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란다스의 개>는 개봉 당시 그리 평가가 나쁜 편은 아니었다. 흥행에서는 실패했지만 ‘새로운 감수성의 영화’라는 평이 일반적이었다. <씨네21>에서도 '웃기지만 아리송한 질문을 남기는 이상한 코미디'라고 평했다. 현실과 영화를 진지하고 성찰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에서 벗어나, ‘만화적 상상력’으로 인물과 사건을 재단하는 시선은 분명 한국영화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대단한가? 단지 다르게 바라본다는 것이? <플란다스의 개>는 자신이 서 있는 ‘지금 이곳’에 천착하는 구세대와는 달리, 지금 이곳을 이탈하려는 사람들의 욕망과 상상력에 기울어져 있다. 범인을 잡으려는 현남의 시선 혹은 상상력에서 요동치는 가공의 관중이 내지르는 환호성은, 새로운 세대의 이상향이다.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만은 주인공이, 스타가 되고 싶다는 욕망. <플란다스의 개>는 그 욕망이 이끄는 대로, 인물들을 몰고 간다. <플란다스의 개>는 방점이 찍힐 만한 ‘필요’가 있는 데뷔작이다. 요즘 한국영화계를 휘어잡는 감독들은 대부분 2번째, 3번째로 영화를 만든 중고신인들이다. <반칙왕>의 김지운은 데뷔작부터 화제였지만, <간첩 리철진>의 장진이 만들었던 <기막힌 사내>는 거의 시선을 모으지 못했다. 한국영화 흥행기록을 차례로 갈아치운 <공동경비구역 JSA>의 박찬욱과 <친구>의 곽경택 감독의 전작을 모두 기억하는 영화관객은 몇명이나 될까. <달은 해가 꾸는 꿈>과 <삼인조>, <억수탕>과 <닥터K>는 이미 잊혀진 이름이다. <파이란>의 송해성도, 데뷔작은 갈팡질팡하던 <카라>였다. 점점 한국영화의 데뷔작은 참담한 타협이거나 지독한 자기도취가 주류를 이루는 중이다. 자기만의 스텝을 가볍게 밟아나가다가 ‘피니시 블로’를 던지는 패기만만한 신인은 찾아보기 힘들 지경이 되었다.
그러나 <플란다스의 개>는 ‘다르다’. 교수가 되고 싶어하는 남자가 있다. 뭔가 세상에 뜻있는 일을 하고 싶어하는 소녀가 있다. 그들은 ‘개’를 매개로 만난다. 그 지점이 어딘가 묘하다. 윤주는 개가 짖는 소리가 싫어서, 졸지에 개납치범이 된다. 현남은 불쌍한 아이를 위해 개를 찾아주려 한다. 두 사람은 적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동지가 되고, 구원받는다. 그건 그들이 선하고, 순진하기 때문은 아니다. 그들의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들도 악한 것은 아니다. 아파트 경비원은 그저 한여름의 별미가 필요했고, 아파트 지하실에 숨어든 부랑자는 일용할 식량이 필요했을 뿐이다. 누구도 선하거나, 악하지 않다. 누구나 자신의 욕망이 이끄는 대로, 상황에 맞추어 자신을 굽히며 대처했을 뿐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비루한 삶을 살아간다. 그렇게 누구나 사람들은 태양 아래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즐겁게 살고 싶’을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꿈꾼다. 자신을 위장하고, 혹은 화장하고 서로를 즐거운 표정으로 맞이한다.
<플란다스의 개>는 그런 세태에 대한 신선한 고발이 아니라, 우정어린 대화다. 자신 역시 그렇게 살아간다는. “도회적이지만 따뜻하고 잔인해보이지만 소프트하고 현실적이지만 몽환적인 영화를 그리면서 일상의 재미를 좇아가려 했다”는 감독의 말처럼, <플란다스의 개>는 상반되는 요소들이 아무런 충돌없이, 아무런 갈등없이 공존한다. 윤주의 아내는 그를 비웃으면서도, 사랑받기를 원한다. 윤주는 아카데미의 속물성을 비판하면서도, 그 일원이 되고 싶어한다. 봉준호는 그 속물성과 이중성을 비웃으면서도, 포근하게 안아준다. 그건 요즘의 만화들에서 흔히 드러나는 모습이다. 일본만화만이 아니라 <키드갱>처럼 아이가 등장하는 한국만화에서도, 상반된 감정과 태도는 아무런 연결고리 없이 자연스럽게 나열된다. 그건 지금 막 세상을 만난 새로운 세대의 익숙한 리듬이고, 숨쉬는 방식이다. 바라보되 빠지지 않고, 파고들되 진지해지지 않는 것. 결정적인 순간에 숨을 고르고 한발 물러나는 것.
갈등없는 모순. 과연 그런 게 가능할까? <플란다스의 개>는 그렇다고 말한다. 그건 포기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긍정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현남은 산으로 올라가며 거울에 반사된 햇빛으로, 관객의 시선을 괴롭힌다. <플란다스의 개>가 영화 속에 반사된 남루하고 위선적인 현실을 직면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모습을 보는 관객을 기묘한 괴로움에 빠트리는 것처럼. 그건 체념인 동시에, 적극적인 대결이다. 이 위선적인 세상에서, 화장하지 않은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만큼 끔찍한 일이 또 어디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