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12월30일 개봉, 서극 감독
서극은 오우삼에 비해 지나치게 저평가되어 있다. 오우삼이 할리우드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지금처럼 심하지는 않았다. 해외에서는 오우삼을 훨씬
높게 평가했지만, <영웅본색>의 기획자였던 서극은 <동방불패>와 <황비홍> 등 홍콩영화의 흐름을 바꿔놓은 위대한
히트작을 꾸준하게 만들어냈다. 그는 프로듀서로서도, 감독으로서도 일류였다. 하지만 그게 문제다. 서극은 많은 영화를, 그것도 너무 다양한 장르와
스타일로 걸작에서 차마 입에 올리기 힘든 졸작까지 무차별적으로 만들었다. 한국에서 개봉한 영화만 10여편이 훨씬 넘는다. 단지 유행이 바뀌었기
때문에 새로운 장르로 옮겨가는 왕정 같은 감독과는 다르지만, 서극의 영화에서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의도’를 찾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서극의 영화를 특징짓는 하나는 ‘재현’이다. <촉산>에서 전통적인 중국 무협지의 휘황한 액션을 ‘재현’하려 했던 서극의 시도는 할리우드의
특수효과와 제대로 어울리지 못한 채 실패로 끝났다. 필생의 작품을 <서유기>로 꼽는 서극은 중국의 고대 설화와 소설을 영화라는 매체로
‘재현’하기를 꿈꿔왔다. 서극이 멜로와 코미디, 액션과 드라마 등 모든 길을 돌아다닌 것도, 혹시 수련과정이 아니었을까. <청사>처럼
단지 특수효과만을 위해 졸작을 만들기도 하면서.
<서극의 칼>이 구원받아야 할 이유는 그것이다. 팔 하나가 잘린 칼잡이, 그건 70년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외팔이 시리즈의 재현이다.
<서극의 칼>은 ‘복수를 둘러싼 인과의 고리’로 얽혀 있다. 모든 것을, 심지어 검객에게 반드시 필요한 팔까지 잃어버린 자의 처절한
복수. 식상한 듯하지만, 복수가 없는 무협지란 존재하지 않는다. 복수는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을 드러내는 무협지의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인과의
고리를 끊으려는 사람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와호장룡>을 지배하는 정서 역시 ‘복수’다. 복수가 없다면 무협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서극의 칼>은 90년대 이후 현란한 특수효과의 그림자에 묻혀버린, 단순한 ‘복수’를 이야기의 중심으로 끌어내고 있다. 무협지의
재현이 단지 ‘무’의 재현만이 아니라는 것을 서극은 뒤늦게 자각한 것이 아닐까. 모든 것에 초연한 듯한 인물이 등장하는 <동방불패>보다
<서극의 칼>은 날것 그대로의 무협지에 충실하다. 그 통속적인 복수의 순간에, 오히려 인생을 꿰뚫어보는 혜안이 존재한다. 그것은
서극의 시선이나 통찰력이 아니다. 그것은 중국의 ‘무협지’라는 장르 자체가 가지고 있는, 진리이자 힘이다. <서극의 칼>이 20세기
말에 뒤늦게 되살린, 중국 무협지의 순수한 재현이다.김봉석 기자▶ <씨네21>이
틀렸다
▶ <플란다스의
개>
▶ <미션
투 마스>
▶ <파란
대문>
▶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
▶ <그녀를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것>
▶ <서극의
칼>
▶ <블랙
잭>
▶ <벼랑
끝에 걸린 사나이>
▶ <무언의
목격자>
▶ 악평세례를
받은 걸작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