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타이틀 시퀀스의 세계 [2]
2003-01-24
글 : 김혜리
글 : 김현정 (객원기자)

주인공부터 잡을 테면 잡아 봐!

애니메이션부터 3D까지, 영화주인공을 소개하는 타이틀 시퀀스 BEST

실험영화가 아닌 다음에야 영화를 보러간다는 것은 결국 어떤 사람을 사귀고 그의 파란만장한 사연에 귀기울이는 경험과 비슷한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 생각하는 적지 않은 영화들이 3분 남짓한 타이틀 시퀀스를 ‘표지 인물’을 소개하는 영화의 커버스토리로 활용한다.

2D애니메이션과 3D애니메이션 촬영을 결합한 <캐치 미 이프 유 캔>의 재기만점의 타이틀은 가까운 모범사례. 버진 애틀랜틱 항공사의 기내 안전수칙 영화를 제작했던 런던 넥서스 프로덕션의 작품인 <캐치 미 이프 유 캔>의 오프닝 크레딧은 추적자로부터 딱 한 발짝 앞서 달아나는 남자를 따라간다. 파일럿 차림의 청년은 도망치는 도중 의사로, 다시 변호사로 옷을 갈아입는가 하면 풀장의 미녀들을 희롱하는 망중한도 즐긴다. 1960년대 클래식영화의 애니메이션 인트로를 연상시키는 이 2분40초짜리 복고적 애니메이션은, 영화광 스필버그 감독의 아이디어. 넥서스의 디자이너들은 플롯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던 시제품을 폐기하고 둔갑하는 사기꾼과 중절모를 쓴 FBI, 그리고 추적 상황만 실루엣으로 명쾌히 드러내는 현재의 산뜻한 버전에 안착했다.

<오스틴 파워>의 타이틀 시퀀스는 정력이 곧 탁월한 첩보 능력으로 직결되는 주인공 오스틴 파워의 모든 것, ‘모조’에 초지일관 집중한다. 그래서 말 그대로 오스틴의 국부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신혼 초야에 아내가 가미가제 병기임을 발견한 새 신랑 오스틴 파워는 슬픔을 극복하고 나체로 호텔을 천방지축 활보하지만, 바나나, 로스트 비프, 바게트 빵 같은 편리한 소품과 크레딧이 번갈아 오스틴의 몸 가운데를 가린다. 영화의 핵심 펀치라인을 강조하고 크레딧의 주목도도 끌어올린 실속있는 경우다.

오스틴 파워가 캐리커처처럼 단순 명료한 캐릭터라면 타인의 삶을 훔치는 남자 리플리는 잡히지 않는 신기루다. 톰 리플리의 얼굴에 드리운 휘장을 한장씩 걷어올리듯 시작하는 <리플리>의 오프닝에서 맷 데이먼은 정물처럼 앉아 있다. 그의 옆얼굴이 완전히 빛의 반대편에 놓이는 순간, 원제 타이틀의 ‘재능있는’(talented)은 열정적인, 혼란스런, 고독한, 지적인 등의 수많은 형용사로 뒤바뀌면서 인물의 카멜레온적 속성을 대변한다.

경찰의 감시사진과 주인공의 클로즈업을 콜라주한 <도니 브래스코>의 오프닝 크레딧 역시 주인공의 아웃사이더적 성격과 강박관념을 포착한 애수에 찬 명작이다. 흑백 화면에 쓴 상이한 스타일의 형사 박중훈과 장동건의 무용담으로 허두를 떼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타이틀 시퀀스는 인물의 극적인 등장에 중점을 둔 오프닝이다. 이처럼 액션과 정지 화면을 이용해 콘서트 무대에 선 밴드의 리더가 멤버를 하나씩 호명하듯 비장하게 인물을 소개하는 타이틀 시퀀스로는 <와일드 번치> <태양은 없다> 등이 대표적이다. <포룸>은 고군분투하는 호텔 벨보이 팀 로스를 익살스런 애니메이션 캐릭터로 변신시켰다. <쥬라기 공원>의 극중 애니메이션을 만든 밥 커츠가 연출했다. <저수지의 개들>의 미스터 오렌지가 타란티노의 제작사 밴드 어파트 로고에서 빠져나와 벨보이로 환골탈태하는 서두의 윙크가 백미다.

007과 <핑크팬더> 시리즈본드, 관객을 향해 총을 겨누다, 또 겨누다, 그리고 또다시…

제임스 본드가 스크린으로 걸어나와 총을 쏘는 ‘건배럴’(Gunbarrel) 로고는 MGM의 사자나 유니버설의 지구만큼 유명한 상징이다. 첫 번째 007 영화 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온 이 로고는 모두 열네편의 007 오프닝 타이틀 디자인을 담당한 모리스 바인더의 작품. 숀 코너리와 로저 무어, 피어스 브로스넌 등이 아주 조금씩 다른 포즈로 관객을 향해 총알을 날렸지만, 가장 먼저 권총을 쥔 사나이는 스턴트맨 밥 시몬스였다. 숀 코너리의 대역이었던 시몬스는 모두 세편의 007 시리즈 오프닝 타이틀에 출연한 뒤 본래 주인공 숀 코너리에게 자리를 넘겼다. 실루엣만 드러나는 여체가 각각의 영화에 어울리는 오브제를 희롱하는 오프닝 타이틀 역시 1편부터 계속된 버릇이다. 바인더의 조수 트레버 본드가 여체를 활용하자는 제안을 낸 이래, 007 시리즈는 의 황금빛으로 빛나는 도금된 여체와 레닌 동상 주변을 유영하는 의 검은 실루엣, 고문받는 본드를 잔혹하게 덮치는 로 이어졌다. 최근 007 시리즈는 ‘건배럴’에 3D 기법을 더했지만, 장수 시리즈다운 고집은 잃지 않고 있다.

93년이 마지막 출연이었지만, 핑크팬더는 제임스 본드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60, 70년대를 풍미했던 오프닝 타이틀의 주인공이다. 워너브러더스의 애니메이터 프리츠 프렐렝은 <핑크팬더> 시리즈의 감독 블레이크 에드워즈의 부탁으로 100여 가지에 달하는 팬더 캐릭터를 디자인했다. 마치 영혼의 동반자를 알아본 연인처럼, 에드워즈가 한눈에 지목한 팬더가 바로 지금의 핑크팬더. 가냘픈 팔다리가 커다란 손발을 주체하지 못해 휘청거리는 핑크팬더는 아홉편의 <핑크팬더> 시리즈의 처음을 열었고, 지금은 DVD 광고용 트레일러에서도 활약 중이다.

자료협찬 영화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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