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씨네21>이 틀렸다 - <파란 대문>
2001-04-27
오물 더미, 가학의 진창에서 핀 연민의 꽃

98년

10월31일 개봉, 감독 김기덕

김기덕에 대한 오해는 유서깊다. 데뷔작 <악어>나 두 번째 영화 <야생동물 보호구역>에 대해 호의적인 반응을 보인

평자는 많지 않다. 그의 두 영화를 지지했던 나는 김기덕의 세 번째 영화가 불만스러웠다. <파란 대문>에 관해 “주인공들은 너무

일찍 화해하는 법을 배웠다. 우리가 아는, 죽음 앞에 자위할 수 있는 도발적인 김기덕을 다시 보고 싶다”고 썼다. <섬>이 개봉한

뒤 김기덕 감독을 만났을 때 그는 <파란 대문>에 대해 썼던 문장을 기억하며 낚싯바늘을 삼키거나 질에 넣는 가학과 충격의 영상이

“너무 일찍 화해하지 않은 증거”라고 말했다. <섬> <실제 상황> <수취인불명>에 이르는 김기덕 영화를

경험하고 <파란 대문>을 다시 봤다.

그의 말이 옳다. <파란 대문>이 보여준 화해의 제스처는 타협이 아니다. <악어>에서 <수취인불명>에 이르는

김기덕 영화 6편은 결국 하나의 영화다. 영화마다 완성도 차이가 조금씩 있지만 궁극적인 질문은 언제나 같다. 그건 “김기덕 영화의 스타일과

정서가 매력적인가?”라는 물음이다.

서정이 연기한 <섬>의 희진은 <파란 대문>에 이미 등장한 인물이다. 새장여인숙을 떠나는 방은진과 같은 장소를 찾아가는

이지은이 스쳐지나는 오프닝은 희진의 과거와 겹친다. 싸구려 여인숙을 전전하며 몸을 팔던 그녀는 <섬>에서 세상과 대화하길 거부하며

낚시꾼들의 성욕을 풀어주는 일로 먹고 살아간다. 그녀는 어쩌다 창녀가 됐을까? <악어>의 현정을 대입시켜보면 의문은 자연스레

풀린다. 애인에게 버림받고 투신자살을 기도했던 그녀는 세상에 대한 적개심과 증오로 일그러진 악어 같은 사내 용패에게 강간당한다. <수취인불명>에

이르면 그녀의 남자는 미군이었다. 결혼해서 미국으로 간다는 꿈에 부풀었던 그녀는 곱슬머리 검은 피부의 아들 하나를 키우며 미국으로 돌아간

남편에게 응답없는 편지를 계속 부친다. 아마 김기덕의 다음 영화 <나쁜 남자>에선 그녀의 또다른 과거를 보여줄 것이다. 그녀에게

진심어린 연민과 동정을 보이는 자는 없다. 친절을 베풀 때 사내들의 머리엔 그녀의 보드라운 알몸이 자리잡고, 폭력을 휘두를 때 세상은 그녀가

더럽고 추해서 맞아도 아프지 않을 거라 여긴다. 이래저래 벼랑까지 내몰린 여인들은 자기 몸을 훼손한다. 투신하거나 손목을 긋거나 낚싯바늘을

질에 넣는 것이다. 그러나 <파란 대문>에서 이지은이 연기한 진아는 <악어>의 현정이나 <섬>의 희진과

달리 죽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는 새장여인숙에서 행복한 아침을 맞으며 이를 닦는다. 가족으로 인정받은 듯 환한 미소가 한여름에

내린 눈만큼 신선하고 예쁘다. 과연 그녀는 새장여인숙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섬’을 발견한 것일까? 여기서 첫 장면을 상기하자.

새장여인숙을 떠나던 방은진은 이지은이다. 금붕이 한 마리를 들고 이곳을 벗어나는 방은진의 피곤에 찌든 표정, 거기엔 죽음보다 깊은 절망이

있다. 그녀를 구원하려는 감독의 소망이 눈내린 여름밤과 정겨운 아침풍경에 들어 있지만 현실의 냉혹함은 건재하다. 방은진도, 이지은도 결국

<섬>의 희진이 되고 만다.

내가 김기덕을 오해했다고 생각하는 지점은 사실 희망이냐 절망이냐는 문제는 아니다. 조재현이 연기한 <악어>의 용패와 <야생동물

보호구역>의 청해를 보며 쓰레기 같은 남자의 한가닥 남은 인간성에 감동받은 나는 김기덕식 캐릭터 묘사의 핵심이 그런 악질 사내가 내뿜는

야만스런 숨결에 있다고 봤다. <파란 대문>에서도 창녀 진아를 괴롭히는 개코는 분명 조재현에게 어울리는 인물이다. 하지만 <파란

대문>에서 김기덕 감독이 주목한 건 용패나 개코 같은 사내가 아니다. 그는 <악어>에서 무력하게 당하기만 했던 현정을 영화의

중심에 끌어와 그녀의 역사를 쓰기 시작했다. 그의 전작 두편을 통해 김기덕의 화법을 다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던 어리석은 내게 <파란

대문>이 쉽게 다가오지 못한 이유는 김기덕 영화의 그녀를 몰랐기 때문일 것이다. 김기덕 영화의 원형에 악어 같은 남자와 짝을 이루는

여인이 있다는 걸 깨달은 건 <섬>의 희진을 만나고나서다. 인류학자의 심정이 되어 탐구해볼 가학과 연민으로 얼룩진 한쌍의 연인,

김기덕 영화는 그들을 중심으로 파괴적이고 잔혹하지만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간다. 온전한 커플을 담지 않은 채 그는 때로 남자에게, 때론 여자에게

초점을 맞춘다. 동어반복? 그의 작품이 어느 하나만 지지할 수 있는 영화가 아니란 점에서 맞다. 덧붙이자면 나는 <파란 대문>뿐

아니라 김기덕의 모든 영화가 재평가되야 한다고 믿는다. 오해는 아직 충분히 불식되지 않았다.

남동철 기자▶ <씨네21>이

틀렸다

▶ <플란다스의

개>

▶ <미션

투 마스>

▶ <파란

대문>

▶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

▶ <그녀를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것>

▶ <서극의

칼>

▶ <블랙

잭>

▶ <벼랑

끝에 걸린 사나이>

▶ <무언의

목격자>

▶ 악평세례를

받은 걸작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