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살인의 추억>의 감독 · 비판자 · 지지자가 가진 3角 대담 [5]
2003-05-02
정리 : 박혜명
정리 : 김소희 (전 씨네21 편집장)

김소희 | 개인적인 궁금증인데, 감독이 고전적인 드라마나 소설에 대한 애호가 있는가. 혹은 기독교적인 배경을 가졌는가.

봉준호 | 어렸을 때 성당에 열심히 다녔지만 지금은 아니다. 문학작품은 대학 때 많이 봤지만 심취하진 않았다. 대신 70년대 미국영화를 좋아한다. 고전적인 호흡과 정공법으로 승부하는 드라마들. 존 프랑켄하이머, 윌리엄 프리드킨, <E.T.> 까지의 스티븐 스필버그, 그리고 코폴라의 영화들에 대한 애호가 있다. 이 영화도, 정공법이라고 하긴 거칠지만, 크게 봤을 때 강한 드라마와 캐릭터가 있고 하나의 감정을 향해 밀어붙인다는 점에서 그 부류의 영화들과 비슷할 수 있다.

김소희 | 어떤 특별한 영화를 참조했거나 반대로 의식적으로 차별화하려고 했던 레퍼런스는 없었나.

봉준호 | 특별한 건 없다. 다만 <파고>와 비교할 수 있겠다. 그 영화는 미국 노스다코타주에 있는 파고라는 지역의 특성을 잘 살리고 있지만, <살인의 추억>은 화성이라는 지역의 풍토를 살리는 쪽은 아니다. <파고>의 그 눈밭이나 <샤이닝>의 호텔은 공간이 뿜어내는 아우라가 장난이 아니다. <파고>와 비슷하다면, 실제 사건이라는 점과 인물들의 생생한 캐릭터가 영화를 이끌어간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하지만 그 영화는 쿨한 반면 우리 영화는 다혈질적이고 감정적이다. <파고>는 강한 아이러니와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빠진 인물들에 대한 냉철한 시선이 강하다. 반면 내 영화는 관객이나 감독이나 다 형사들의 시점에 서버리니까 죄다 감정적이 되고 그 감정은 나중에 폭발한다.

김소희 | <쎄븐>은?

봉준호 | 악에 패배하고 압도당한다는 점에서 비슷할 수도 있겠다.

남동철 | <인썸니아>와도 비슷할 수 있지 않나.

봉준호 | 매듭짓는 방식 같은 게 그럴 수도 있다.

Q6. 왜 박현규는 ‘어둠속으로’ 묻혀가는가?

남동철 | <살인의 추억>엔 필름누아르적인 요소가 있다. 특히 마무리 지점에서 질문이 돌아온다는, 잠시 잊고 있었던 깊은 수렁 속에 다시 돌아온다는 점이 그렇다.

봉준호 | 잊고 있었는데, 누아르영화 하니까 생각난다. 요전에 서울아트시네마에서 필름누아르영화제를 했었는데 그때 본 아브라함 폴론스키의 <악의 힘>이 정말 그런 영화였다. 악의 힘에 대한 명쾌한 해답이 있는 게 아니라 질문을 남기는.

김소희 | 그게 바로 내가 예상했던 바다. <살인의 추억>에서 나에게 가장 강력하게 남는 것은, 인간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절대악의 문제였다. 그래서 악마와 싸우는 인간, 존재와 심연, 동굴, 이런 단어를 연상했다. 영화의 미장센도 좁은 배수구에서 시작해서 거기에서 끝나고, 용의자는 악마처럼 꼬리를 보일 듯 말 듯하고, 심지어 보리밭의 이미지조차 심연의 이미지와 맞닿는다.

봉준호 | 영화의 잔요소들을 모두 빼고 나면 그것만 남을 수도 있겠다. 시나리오에 없던 마지막 기찻길 장면이 사실 오프닝의 배수구신을 확장한다는 의미였다. 작은 터널과 큰 터널. 그 장면을 떠올리면서 박현규의 퇴장과 관련한 클라이맥스의 실마리까지도 풀렸다. 그가 어둠 속으로 묻혀간다는 이미지가 마음에 들었다.

김소희 | 기차조차도 그런 운명의 터널에서 튀어나온 악마적인 힘처럼 보였다. 사실 이 영화의 형사들은 제각각 어딘가 부족한 인간의 모습을 지닌 채, 그들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해결될 수 없는 운명, 절대악의 세계와 싸우는 고전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다. 이 영화의 중요한 이미지들이 결국 그런 일관성 아래 조율되고 있는 것 같다. 해석의 과잉일 수도 있지만. (웃음)

봉준호 | 기차가 서류를 찢는 그 장면은, 모든 것이 우리의 의지를 떠났다는 느낌이 들어 좋았고 또 그런 이미지가 필요했었다. 빛과 어둠의 경계선에 우두커니 선 형사들과 어둠에 묻혀 사라지는 박현규의 이미지를 통해, 얘기한 대로 그런 느낌을 주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근데 여자 관객은 해일이 수갑을 안 풀어줬다고 뭐라 하대. (모두 웃음)

김소희 | 이건 질문보다 나의 느낌인데, 이 영화는 어떤 모순되고 복잡한 멘털리티에 대한 모자이크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 멘털리티의 정체는 우리 사회일 수도 있고 감독의 정신세계일 수도 있다.

봉준호 | 그건 좋은 해석이고 나도 일정 부분 의도한 바다.

남동철 | 내 생각으로는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하게 남는 건 장르영화적인 요소다. 전형적인 필름누아르의 세계. 하지만 지금 이 영화가 좋은 건, 그런 부분을 깔고는 있지만 시대의 아주 특정한 부분에 대해 공격하고 있고 그것이 우리에게 되돌아 오게 만드는 힘이 있다는 거다. 또 그 힘이 여러 가지 장르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장르영화라고 부르기에도 묘하고. 누가 그러더라. 게임의 법칙에 의해 굴러가는 영화들과 작가 세계에 의해 굴러가는 영화들이 있다면 이 영화는 묘하게도 그 접점에 있는 것 같다고.

봉준호 | 이 시나리오를 예전에 임상수 감독에게 보여드렸을 때 “우리가 이런 꼬라지로 살았었구나, 우리 삶이 그때 이랬구나. 그리 옛날도 아닌데, 참 슬프다” 그러시더라. 제일 좋았고 기쁜 반응이었다. 이 영화에서 최종적으로 전달하고 싶었던 거 아닌가. 화성살인사건과 그것에 얽힌 여러 가지 모습들, 추억이자 악몽인 씁쓸한 기억. 근데 그분, 이 영화는 봤나? (모두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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