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미도>의 주인공은 어떤 인물인가. 설경구가 맡게 될 역할은 조직폭력배 행동대장 출신 이정진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그의 행적을 통해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가.
=이정진의 소원은 평양 가서 김일성의 목을 따는 거다. 아버지로 인해 연좌제에 걸리게 되고 살아남으려 하다보니까 살인을 저지르게 돼 사형선고를 받게 된 인물이다. 이제 그가 새 삶을 보장받을 수 있는 방법은 그것 하나뿐이다. 다른 실미도 부대원들 대부분이 그런 처지다. 기록상으로는 사형집행이 된 이들이니까 훈련받으면서 맞아 죽어도 어느 누구 하나 말하는 이가 없었다. 증언자의 표현대로 1회용 인생들이다. 방전되면 아웃인 거지. 영화는 작전이 취소된 이후에 자신들이 사살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들의 분노를 담아낼 것이다.
-<공공의 적>에 이어 <실미도>에 설경구를 캐스팅했다.설경구라는 배우에 대해 강한 신뢰가 있나.
=자기가 지난번 촬영 때 앞으로 내가 감독하는 영화에 주연하고 싶다고 한 거다. 워낙 여우 같은 놈이라 나도 좋다고 한 거고. 제일 믿음이 가는 점은 콘티 보고 다 만들어 온다는 거다. 감독 입장에서 너무 편하다. 지난해 첫 촬영때 콘티 지문대로 과연 느물느물한 연기를 해줄까 싶었는데 옷도 꼭 그렇게 입고 와서는 해냈다. 보물이다. 비리가 드러나자 자살한 사람을 앞에 두고 ‘안 일어나 개새끼야’ 그러는데 첫날부터 감동했다. 리허설할 때는 과연 나올까 싶었는데 역시나….
-강우석 감독은 빨리 찍고 제작비도 많이 안 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번 영화에선 규모에 욕심을 내는 것 같은데 연출자로서 스케일이나 액션이 큰 영화를 만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나.
=이번 영화는 감정으로 승부 보는 거다. 스펙터클이나 액션에 초점을 맞춘 게 아니다. 배우의 호흡이 가장 중요한 영화다. 돈 들였구나 하는 생각은 장면마다 들겠지만 화려한 액션이 나오는 대작의 통쾌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보다 극중에서 정진이 평양에 보내달라고 절규하는 장면이 관객을 설득할 수 있을지가 주요 관건이다.
-강우석 감독이 연출하는 비극은 어떤 것일지 궁금하다. 강 감독이 생각하는 훌륭한 비극의 조건은 뭔가.
=관객이 누구 한 사람도 예외없이 비극의 당사자들의 입장으로 가줘야지. <편지> 보면서 울었던 사람들이 당사자들 입장에서 울어준 거다. 대신 찝찝하면 안된다. 여운으로 남는 것은 좋은데, 보는 내내 괴롭다면 그건 상업영화로서 100% 실패한 거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도 90% 웃기다가 마지막 10%만 울린다. 이번엔 웃기는 것도 없으니 긴장감과 감동이 조금씩 쌓이다가 마지막에 폭발하는 식으로 가야겠지.
-콜럼비아영화사와는 어떤 조건으로 계약하고 연출하는건가. 전액투자가 아니라 절반씩 투자하는 조건에 합의한 것인가. 제작비 규모는 얼마인가.
=안 그래도 곧 최종 예산을 뽑아서 올려줘야 된다. 애초 콜럼비아쪽에서 100% 투자하고 우리쪽에 국내 배급권만 주겠다고 해왔는데. 해외배급이니 판권이니 다 가져가겠다는 그쪽 생각을 받아들이면 우리가 먹을 게 너무 없지 않나. 그래서 30%라도 투자를 들어가자는 의견을 건넸던 것이고, 콜럼비아 본사에서 이를 수용할지는 모르겠다.
-<공공의 적>으로 관객과 평단의 고른 찬사를 받았다. 그때는 완성도로 인정받겠다는 목표를 내걸었는데, 이번 <실미도>로 듣고 싶은 이야기가 뭔가.
=저 놈 정체가 도대체 뭔가. 그런 느낌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 좀 건방지게 말하면 손 못 대는 장르가 없구나 하는 그런 칭찬을 들었으면 하는 건데. 될까. (웃음) 지금 현재로선 한톤으로 쭉 밀고 가는 영화가 나왔으면 좋겠다. 찍어놓고서 나중에 다 걷어내서 튀는 영화말고. 그래서 스탭들한테 이번에는 찍은 장면 모두 넣는다고 공언했다. 총 러닝타임이 2시간 반 나와도 안 자른다고 했다. 일부러 현장 가서 콘티 작업하는 것도 그래서다. 아직 콘티는 3분의 1밖에 못한 상황이고, 시나리오 수정도 계속해야겠지만, 콘티가 나온 장면은 촬영까지 다 끝났다고 본다.
실미도, 사건과 실화인간병기들의 참혹한 절규
68년 1월, 북한 특수부대인 제124군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남한에 잠입한 사건이 있었다. 흔히 1·21사태라 불리는 이 사건은 청와대로 향해 가던 31명 가운데 김신조 1명만 생포되고 28명은 사살, 2명은 도주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당시 체포된 김신조는 침투목적에 대해 “박정희, 목따러 왔수다”라고 말해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이 사건에 자극받아 창설된 것이 실미도 특수부대. 김일성을 죽이러 북한에 침투한다는 목적을 갖고 탄생한 이 부대는 사형수, 무기수 등 주민등록을 말소시킨 사람들로 구성됐다. 그들을 인간 흉기로 개조하는 프로젝트를 주도한 인물은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으로 알려졌다. 실미도 특수부대는 임무수행의 날을 기다리며 가혹한 훈련을 계속했지만 여러 가지 정치적 이유로 작전은 취소된다. 아직 정확한 진상이 밝혀지지 않았지만 3년을 그렇게 살인적 훈련만 계속하던 부대원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은 그들의 존재가 불필요해졌음을 알면서다. 부대의 존재 자체를 말살시키기 위해 그들 모두를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깨닫자 부대원들은 탈출을 시도한다. 1971년 8월23일 실미도를 탈출한 23명의 부대원들은 인천 송도에서 버스를 탈취, 서울 진입을 시도했고 서울 대방동에서 긴급출동한 군인, 경찰과 교전을 벌인다. 그들이 최후에 선택한 방법은 자폭. 버스 안에서 수류탄을 터트린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살아남은 4명은 군사재판을 거쳐 총살됐다. 당시 정부는 이 사건을 ‘북한 무장공비 침투사건’으로 발표했고 그 진상이 조금이나마 드러나는 데는 20년이 넘게 걸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