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모의 일본사회 비판
영화경력의 초창기부터 오시마가 영화 속에 빈번히 끌고 들어온 소재들 가운데 하나는 범죄 행위에 관한 것이었다. 단순한 스펙터클말고도 영화에서 이걸 갖고 논할 수 있는 건 다른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오시마는 일본사회, 예를 들면 <소년>(1969)의 경우에서 보듯 자유에의 갈구가 범죄행위로 인도되고 마는 불모의 일본사회에 대해서 이야기할 영화적 도구로 이것을 이용했다. 그리고 좀더 과감히 나갈 때 그는 범죄행위를 국가 자체에 대한 근저로부터의 공격과 연결지었다. 그 예를 우리는 오시마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교사형>(1968)에서 볼 수 있다. 교수형 집행을 당했으나 ‘죽음을 거부한’ 재일한국인 R을 둘러싸고 영화가 전개된다. 당황한 사형집행인들은 기억을 상실한 채 살아난 R에게 범죄사실을 인식시키기 위해 R의 과거를 재연하는 교육 프로그램에 착수한다. 사형수는 자신의 죄를 의식한 상태에서 처벌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두 여고생을 강간·살해했다는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R이 결국 자신이 그 범죄자 R임을 받아들이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은, 다름 아닌 국가가 그 R을 만들었고 그리고는 그를 죽인다고 하는 점이다. 일본이라는 틀려버린 시스템을 문제삼는 급진적인 영화감독 오시마의 면모들은 그의 영화들 속에서 나오는 일본의 국기가 ‘훼손’당하는 장면들로도 확인되곤 한다. 이를테면 <소년>의 오프닝에서 오시마는 일본 국기의 태양 부분을 검은색으로 처리함으로써 그것이 이미 죽어버린 상징물임을, 더 나아가 일본 역시 생명력을 거의 상실한 상태임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심지어 <감각의 제국>(1976)의 한 장면을 보면 아이들이 든 일장기는 불경스럽게도 거지 노인의 지저분한 사타구니를 건드리는 장난감으로 쓰이기까지 한다.
60년대의 오시마, 혹은 70년대 초반까지의 오시마는 분명 전후 일본의 잘못된 상태, 비틀린 도덕, 삐걱대는 시스템 등을 문제삼는 정치적 영화감독이었다. 한편으로 그는 그 정치적 문제들을 그야말로 급진적인 형식 안에 담아낼 줄 아는 전위적인 감독이기도 했다. 오시마 영화의 형식에 대해 이야기할 때, 작가(auteur)는 곧 주제와 스타일의 일관성을 지닌 영화감독이라는 공식이 자동 입력되어 있는 이들에게 작가로서의 오시마라는 문제는 아주 곤혹스러운 것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의 영화세계는 형식적 유사성을 가지고 1기, 2기, 3기, 하는 식의 시기 구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영화들마다 스타일상의 넓은 스펙트럼 사이를 이리저리 왔다갔다한다. 확실히 오시마는 오즈 야스지로나 로베르 브레송처럼 일관된 자신의 스타일을 가진 감독이 아니다. 예컨대 그는 <일본의 밤과 안개>에서 무대 조명을 적극 이용한 연극적 기법과 전체 숏의 수가 단 43개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긴 숏들을 이용해 관객의 적극적 참여를 유도했는가 하면, <백주의 살인마>(1966)에서는 전체 2천개가 넘는 숏들을 가지고 격렬한 몽타주를 구사해 보이기도 했다.
또 그의 영화세계에서는 초창기의 몇몇 영화들처럼 다큐멘터리적 접근을 한 작품들과 리얼리티와 환상 사이의 경계가 교란되는 방식을 쓴 영화들(<교사형>)이 공존한다. 이건 형식에서도 자기 부정을 계속해가는 우상파괴주의자인 오시마에게 중요한 것은 스타일의 완성된 체계를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자신이 이야기하고 있는 이슈에 적합한 스타일을 발견해 적용하는 것이었음을 알려준다. 오시마 스스로도 내용은 자신에게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가지고 작업해야 하지만 “형식이란 항상 빌릴 수 있는 어떤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오시마가 그 ‘빌린’ 형식을 다른 어떤 감독들보다도 잘 이용할 줄 알았다는 것이고 항상 정치적으로 구사하려고 고심했다는 점이다.
<감각의 제국> 이후 활력 잃어
70년대 초반까지 어느 모로 보나 영화적 급진주의자였던 오시마의 면모가 바뀌었다는 인상이 들게 되는 것은 <감각의 제국>부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성적 표현의 수위에서는 도발성의 극치에 도달했다고 할 만한 영화였지만 대신 예전의 오시마 영화들이 보여줬던 정치적 에너지는 거세가 된 영화였고 탐미적인 화면들이 눈을 잡아끌지만 예전 영화들에 드러났던 활기찬 형식적 탐구는 찾아볼 수 없는 영화였다. 오시마의 영화세계는 대략 <감각의 제국>을 기준점으로 그 전과 후로 나뉜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이 영화 이후로 그의 영화들은 하나같이 예전 작품들의 활력을 상실했다. 사실 <감각의 제국>, <열정의 제국>(1978), <고하토>는 모두 일본이란 국가의 중요한 역사적 시점에 정박해 있으면서 어떤 식으로든 일본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세 영화 모두 그런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 너무도 우회적이어서 각각 그저 탐미적인 포르노그라피, 불길하게 아름다운 괴담, 우수에 찬 사무라이영화 정도를 넘어서 그 이면들을 들여다보기가 다소 힘들어진다. 다른 한편 형식적 탐구에 대해 말하자면 오시마의 후기 영화들은 죄다 특별히 이야기할 것이 없을 정도다. 1974년에 쓴 한 에세이 <녹색의 추방>에서 오시마는 평정(平靜)의 상태를 상징하는 색깔인 녹색(과 이 색과 관련된 모든 일본적인 것)을 혐오한다고 말한 바 있는데, 이제 오시마는 자신이 싫어했던 바로 그 색에 그 자신이 한두 걸음 더 가까이 간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감각의 제국>을 전후로 어떤 일이 일어났던가 그 이전 시기는 일본사회 전체는 머뭇거리는 듯했고 지식인들은 대체로 무기력증에 빠져 있었으며 영화산업은 침체하고 있던 때였다. 그때쯤에 오시마는 이제 비로소 자신이 젊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용기의 부족 같은 것을 느끼게 되었다. 이런 일종의 무력감은 그의 영화 속에도 고스란히 이월된 듯하다. 60년대 그의 영화들은 당대 일본사회와 그 문제들에 대해 그가 직접 대면하고 반응하면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쇼치쿠 입사 시험을 치르기 전 <아사히신문>에서 일하고 싶어했던 오시마는 자신의 영화가 무엇보다도 다큐멘터리적 추동력에 의해 만들어진 것, 저널리즘적인 특성을 가진 것이라고 여겼다. 예컨대 <일본의 밤과 안개>는 흔히 대학 시절 학생운동에 가담했던 오시마의 자전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리고 그런 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은 당시 학생운동에 대한 자신의 분석·진단 끝에 만들어진 영화였다. 그 밖에도 오시마의 다른 다수의 영화들이 실제 사건에 기초해 만들어졌다는 것은 현실과의 대면의식을 넌지시 일러준다. 그러나 70년대 이후 오시마의 영화는 그 같은 현실과의 대화를 잃어갔고 실제 일어났던 일을 기초로 하더라도 당대로부터 차츰 멀어져갔다. 게다가 그는 국제적인 감독이 되고 싶다고 공언하면서 실제로 일본 바깥에서 몇편의 영화들을 만들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들 속에는 좀더 많은 관객을 끌겠다는 의도도 확연히 보였다. 정치적 영화들을 만들었을 때 오시마는 그렇지 않았었다. 그는 자신의 영화가 전체 대중이 아니라 대중의 일면과 만날 것을 분명히 고려하고 있었다. 이렇게 70년대 이후의 오시마는 어쩌면 60년대의 일본이라는 자기 본연의 영역 그리고 그것과 대결하는 자세로 영화를 찍는다고 하는 자기 본연의 태도를 떠나서 완전한 착지를 하지 못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어떤 영화감독이든지 자기가 정해서 갈 길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성취면에서 볼 때 앞뒤의 균형이 맞지 않기 때문일 오시마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은 아쉬움을 준다. 게다가 비슷한 시대에 똑같이 ‘누벨바그’라는 레이블 있었던, 여전히 문제작들을 내놓고 있는 프랑스의 감독들, 특히 그와 자주 비교되는 장 뤽 고다르의 최근 행보와 비교해보면 안타까움은 더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