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오시마 나기사(大島渚) 회고전 [1]
2003-01-16
글 : 홍성남 (평론가)
전후 일본영화의 최전선 오시마 나기사, 그 반역과 전락의 연대기

거장 오시마는 어떻게 몰락했나

오시마 나기사(1932-)는 지금 와병중이다. 일본에선 그가 병상에서 다시 일어나는 일이 그리 희망적이지 않다고 보고 있다. 전후 일본영화계 아니 일본사회 전체를 뒤흔들었던 당대의 반역아요 미학적 혁명아였던 그래서 평생 늙을 수 없을 것같던 오시마도, 그렇게 생로병사의 마지막 지점까지 오고 말았다. 문화학교서울에서 열리는 그의 회고전은 그래서 뜻깊다. 우리는 잔인하게도 그의 전락의 이유를 따져보기로 했다. 이건 한시대의 아이콘이었던 천재 감독에게 바치는 또다른 헌사다.

2000년 칸영화제에서 선보인 오시마 나기사의 <고하토>는 이 영화에 특별한 기대를 가진 많은 이들을 다소 실망시킨 영화였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비평적 지지를 전혀 얻지 못했던 것만은 아니다. 예컨대 미국의 영화평론가 조너선 로젠봄 같은 이는 <고하토>의 미국 개봉을 앞두고 쓴 리뷰에서 “시적 스타일의 승리” 운운하며 이 영화가 단연 별 네개짜리 ‘걸작’이라고 상찬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많은 저널리스트들과 평자들은 이 영화를 그리 좋게 보지 않았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다.

영화는 1860년대를 배경으로 신센구미(新鮮組)라는 사무라이 집단의 괴멸을 그린다. 묘한 중성적 매력을 풍기는 미소년 카노 소자부로가 이 집단에 들어오면서 사무라이들은 열정과 애욕, 그리고 질투의 늪을 헤매게 된다. <고하토>가 다루는 것들, 즉 엄격한 법도를 준수하는 억압적 조직의 내부 붕괴, 그 조직 안에서 만들어지는 에로틱한 공간, 그리고 죽음과 성적 욕망 사이의 고리 등은 오시마가 충분히 관심을 갖고 다룰 만한 주제들이었다(유사한 관심사를 다룬 오시마의 영화로는 우선 <전장의 메리 크리스마스>(1983)가 떠오른다). 그러나 여기서 오시마가 이것들을 다루는 태도는 지나치게 조심스럽거나 갈팡질팡해하는 듯이 보이고 자연히 영화의 캐릭터와 내러티브는 필요한 추동력을 제대로 얻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고하토>는 탐미적이긴 하되 오시마 특유의, 혹은 내심 그에게서 기대했던, 도발을 보여주진 못한 영화가 되고 말았다. 심지어 칸영화제 당시 어떤 언론에서는 이 영화를 두고 도발이라기보다는 ‘난센스’에 가깝다는 혹평을 하기도 했다.

이런 실망의 이면에는 물론 영화 자체가 비범하지 못하다는 이유 외에도 오시마에 대해 갖고 있는 어떤 평균 이상의 기대 같은 것도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그의 전작 <막스 내 사랑>(1986)은 정말이지 실망스런 영화였다. 그러나 그뒤 14년 만에 만드는 신작은 다르지 않을까 아무리 오랫동안 메가폰을 놓고 있었대도, 그래도 오시마 아닌가’ 하는 기대. 그런데 그 오시마가 이번에도 걸작을 가지고 나타나지 못했고 그만큼 기대는 더 큰 실망으로 변질된 듯싶다(어떤 면에서는 그와 비슷한 연배인 이마무라 쇼헤이가 예전만은 못하더라도 여전히 평균 이상 되는 수준의 작품들을 내놓고 있음을 함께 상기하면서). 그렇다면 오시마란 이 영화감독이 대체 어떤 존재이(였)기에 평자들로 하여금 실망을 심화시킬 만큼의 기대 혹은 주목을 갖게 했던 것일까?

이마무라는 농부, 오시마는 사무라이

오시마의 면모를 살펴보기 전에 우선 그를 어떻게 정의할까, 하는 문제부터 이야기해보자. 그를 간명히 정의할 때 자주 이용되는 것은 이마무라가 이야기했다고 하는 이런 문구이다. “내가 시골 농부라면 오시마는 사무라이이다.” 용맹스럽게 칼을 휘두르며 굽힘없이 싸우는 자로서 사무라이는 일견 오시마에게 꼭 들어맞는 이미지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마디로 이야기하자면, 오시마는 일본의 지배 체제와 그 이데올로기와 맞서 싸웠고, 일본영화의 전통, 그리고 기존의 ‘낡은’ 영화형식과도 전투를 감행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사무라이에 충직하게 주군을 섬기는 자라는 의미도 담겨 있음을 생각한다면 이건 오시마에게 그리 어울리지 않는 별칭이 될 수도 있다. 오시마는 기존의 것들과 치열하게 싸운 존재이긴 했지만 자신보다 높은 곳에 있는 그 누군가를 위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그를 좀더 제대로 정의하려면 다른 말이 필요할 것 같다. <오시마 나기사의 영화들>이란 책을 쓴 모린 투림은 오시마를 ‘우상파괴주의자’(iconoclast)라는 한 단어로 정의할 것을 제안한다(따라서 이 책의 부제는 ‘한 일본인 우상파괴주의자의 이미지들’이다). 이 말이 뜻하는 바가 ‘사람들이 신봉하는 믿음들과 전통적인 제도들에 대해 끊임없이 공격을 감행하는 사람’이라면 오시마에게 이보다 적절한 단어를 찾기도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오시마라는 이 우상파괴주의자의 면모는 영화경력의 초창기부터 드러났다. 쇼치쿠 스튜디오에 입사해 조감독 생활을 하던 시절에 이미 그는 현실성 없고 틀에 박힌 멜로드라마나 만들어내는 회사의 안이한 경영방침을 격하게 비판했다. 예컨대 영화평론가 사토 다다오 등이 50년대 후반의 쇼치쿠를 비판하면서 ‘잠자는 사자’라고 표현했을 때, 오시마는 그런 표현은 너무 점잖다며 한술 더 떠서 자신의 소속 영화사를 가리켜 ‘죽은 사자’라고 불렀을 정도다. 물론 그의 혐오의 대상이 된 것은 쇼치쿠의 영화들만이 아니라 뻔한 장르의 틀 안에서 만들어진 이른바 ‘프로그램 픽처’, 그리고 전체로서의 일본영화였다. 한때 오시마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일본영화에 대한 나의 증오에는 확실히 일본영화의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 부정적 의미에서의 일본 상업영화들만이 아니라 서구에서 특히 높은 평가를 받는 정제된 미학의 일본영화들(예컨대 미조구치 겐지의 영화들)과 값싼 휴머니즘의 색채를 띠는 거장들의 일본영화들(예를 들어 구로사와 아키라의 <이키루>)까지 정말이지 일본영화의 모든 것들이 오시마가 배격한 대상이었던 것이다.

오시마는 자신이 쓴 어떤 글에서 스튜디오는 그것에 휘둘리지 않는 내적 의식을 가진 새로운 일군의 감독들에게 자기 표현의 기회를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런 주장이 자신에게 되돌아와 결국 현실화되었을 때 그는 과거의 것과는 다른 영화를 만들어냄으로써 자신의 주장이 결코 헛된 게 아니었음을 입증해냈다. 특히 1960년 한해에만 보여준 오시마의 영화적 에너지는 굉장히 놀랄 만한 것이었다. 이 해에 그는 <청춘잔혹이야기> <태양의 묘지> <일본의 밤과 안개>로 이어지는 세편의 영화를 만들었는데, 이 세편 모두 단명했던 이른바 ‘쇼치쿠 누벨바그’의 걸작으로 꼽아도 손색이 없으리만치 활력이 넘치는 작품들이었던 것이다. 앞의 두 영화가 상업적이라고 할 만한 영화적 틀 안에다가 당대 일본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겪는 환멸의 의식을 녹여낸 다소 절충적인 영화였다면, <일본의 밤과 안개>는 스튜디오에서 만들어졌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급진적인 방향으로 굉장히 멀리 나간 영화였다. 처음에 쇼치쿠쪽에서는 오시마가 결혼식이 소재인 영화를 만들겠다고 이야기하기에 멜로드라마 정도를 만들려니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완성된 영화를 보고 간부들을 당혹스러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건 각각 구좌파와 신좌파의 일원이었던 신랑 신부의 결혼식장에서 정치투쟁의 과오에 대한 말 그대로의 논쟁이 벌어지는 영화, 그래서 정치영화라고밖에는 달리 부를 도리가 없는 유의 영화인 것이었다.

90년대의 오시마 나기사휠체어에 의지해 <고하토>를 찍기까지

한 중산층 주부가 침팬지와 사랑에 빠진다는 이야기를 그린 루이스 브뉘엘식의 코미디 <막스 내 사랑>을 내놓은 지 장편극영화로는 무려 13년 만에 발표한 오시마의 신작이 <고하토>이다. 그럼 그 13년이란 긴 시간 동안 오시마는 과연 어떤 일을 했었던 것일까 사실 오시마 자신도 <막스 내 사랑> 이후의 영화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려 나오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우선 90년에 그는 <할리우드 젠>(Hollywood Zen>이란 프로젝트에 착수할 계획이었다. <전장의 메리 크리스마스>의 제작을 맡았던 제레미 토마스가 다시 관여할 이 프로젝트는 무성영화시대 할리우드에서 활약했던 일본인 배우 하야가와 셋슈에의 삶을 다룰 예정이었다. 그러나 파이낸싱에 문제가 생기면서 결국 이 프로젝트는 백지화되고 말았다.

90년대에 오시마는 영국의 텔레비전 방송사에서 기획한 두편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BBC 스코틀랜드가 기획한 영화감독들의 전기 시리즈 가운데 하나인 <교토, 내 어머니가 사는 곳>(1991)과 BFI 영화 100년 다큐멘터리의 일본편인 <일본영화 100년>(1995)이 그것들. <일본영화 100년> 같은 경우는 일본영화의 전개를 연대기적으로 살펴보는 다큐멘터리인데, 이것을 장 뤽 고다르가 만든 시리즈의 다른 편인 <프랑스 영화 2×50년>과 비교해보아도 이제 오시마의 창의력이 다소 쇠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게 된다. 한편으로 90년대에 오시마는 일본쪽 대변인의 자격으로 미국영화의 지배에 대해 세계 영화감독들이 반대하는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자신이 영화경력을 시작했던 쇼치쿠로 돌아와 <고하토>를 찍기로 했던 오시마는 95년 뇌졸중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이 프로젝트에도 당장 매달릴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오시마는 휠체어에 의지해 결국 <고하토>를 완성해냄으로써 90년대의 끝에서야 또 한편의 장편극영화를 필모그래피에 추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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