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까다로운 배우 류승범, 자상한 감독 조근식을 추궁하다 [2]
2003-01-03
글 : 백은하 ( <매거진t> 편집장)
사진 : 이혜정

조근식 | 승범이가 초반에 우리 영화가 너무 떠 있는 게 아닌가, 너무 코미디로 가려는 게 아닌가라는 걱정을 했던 것 같은데 나는 우리가 보여주려는 것이 장르화되고 양식화된 코미디의 과장이 아니라고 설명했죠.

류승범 | 물론 감독 입장에서 윽박지르고 명령할 수도 있었지만 안 했다고 말하신 것처럼, 배우 역시 그냥 시키는 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어요. 아마 촬영 초반에는 감독님에 대한 신뢰가 부족했던 것 같아요. 나 잘난 줄 안 거지. 그래도 뭔가를 충돌해서라도 맞춰가고 싶은 욕심이 있었어요. 저사람 마음에 안 드는데 내 방식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게 옳은 건가. 어떻게든 맞춰서 꼭 정답은 아니지만 합일점을 찾는 게 나은 건가. 솔직히 후자가 나한테도 솔직하고 후회가 안 남을 것 같더라고.

조근식 | 승범이하고 나하고 그런 국면이 초반에 3, 4번 있었어요. 그럴 때마다 어떤 스탭은 배우애가 저렇게 덤비는데 가만 놔두냐고 이야기하기도 했는데, 나는 덤빈다고 생각하진 않았어요. 그보다는 승범이가 나한테 지금 아프다고 말하는 것 같았어. 이 영화에서 승범이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캐릭터고 지금은 서로에 대한 믿음이나 애정을 쌓아가는 게 중요하다고 봤거든.

류승범 | 참, 그때 당시는 곤혹스런 시간인데 지금 생각해보면 중요한 시간이었어요. 이 작품을 끝내고 배운 게 그거예요. 이런 과정들이 극을 끌고가는구나. 이런 과정을 겪고 나면서 얻은 카타르시스가 굉장히 컸어요. 촬영 후반에 군산으로 학교신 찍으러 들어갈 때쯤엔 서로가 서로에게 요구하는 게 없었잖아. 맡기는 거야. 나는 감독님한테 맡기고 감독님은 박중필에 대해선 무조건 나한테 맡기는 거야. 무성의한 아이가 아니구나,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그런 아이가 아니구나. 포기했다는 게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놓지 않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진짜 신뢰가 생긴 거죠. 시사회에서 군산학교를 보는데 눈물이 핑 돌더라니까. 처음이었어요. 그런 느낌. 내가 저곳에 있어야 한다는 느낌. 그리움 있잖아요. 그만큼 그 시간들이 너무 좋았어요.

조근식 | 정말로. 어느 시점이 지난 뒤엔 우린 별로 할 이야기가 없었어요. 승범은 결국 내가 봐도 감탄스럽게 연기했고 설령 내가 오케이를 내도 자기가 ‘감독님 요렇게 다시 한번 더 해보자구요’ 그럴 정도였죠.

승범이를 잡기 위해 류승완 감독을 붙잡고

류승범 | 근데 배우로서 감독님은 피곤한 스타일이야.

조근식 | 그래, 슬슬 나오기 시작하는구나.

류승범 | 그냥 넘어가질 않은 거야. 독하지. 끝까지! 나올 때까지! 결국엔 빼내더라니까 빼낼 것을.

조근식 | 하하.

류승범 | 이 영화 하자고 3년 동안이나 끈질기게 기다린 것만 봐도 그래.

조근식 | 다 승범이 때문이었죠. 뭐. (웃음) 승범이가 아니라면 중필이란 캐릭터가 주인공이 될 수 없었거든요. <품행제로>가 아니라 초반에 <명랑소녀 권법소년>이었을 때 주인공이었던 진우는 어둡고 과묵한 캐릭터였어요. 중필이는 감초 같은 까불이였고. 그런데 승범이를 만나고 난 이후에는 승범이가 가지고 있는 매력을 가지고 주요 인물로 끌어올려야겠다는 확신이 들더라고. 그래서 지금 봉태규가 맡은 수동이 같은 캐릭터에 진우를 합쳐서 중필이를 만들었어요. 그런데 <화려한 시절>을 끝내고 화려하게 뜨니까 나를 안 만나주더라구. (웃음)

류승범 | 저는 유명해지면 거부하는 스타일이에요. (웃음)

조근식 | 사실 <화려한 시절> 끝나고 승범이 만났을 때 그냥 보기에도 얘가 너무 많이 쏟아낸 상태였어요. 그렇다면 내가 채워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원래 작은 역할이던 중필이 역이 자꾸 커지는 거야. 결국 부담이 갔는지 못하겠다고 하더라고. 그 밖에 외적인 상황도 있었지만.

류승범 | 처음부터 이 작품 싫어서 안 하겠다는 게 아니였어요. 얼마나 하고 싶고 좋아하던 시나리오였는데요. 그런데 그때 상황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쳐 있었죠. 처음으로 1년 동안 드라마를 끝낸 상태였기 때문에 더 뻗어나가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쉬는 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던 거였고, 그래서 어렵게 힘들겠다고 했는데 감독님이 의외로 너무 쉽게 쿨하게, 그래 쉬어, 그러더라구. 그렇게 돌아서는 발걸음이 쓸쓸했었어요. 의기투합하고 좋았다가 상황들이 이렇게 만들었다는 게 쓸쓸했죠.

조근식 | 쿨하게 거절했던 건 쉬고 싶은 절실함이 나에게 느껴졌기 때문이었지 뭐. 세상에 죽어도 해야 하는 것이 뭐가 있을까. 그래서 차선을 생각해야겠다, 알았다. 다른 사람하고 해야지. 그러고 3, 4일이 지났는데 자꾸 네가 새록새록 떠오르는 거야. 승범이랑 있었을 때 느꼈던 여러 가지 화학반응들, 뭔가 해보고 싶은 것들이 있었는데 그걸 다 버리고 뭘 할 수 있을까. 마치 나 버리고 떠난 애인처럼 서글프기도 하고 힘들더라구. 이만큼 승범이가 나에게 절실했구나. 그런데 이렇게 절실한 걸 내가 쉽게 포기했었구나. 이렇게 가면 앞으로 많은 것을 포기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 내가 이래 가지고 앞으로 영화를 어떻게 하겠는가. 무엇보다도 승범이를 내 속에서 빼내기가 쉽지 않았어. 사실, 한편 저렇게 힘들어하는 애 데리고 뭔일을 하나. 뭐 이런 생각들이 교차했다가 결국 승범이 아니면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 며칠 지나서 회사사람 잡고 승범이 아니면 못할 것 같다, 류승완 감독까지 만나서 아 진짜 영화 한편 만들어보자, 협박도 하고…. 류 감독은 뭔 죄냐고, 동생이지만 자기 맘대로 하는 것도 한계가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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