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씨네21>이 틀렸다-미안해, 영화야 늦은 사과를 받아줘
2001-04-27
글 : 김혜리
우리가 오해한 9편의 영화, 그들에게 바치는 9통의 추신

아는 사람은 압니다. 영화 주간지의 일주일은 비교적 행복한 1/2과 비교적 불우한 1/2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수요일 밤은 <씨네21>의 일주일 중 불면과 한숨의 1/2이 문을 여는 순간입니다. 시작은 언제나 개봉작 리뷰 기사와 함께입니다. 관객과 상견례를 앞둔 영화를 한발 먼저 만나 품평하는 작업. 그것은 <씨네21>에 온갖 형식으로 담기는 영화 저널리즘의 기초이기도 하지만, 영화기자로서 갖는 기쁨과 곤혹의 뿌리이기도 합니다.

‘씨네시사실’ 기사를 위해 영화를 보고 쓰는 시간만큼은, 우리는 삶이 영화보다 몇배 중요하고 흥미롭다는 진리를 잠시 잊습니다. 시사회에서부터 딱한 안간힘은 시작됩니다. 아름다운 배우의 눈가에 맑은 물기가 번질 때, 감동적인 음악이 스크린에 출렁일 때, 정교하게 디자인된 시퀀스에 숨이 막힐 때에도, 영화의 타고난 본성인 미혹에 지지 않으려 자세를 추스르며 기억해야 할 대사와 프레임을 머릿속에 베껴냅니다. 그러나 뱃사람이라고해서 바다의 청한 아름다움에 눈멀지 않듯이, 글쓰기가 영화보기의 매혹을 앗아간다는 불평은 엄살일 것입니다. 일을 위해 두번, 세번 한 영화를 관람하는 체험은 예전에 미처 몰랐던 영화의 깊숙한 ‘품’을 열어 보여주기도 했으니까요. 도무지 의중을 알 수 없는 영화에 대해 써야 할 때도 종종 있습니다. 그럴 때면 느낌없는 상대와 억지로 데이트라도 하는 기분으로 그가 뭘 원하는지 어떤 사람인지 가늠하려 애쓰며 밤을 밝힙니다.

어떨 때는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하고 나서야 내가 영화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비로소 깨닫기도 하고, 새벽녘에 이르러 오해를 발견하기도 합니다. 영화를 구석구석 낱낱이 음미하고 감독의 세계를 샅샅이 탐색하고, 하나같이 비평적 영감과 열정으로 벼려진 평만 쓸 수 있다면 그야말로 ‘퍼펙트 월드’겠지요. 그러나 밤 9시 시사를 보고 편집실로 돌아와 이튿날 아침까지 데스크에 기사를 올려야 하는 ‘사건’은 드물지 않고, 간혹은 시사회가 열리기 전에 영화를 소개해야 하는 갑갑한 ‘사고’도 찾아옵니다. 하긴 핑계없는 밤샘도 없지 않습니다. 시간 관리가 허술한 탓도 있고, 카페인과 니코틴과 수면 부족에 ‘중독’된 일 습관도 치유하기 쉽지 않으니까요. <카이에 뒤 시네마>의 비평가 세르주 다네는 비평의 창조적인 오독, 즉 문화적 ‘한눈팔기’(promiscuity)가 가져올 수 있는 우연한 발견의 가능성을 설파한 적이 있지만, 개봉 스케줄에 몸을 얽고 살아야 하는 주간지 기자로서는 시샘만 나는 이상론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이렇게 씌어지는 영화평이 충족시켜야 할 기대도 하나가 아닙니다. 우선, 영화 리뷰의 역할이 한편의 영화가 7천원의 입장료에 값하는가를 가려주는 것이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명승지만 추려 소개하는 ‘관광 가이드’를 바라는 독자가 있는가 하면, 정자에 기대어 경치를 완상하고 먼 능선을 짚어주는 글을 고대하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영화의 바름과 그름, 정과 사를 논쟁적인 글로 가려야 한다는 생각도 있습니다. 그런데 영화란 핵폐기물 처리문제나 네오나치 문제와 달라서 찬성하고 반대하고, 죽이고 살릴 수 있는 대상이 못 되니 고민은 깊어집니다. 하이 컨셉 아래 조립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경우에는 관객이 어디를 어떻게 보아야 할지 더욱 잘 알고 있다는 생각에 허탈해지고, “영화라는 복잡한 종합예술을 구성하는 어느 한 가지 예술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이 멋대로 리뷰를 써대는 반지성주의가 횡행하고 있다”는 미셸 시망 같은 이들의 한탄을 접하는 날이면 또다른 자괴에 빠지기도 합니다.

비평은 저주받은 님프 에코와 비슷한 운명의 주인입니다. 아무리 별점이 은하수처럼 쏟아져도 차이밍량의 <구멍>처럼 좁고 깊은 영화에 구름 같은 관객을 동원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아무리 짓궂은 독설을 늘어놓아도 <인디펜던스 데이>로 몰려드는 관객의 발목을 잡을 수 없는 것도 매한가지입니다. 제법 호되고 차가운 단어를 늘어놓으며 힘센 척할 때라도 우리는 결국 영화를 만드는 이들을 뒤쫓는 메아리로서 영화의 게임에 참여하고 있음을 잊지 않습니다. 어차피 모든 영화는 아무리 허약하다 해도 어떤 악평보다 오래 살아남을 것입니다.

제 아무리 시대를 풍미한 비평가가 쓴 글이라 해도 시간이 흐르면 먼지앉은 도서관의 마이크로필름이나 누렇게 변색된 스크랩더미에서 찾아낼 수 있을 뿐입니다. 당장 당신이 읽고 계시는 이 기사를 위해 지난 리뷰를 뒤져내는 일조차 비디오숍에서 무명의 영화를 찾아내는 일보다 그다지 쉽지 않았습니다. 영화평을 쓰는 이들은 흔히 비난받듯 분수를 모르고 있거나, 지상의 우행에 교만한 번개를 내리꽂는 제우스 신의 흉내 따위를 내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영화평을 쓰는 우리의 대부분은 좌절한 창작자이거나 좌절한 관객입니다. 우리의 욕심은 오만하다면 오만하고 초라하다면 초라합니다. 영화에 관한 정보와 논의, 상상력의 유통에서 보완과 매개의 역할을 다하는 것, 그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책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저널리스트의 특권을 업고 남보다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영화텍스트와 창작자에 대한 것이겠지요. 영화를 정직하고 정확하게 전할 것. 그것이 생산된 상황과 예술가의 의도를 존중할 것. 그러나 무엇보다 최우선의 책임은 저널리즘의 생존 기반이기도 한 ‘독자’에 대한 것일 터입니다. 역시 정직할 것. 겁내거나 사사로이 편들지 말 것. 한 영화에 대한 감상을, 일반 관객보다 넉넉히 허락받은 특권과 시간과 투자를 빌려 영화를 더 많이 보고 많이 읽은 한 사람의 전문 관객으로서 모든 영화에서 뭔가를 얻어내고 그것을 가능한 한 생생히 전할 것.

쓰지 않는다고 해서 꼭 모르고 있지는 않습니다.가장 열심히 진심을 담아 만든 영화가 거짓말처럼 보일 수도 있음을 압니다. 좋은 영화를 만드는 것과 똑같은 노동과 공력이 ‘나쁜’ 영화를 만드는 데에도 들어갈 수 있음을 압니다. 순진한 생기로 맥박치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영화가, 시큰둥한 손길로 만들어진 지능 높은 영화보다 결국은 훌륭한 영화가 될 수 있음을 압니다. 눈을 홀리는 슬로건과 준재의 기교를 대문자로 가슴팍에 그려넣은영화를 알아보는 것보다, 남다르지 않은 행색 속에 작지만 자기가 잘 아는 이야기를 수줍게 감춘 영화를 발견하는 일이 더딤을 압니다.

그러나 <씨네21>은 때로 우둔하고 게을렀습니다. 흥분의 신열에 시야를 흐린 적도 있을 겁니다. 마감의 속도에 쫓겨 마주앉고 싶었던 영화를 무뚝뚝하게 떠나보내기도 했고, 뒤늦게 보석을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영화의 밀도와 미덕에 합당한 대접을 하지 못하는 비례(非禮)를 범하기도 했습니다. 그 많은 영화들에 사과의 마음을 담아서, 그 와중에 스러져 간 쓴 커피와 무수한 담배 개비에 바치는 애도를 덧붙여, 영화와 더불어 치고 받고 포옹하며 창간 뒤 300주일, 얼추 천일의 밤을 하얗게 새운 <씨네21>이 아홉통의 어설픈 추신을 여기 뒤늦게 부칩니다.

P.S: 문득 두려워집니다. 지금도 우리의 흐린 눈이 미처 찾아내지 못하는 영화들의 웅성대는 그림자가. 여기 띄우는 아홉편의 글에도 어쩔 수 없이 문신처럼 새겨져 있을 우리의 어리석음과 편견이.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의 오류는 활자로 남습니다. 그리고 영화의 일생은 그것이 스크린에서 걸어내려온 뒤에도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누군가는 이 편지들을 다시 고쳐쓰고 부치지 못한 편지를 우체통에 넣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런 식으로 우리는 느릿느릿 영화의 정체에 한없이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