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근’감독님이요… 왜 근감독이냐구요 아니, 평생 ‘조’감독만 할 수 없잖아요.” 지금껏 사이좋다는 배우와 감독을 많이 봐왔지만 이들은 단연 최고의 커플이었다. <품행제로>의 ‘문덕고 캡짱’ 류승범(23)이 청한 조근식(35) 감독과의 대화. 그 길다면 긴 3시간의 인터뷰가 거의 30분 시트콤을 보는 것처럼 짧게 느껴졌던 것은 시종일관 터지는 웃음과 함께 그뒤에 찰싹 붙어 있는 뭉클한 이야기 덕분이었다. <명랑만화와 권법소년>이란 시나리오로 처음 만난 것도 벌써 3년 전. 승범이 아니면 안 된다는, 절실함과 결국 나 아니면 안 되는구나, 는 깨달음을 거친 감독과 배우는 이내 귀찮게 따지고 넘어가는 배우와 끈질기게 뽑아내는 감독으로 서로를 학대()하는 모드에 들어갔고 기꺼이 그 괴롭힘을 즐겼다. 그리고 수만 가지 아이디어가 넘쳐나는 생기나는 현장을 통과해 2002년말 질척거리지 않으면서 향수를 자극하는 쿨한 코미디영화 한편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러나 정작 이 두 사람 사이의 이야기는 연애소설을 읽는 것처럼 애틋하고 감동적이었다.
류승범 | 아! 막상 만나니까 할말없네. 무슨 이야기부터 물어보지 사실 우리는 일상이 수다니까 괜히 멍석 펴주면 할 이야기가 없어요.
조근식 | 감독님이 인격적으로 훌륭하시다, 뭐 이런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하는 거 아닌가
류승범 | 예, 저희 감독님은 굉장히 인격적으로 훌륭하신 분이세요.
조근식 | 분위기 좋다!
류승범 | 하하. 사실 칭찬하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그냥 보기엔 헐렁헐렁 해보이는데 현장에선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아요. 하루가 지체되면 몇천만원씩 날아가는 촬영현장이란 곳이 날카롭게 마련이고 릴렉스되기가 힘든데, 우리 현장은 애들이 감독을 막 때리고 그랬다니까요. 나 대하는 거 좀 봐, 이게 친구지. 어디 열몇살 차이나는 감독하고 배우야 그런데 그게 대단한 것 같아요. 보통 감독들이 권위가 떨어지면 영화 전체가 흔들린다는 불안함을 가지고 있잖아요. 그런데 근감독님은 본인은 허물어지면서 역으로 어린 배우들이 주눅들지 않고 연기를 뽑아낼 수 있도록 현장 분위기를 만들어내셨거든요. 한번도 인상을 찌푸리거나 현장을 불편하게 느끼게 만드는 법이 없었어요. 결국 자기가 원하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저렇게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이런 게 소위 말하면 내공이 없으면 안 되는 건데 말이죠.
조근식 | 야, 이건 너무 오버바다… 원하던 분위기는 이게 아닌데….
류승범 | 아이, 다 뻥이죠. (웃음)
첫 만남-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승범에 반하다
조근식 | 아직도 승범이 너를 처음 봤을 때가 기억나. 그게 99년 말이었나. 코아아트홀에서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를 보는데 승범이밖에 안 보이는 거야. 배에서 딱 잡아올린 펄떡펄떡거리는 활어 같은 느낌이었어. 다듬어지지도 않았고 한없는 자유가 느껴지는 놈. 너무 매력있다고 생각했지. 결국 <명랑만화와 권법소년> 시나리오를 가지고 까불까불한 조연역할 때문에 만났잖아. 그런데 별로 일 이야기는 안 하고 밥먹고 수다를 떠는데 이상하게 잘 맞더라고. 생각나냐 2차 가자고 일어섰는데 술집 문이 다 닫아서 슈퍼에서 소주에 오징어 사서 아파트놀이터에서 박해일하고 셋이서 술먹으면서 수다를 떨었던 거 그때 본 류승범에 대한 느낌은 사람들 생각하듯 그냥 양아치적인 매력은 아니었어. 여리고 섬세하고 독특한 느낌, 애늙은이 같은 느낌. 그런 거였지. 나랑 나이 차이가 꽤 많이 나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그런 나이 차이를 못 느꼈을 정도로.
류승범 | 나중에 근감독님 나이보고 깜짝 놀랐잖아. 물론 얼굴을 보면 나이가 있겠구나, 생각했지만 (웃음) 영화 들어가기까지 오래 기다려서 속이 다 타서 그런 건지 산전수전 다 겪어서 그런 건지. 감독님은 상대방을 위해 자신을 기꺼이 낮출 줄을 알아요. 사실 내 나이에 속이 깊다면 얼마나 깊겠어요. 내가 애늙은이 같아서가 아니라 몇년 더 산 사람이 낮춰주니까. 그런 관계들이 가능했던 거죠.
조근식 | 아이, 이렇게 시작하면 내가 이야기하기 점점 힘들잖아. (웃음)
류승범 | 우리가 모르는 80년대에 대한 이야기라 처음에 설명하고 디렉팅하시기 힘든 점은 없으셨어요
조근식 | 시대에 대한 접근이라든지 80년대에 대한 고민은 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 어차피 80년대라는 시대에 대한 이야기를 해봤자 배우들 중에 아느 놈 하나 없을 테니까. 그렇지만 학교라는 공간은 내가 자랐을 때나 승범이 자랐을 때나 별로 다를 바 없을 것 같았어. 오히려 배경보다는 시나리오에 대한 느낌에 대해 이야기를 더 많이 했지. 영화 중에 중필이가 라이터 가스를 ‘훅’ 마시는 장면을 찍는데 승범이가 ‘우리 학교 다닐 때는 라이터는 안 불었어요’ 하면서 대신 혓바닥으로 담배를 끄더라고….
류승범 | 18살 때부터 담배를 피웠는데 그때 그게 유행이었어요. 도저히 라이터는 못 마시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불끄는 걸 해본 건데, 잔머리 써서 이걸 하면 그걸 안 시킬 줄 알았는데 아휴, 두개를 다 시키더만. (웃음) 그나저나 지금은 이래도 우리, 초반 세트 찍을 땐 오해도 많았죠
조근식 | 류승범은 까다롭고 귀찮은 배우야. 조금이라도 의구심이 있으면 풀지 않고는 못 배기고 물어보지 않으면 못 넘기는 성격. 머리나 마음으로 이해되지 않으면 그게 얼굴이나 태도에 금방 드러나거든. 초반엔 나한테 그게 정말 힘들었지. 물론 윽박지르거나 명령하거나 그럴 수도 있었지만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어. 당시에 중요했던 건 감독과 배우간에 애정이나 신뢰도를 쌓아가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런 문제에 봉착할 때면 아예 촬영을 모두 중단시키고 너랑 이야기를 많이 나누려고 했어. 특히 삭제된 신인데 중필이 민희(임은경)랑 키스한 뒤에 방 안에 누워서 키스한 거 생각하면서 씩 웃는 장면이 있는데, 이놈이 안 웃는 거야.
류승범 | 웃었다니까요. 내 마음속으로 작은 미소를 하나 지었어요.
조근식 | 그래서 이렇게 사람들 보이게 입 올리고 씩 웃어야지, 그러니까 아니래, 그리고는 말도 안 하고 입 이만큼 쭈욱 나와서….
류승범 | 아이, 진짜… 다 지난 일을… 그래요. 난 어떤 식으로든 의사표현을 해요. 단 소심해서 감독님 나 이렇게는 못해요! 이런 식으로는 안 하죠. 그러나 어떻게든 티를 내지. 스탠바이, 그러면 괜히 늦게 가고 소심한 반항을 하지, 맘에 안 든다 이거라. (웃음) 초반에는 감독님하고 코미디에 대한 접근이 안 되는 거예요. 나는 이 영화를 비극적으로 받아들였고 나한테는 그게 더 센 거야. 나는 중필이를 그렇게 과장된 인물로 보질 않았거든요. 그러니까 모든 디렉팅이 조금은 억지스러운 느낌이 들었죠. 그때 감독님이 ‘중필이는 도심 한가운데 있는 섬 같은 아이’라는 말을 하셨잖아요. 나 그때 이해했잖아요. 그전까지 중필이를 ‘그냥 섬이다’라고만 생각했거든. 나 스스로가 나를 가둔 아이라고. 그러나 감독님하고 이야기 하는 가운데 결국 코미디는 장치일 뿐이라고, 결국 그 장치를 통해서 진짜 이야기를 하고 싶어한다는 걸 안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