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타이틀 시퀀스의 세계 [5]
2003-01-24
글 : 김현정 (객원기자)
글 : 김혜리

오타 발견! 그래도 우아하도다

글씨체의 디자인과 크기의 배열이 낳는 스펙터클한 타이틀 시퀀스 BEST

영화 제목과 대사, 제작진의 이름을 종이카드 위에 손으로 써서 집어넣었던 초기 영화에서도, 지극히 궁한 예산으로 살림을 꾸려야 하는 현대 독립영화에서도, 글자는 모든 프릴과 장식을 떼어낸 타이틀 시퀀스가 버릴 수 없는 마지막 기본사양이다. 그러나 오늘날 타이틀 시퀀스 디자인의 세계에서는 더이상 글자가 정보를, 비주얼이 스타일을 분담하지 않는다. 글씨체의 디자인과 폰트의 배열만으로도 엄연히 지향하는 스타일을 선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핀처의 <패닉 룸>은 맨해튼의 거대한 빌딩 입면과 같은 앵글의 평면을 가정하고 공중의 가상 평면에 금속성의 글자들을 공중에 띄워 크레딧 하나하나가 권위있는 구조물처럼 보이게 하는 효과를 얻었다. 유리와 철골 구조의 건물에 크레딧을 박은 솔 바스의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오프닝 시퀀스를 상기시키는 아이디어. 폴 버호벤의 <할로우 맨>은 크레딧의 알파벳을 유기체처럼 번들거리는 투명한 글씨로 표현했다. 투명인간이라는 영화의 소재를 강조하는 동시에 현미경으로 세포의 세계를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감상을 자아낸다.

<로얄 테넌바움>의 웨스 앤더슨은 인형의 집을 짓는 듯한 편집증적 연출로 정평난 감독. 자기식의 노트 필기를 고집하는 모범생 사춘기 소년 같은 앤더슨은 자기 영화의 모든 타이틀과 크레딧의 글자를 푸트라 볼드체로 고집한다. 파블로 페로는 손으로 쓴 수제 크레딧으로 유명한 디자이너. <아담스 패밀리> <맨 인 블랙>으로 젊은 관객에게 익숙한 그의 대표작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에는 수제품답게 오자도 발견된다.

잘린 손톱의 빅 클로즈업으로 시작하는 <가타카>의 정갈한 오프닝 크레딧에서 모든 g, c, t, a는 굵은 세리프체의 하이라이트로 표기됐다. 제목에 든 철자들을 특별대우함으로써 유전공학에 의한 신분제라는 영화의 소재를 부각시킨 것. <가타카>의 앤드루 니콜 감독은 최근작 <시몬>에서 알파벳 I와 O의 자리에 디지털 신호를 뜻하는 1과 0을 바꿔넣는 재간을 피우기도 했다. 당신이 가난한 감독이라고 해도 검은 바탕에 흰 글씨를 쓴 크레딧으로 쉽게 만족하지 말 것.

비명과 경찰의 무전교신이 뒤섞인 소음 속에 ‘세븐’이라는 단어를 두번 집어넣었다. <미믹>과 <쎄븐> 오프닝 타이틀을 모두 디자인한 카일 쿠퍼가 그 자신의 작품에 경의를 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보수적인 영화계에 광고와 음반의 그래픽을 최초로 도입한 디자이너”라고 평가받는 카일 쿠퍼. 그의 초기작 <쎄븐>은 핀에 꽂힌 나방의 날개가 재앙을 예고하는 사운드와 겹치는 <미믹>의 오프닝 타이틀조차 ‘곤충판 <세븐>’이라는 비아냥밖에 얻지 못했을 정도로 강렬한 ‘예술’이었다. <쎄븐> 오프닝 타이틀은 관객이 이름없는 살인자와 단독으로 대면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면도날로 지문을 베어내고 옛 서적들을 뒤져 살인의 의식을 준비하는 빛바랜 영상, 오래된 필름을 영사하는 것처럼 초점을 잃으며 깜박이는 날카로운 글씨체, 신경을 긁어대는 트렌트 레즈너의 음악은 영화가 말하지 못한 살인자의 내면을 순식간에 각인시킨다. 쿠퍼는 에이젠슈테인을 공부하면서 이미지를 나열하고 조합하는 법을 익혔다. 때로 MTV의 영상을 모방했다는 비판을 받지만, 쿠퍼는 50년대 솔 바스가 했던 혁명을 90년대에 이룩했다.

<닥터 모로의 DNA>는 그 자체로 완성된 영상물이면서 영화의 의미를 함께 담으려 하는 쿠퍼 특유의 오프닝 타이틀을 선보인다. <닥터 모로의 DNA>는 기형 생물들이 가득 찬 무인도가 배경. 유전자가 결합하고 세포가 분열하면서 웅크린 태아의 모습으로 다가가는 오프닝 타이틀은 유령선처럼 불길하게 흔들리면서 저주받은 섬을 향해 관객을 이끈다. 오프닝 타이틀의 개척자인 솔 바스는 <카지노>에서 쿠퍼와는 또 다른 분위기의 그래픽을 실험했다. 첫 장면에서 폭발하는 자동차와 함께 공중으로 던져진 에이스(로버트 드 니로)의 시체는 형광색 도시 라스베이거스를 부유하면서 어느덧 오프닝 타이틀로 스며든다. 네온이 빗방울처럼 쏟아지는 그래픽을 뒤에 두고, 바스는 그리 행복하지 못했을 것 같은 이 남자가 카지노의 환락과 거짓 속에서 보냈을 삶을, 꿈꾸었을 사랑을, 흐르는 이미지로 들려준다. 솔 바스와 카일 쿠퍼는 감독들의 잔소리와 제작비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몇분 동안의 꿈같은 시간을 창조하는 데 성공했던 드문 디자이너들이었다.

타이틀 시퀀스의 장인

솔 바스(1920∼96)황금 감각을 지닌 사나이

마틴 스코시즈는 “솔 바스의 타이틀이 스크린에 나타나는 순간, 진정한 영화가 시작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관객에게 그 영화의 감정을 전달하는 바스의 능력을 깊이 신뢰했고, <좋은 친구들> 이후 <카지노>까지 모든 영화의 오프닝 타이틀을 바스에게 맡겼다. 바스의 유작 <카지노>는 일흔다섯 나이에도 새로운 영화의 흐름에 주저없이 몰입했던 한 장인의 영혼이 담겨 있는 작품이다. 운명처럼 돌아가는 룰렛 위에 라스베이거스의 네온이 쓸쓸하게 비치는 <카지노>에는 40년 넘게 오프닝 타이틀에 매달렸던 바스의 평생이 함께 흘러가고 있다.

미술을 공부한 바스는 뉴욕에서 영화광고를 만들다가 오토 프레민저의 제의를 받고 오프닝 타이틀 제작을 시작했다. 바스가 “타이틀 디자이너들이 동굴 속에서 살고 있던 암흑시대”라고 회상하는 1950년대, 프레민저는 애니메이션 기법을 사용한 <황금팔을 가진 사나이>의 파격적인 오프닝 타이틀을 수용하면서 열한편의 영화로 이어지게 될 기나긴 동반의 시작을 다졌다. 프레민저와 함께 바스의 오랜 파트너가 된 감독은 앨프리드 히치콕이었다. 히치콕은 녹색 필드가 뉴욕 고층빌딩 유리창으로 바뀌는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오프닝 타이틀을 보고 영화에 뉴욕 풍경을 추가해야겠다는 영감을 얻었다고 고백했다.

바스는 오프닝 타이틀 최고의 거장이었지만, 명성에 안주하지 않으면서 실험을 거듭한 디자이너였다. 영화평론가 앤드루 새리스는 오직 바스의 타이틀을 보기 위해 영화 <워크 온 더 와일드 사이드>를 보러갔다고 썼다. 오프닝 타이틀을 홀로 설 수 있는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던 바스는 새리스가 보낸 경의에 어울리는 장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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