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타이틀 시퀀스의 세계 [3]
2003-01-24
글 : 김혜리
글 : 김현정 (객원기자)

인간의 위선과 배반을 한눈에

영화제목에 담긴 뜻을 설명하는 타이틀 시퀀스

타이틀 디자이너 솔 바스는 “<싸이코>는 워낙 많은 뜻을 가진 단어이기 때문에 오프닝 타이틀이 제목의 의미를 분명하도록 만들어야 했다”고 말했다. 제목이 지나치게 풍성한 의미를 담고 있거나 심오하다면, 그리고 그 제목을 포기할 수 없다면, 단어를 깎고 다듬어서 관객에게 안기는 가이드 역할은 오프닝 타이틀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스파이크 리와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와 주로 작업했던 랜디 볼스마이어는 <차이니스 박스>에서 바로 그런 역할을 떠맡았다. 당시로선 드물게 100% 컴퓨터그래픽으로 작업한 이 오프닝 타이틀은 홍콩의 그림엽서와 염주, 우표가 붙은 편지봉투 등 기억이 담긴 물건들을 차이니스 박스 속으로 차곡차곡 밀어넣는다. 식민지로 보낸 백년의 시간이 뒤섞여 오래된 나뭇결 안에 봉인되는 것이다. 볼스마이어는 “나와 웨인왕 감독은 끝나지 않는 나선과도 같은 차이니스 박스가 홍콩의 반환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정체성이라는 주제를 반영하고 있다는 데 합의했다”고 말했다.

솔 바스가 디자인한 <현기증>과 <살인의 해부>는 제목을 곧이곧대로 따라가는 것 같으면서도, 간단한 그래픽 안에서 쉽게 파악할 수 없는 의미를 풀어낸 타이틀이다. 인체를 조각조각 나눈 애니메이션이 퍼즐을 맞춰가는 듯한 느낌을 주는 <살인의 해부>는 바스가 “영화의 미스터리와 함께 인간의 위선과 배반을 메타포로 응축한” 걸작. 이 간결한 오프닝 타이틀은 싸움과 화해를 반복하면서 오랜 파트너로 인연을 맺었던 오토 프레밍거와 솔 바스가 하고 싶은 이야기 하나를 각기 다른 형태로 완성한 듯한 느낌을 준다. 앨프리드드 히치콕의 <현기증>은 제목의 의미가 그대로 몸 속으로 뚫고 들어오는 타이틀이다. 타이틀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정말 현기증이 나기 때문이다. 히치콕이 좋아하는, 커다랗게 뜬 여자의 눈동자는, 검은 동공이 확대되면서 소용돌이치는 태극문양 나선으로 변해간다. 암흑 속에서 출렁이는 네온빛 그래픽은 다시 카메라와 함께 여자의 눈동자 바깥으로 물러나온다. 마치 현기증에 비틀거리는 한 여자의 마음속을 들여다보고 나온 것처럼.

이에 비해 <몬스터 주식회사>는 명료한 제목이 귀여운 애니메이션으로 살아난 경우다. <몬스터 주식회사>는 밤이 되면 벽장 속에서 괴물이 나온다는 옛날이야기에서 힌트를 얻었다. 그 때문에 이 영화의 오프닝 타이틀을 구성하는 요소는 문과 괴물 딱 두 가지뿐이다. 그러나 그 문과 괴물은 결코 단조롭지 않다. 전세계 모든 아기방의 문을 열고 들어가 비명소리를 빨아들이는 ‘몬스터 주식회사’는 몬스트로폴리스를 먹여살리는 거대 전력회사. 그 회사의 모든 문과 모든 괴물 직원이 출동한 것 같은 이 타이틀은 문들이 모여 글자를 뱉어내고, 몬스터들이 종횡무진하며 다시 글자를 집어삼키는 생기발랄한 애니메이션이다.

스탭 직업 따라가는 타이틀

LP판은 음악감독, 타자기는 시나리오 작가

<델리카트슨> 오프닝 타이틀은 그림엽서처럼 아늑하다. 거친 면포대와 손길에 닳아 희미하게 빛나는 나무탁자, 아직도 선명한 흑백사진은 오래 전에 버려진 어느 작은 방 안에 좋았던 시절을 향한 향수를 흩어놓는다. 그 소품들을 만날 때마다 잠시 멈추는 카메라도 조심스럽다. 그러나 그 세심한 행보는 고운 먼지 위에 바람을 일으킬까 마음쓰기 때문은 아니다. 소품 하나하나에 얹힌 글씨, 그들이 하는 일을 따라 주어진 스탭들의 이름을 읽기 위해서다. <델리카트슨>은 검은 잿가루가 앉은 책 위엔 시나리오 작가를, 나란히 인화된 두장의 흑백사진엔 편집을, 분홍색 스티치가 수놓인 천조각 위엔 의상을, 나무로 만든 자 위엔 프로덕션디자이너를, 구식 수동카메라 위엔 촬영감독을 올려놓았다. 함께 영화를 만든 수십명의 스탭들은 자기 이름이 먼저 나가길 바라겠지만, 이런 정성이라면 이름이 언제 나가느냐 하는 문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 것도 같다.

<애들이 줄었어요>는 <델리카트슨>의 배려를 고스란히 애니메이션으로 재현한 타이틀이다. 영화 내용처럼 조그맣게 줄어든 아이들은 집안과 정원에서 커다란 글자들 사이를 미끄러지는 모험을 겪는다. 쏜살같이 돌아가는 LP판은 음악, 거대한 타자기 자판이 찍어내는 글씨는 시나리오 작가, 연필과 도화지는 프로덕션디자이너를 위한 것이다. 결국 우체통까지 휩쓸려 들어간 두 아이가 아우성치는 편지봉투 바깥엔 감독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이 재미있다.

자료협찬 영화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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