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가기’ 누르면 후회할걸? 영화는 여기서 시작된다
새삼스럽게 묻자. 당신이 한편의 영화를 처음으로 ‘보는’ 것은 언제인가 개봉 광고 잡지 기사 극장 간판 틀렸다. 야박하게 말해서 그것들은 영화가 아니라 전시용 액자에 들어맞도록 가공하고 도려낸 복제물의 파편일 따름이다. 우리가 최초로 접하는 영화의 진짜 얼굴은, MGM의 사자가 으르렁거리고 이십세기폭스의 팡파르가 잦아든 다음 2∼3분 동안 영화와 제작진의 이름을 싣고 흐르는 ‘타이틀 시퀀스’ 즉 ‘오프닝 크레딧’이다.
우리가 게으른 자세로 비디오를 감상할 때면, 심드렁하게 ‘빨리 가기’ 버튼을 눌러 감아버리곤 하는 그 성가신 영화의 말머리는 미약하지만 중대한 프롤로그다. 오페라 전편의 테마 선율을 들릴락말락 품은 서곡이며, 관객이 장차 맞닥뜨릴 2시간의 허구가 어떤 것인지 예시하는 일종의 계약이자 경고이며, 영화관 바깥의 현실로부터 우리를 번쩍 들어올려 영화의 문턱까지 데려다놓는 엘리베이터다. 중세의 수술기구가 즐비한 살벌한 시퀀스로 <데드 링거>를 시작한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은 이 점을 들어 타이틀 시퀀스를 ‘라마즈 호흡법’에 빗대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리플리>의 앤서니 밍겔라 감독은 긴 타이틀 시퀀스를, 본 영화에 미처 담지 못한 이야기를 풀어놓는 마지막 기회로 이용했다.
아직도 많은 감독들이 모든 작업을 마친 뒤에야 타이틀 시퀀스에 주의가 미치기 일쑤고, 어떤 제작자들은 타이틀 시퀀스를 저렴하게 처리할수록 좋은 지출 항목으로 여기기도 하지만, 무성영화 시대에 대사 자막과 똑같이 손으로 글씨를 쓴 카드의 형태로 출발한 오프닝 타이틀은 영화역사와 더불어 진보해왔다. 1950, 60년대 타이틀 디자이너 솔 바스의 손에서 예술로 비약했던 오프닝 크레딧은, 소극적인 스타일로 후퇴한 1970, 80년대를 거쳐 1990년대 <쎄븐>의 카일 쿠퍼 등 걸출한 작가와 감독들의 협력으로 부흥했다. 그리고 올리비에 쿤첼과 플로랑스 데이가스가 디자인한 스필버그 신작 <캐치 미 이프 유 캔>의 오프닝 크레딧이 호평받으면서 다시 관심을 끌고 있다. 고다르는 영화에 시작과 중간, 끝이 있어야 하지만 반드시 그 순서대로일 필요는 없다고 했던가. 영화의 처음, 마지막, 또는 본체를 간결하게 농축한 3분 안팎의 촌철살인, 타이틀 시퀀스들을 유형별로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