도 어마어마했죠. 부담이 많이 가는 신이었어요. 그런데 딱 아침에 승범이를 만났는데 얼음을 껴안고 있더라고. 왜 그러냐고 했더니 떨리고 싶대, 그 앞에 나가면 떨리는 느낌을 보여주고 싶은데 그러려면 이렇게 해야 된대. 감독님, 나 오늘 체력이 너무 좋은데 운동장 몇 바퀴 뛰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운동장 몇 바퀴 돌고 얼음 들고 쇼를 하는데 오히려 불안해하는 느낌이 나더라고.
류승범 | 왜 현장에 아이스박스 있잖아요. 아침에 그 안에 담긴 통얼음을 보는데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거짓으로 떠는 건 보이잖아요. 정말 오들오들 떠는 느낌은 어떨까. 실제로 떠는데 떨지 않으려고 하는 느낌, 그걸 참는 느낌을 전달하고 싶었어요. 내 육체를 떨게 만든 다음에 안 떨게 연기하는 거지. 이만큼 큰 얼음을 안았어요. 3, 4시간을 참겠는데 와, 그 이상 지나니까 미치겠는 거예요. 픽픽 쓰려지는 거예요.
조근식 | 그 싸움장면을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하루 꼬박 실제로 치고박고 찍는데 승범이가 나중에 지치기 시작하는 거야. 몸을 못 가눌 정도로 헉헉대더라구. 그러다가 승범이가 감독님, 정말 못하겠어요. 그러더라고. 그때 나한테 느낌이 왔어. 아, 얘가 다 버렸구나. 원래 가지고 있던 생각들을 다 버렸구나. 이제 한 테이크만 더 가면 진짜가 뽑아져 나오겠구나. 계산되지 않고 생각하지도 않는 그 느낌을 생생하게 뽑아낼 수 있겠다는 생각에 한번만 더해 보자 했어요.
류승범 | 그건 정말 동물적인 반응이었어요. 아침에 얼음을 껴안고 뛰고 했더니 오한이 오고 죽을 만큼 힘든 거예요. 아! 내가 헛지랄했구나. 그런 후회가 들더라고. (웃음) 나도 나름대로 자존심 강한 배우라고 생각했는데 뭐 그런 거 저런거 안 보이는 거예요. 사실 바로 전 테이크를 촬영감독이 ‘승범아 악으로 한번만 더 가자’해서 간 건데 감독님이 다시 한번만 가자니까 엑스트라들이 몇백명이건 말건 MTM 꼬마애들이 뭐라고 하든 말든 일단 죽겠는 거야. 바로 그때 든 생각이 그거예요. 아 제발 오늘이 빨리 지나갔으면…. 그런데 중필이도 딱 그랬을 거라구요. 작품이 끝나고 보니까. 진짜는 어쩌면 마지막 컷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 안의 중필이와 혼연일체가 되는 순간이었죠. 또 나는 그 한번 더하자는 순간에 감독님에 대한, 이 작품에 대한 믿음이 생겼어. 그렇게 힘들면서도 묘하게 믿음이 가요. 그래도 다시 한번 가는 이유가 그거예요. 나를 괴롭히는데 나를 혹사시키더라도 말이에요. 그렇게까지 하면 할말이 없는 거잖아요. 할 때까지 한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