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과 감독, 죄다 감정적이 된다 그리고 폭발한다"
<살인의 추억>이 드디어 뚜껑을 열었다. 만들어지기 전부터 시나리오 좋다는 소문이 자자했고, 만들어지고 난 다음에는 평론가와 배급 관계자, 시사회 관객에 이르기까지 두루 호평을 받고 있는 영화. <살인의 추억>은 이른바 작품성과 흥행력을 두루 갖춘 귀물이 될 것인가? <씨네21>의 두 기자가 개봉을 앞두고 있는 봉준호 감독을 만났다. 서로 다른 각도로 접근해 들어가는 인터뷰어들에게 감독은 조심성과 유머, 소신을 유연하게 결합하면서 응수했다. 세개의 목소리가 해명하는 <살인의 추억> 이야기를 여기 펼쳐놓는다.
Q1. 왜 살인의 ‘추억’인가?
남동철 | <살인의 추억>의 원작이 되는 연극 <날 보러와요>는 영화화하려던 감독이 많았다고 들었다.
봉준호 | 나도 몇몇 감독님들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들었다. 그 연극을 <모텔 선인장> 조감독 시절에 봤는데 그땐 내가 어떻게 해보겠단 생각은 꿈도 못 꿨고 가슴에만 묻어두고 있었다. 연극과 영화의 가장 큰 차이는, 원작과 달리 이 영화가 시대에 대한 코멘터리로 갈라선다는 점이다.
남동철 | 그게 영화 제목이 <살인의 추억>으로 바뀐 이유인가. 아이가 메뚜기를 잡는 첫 장면이나 과거를 떠올리는 마지막 장면도 그렇고, 감독이 말한 ‘시대를 포착하겠다’는 의도가 ‘살인의 추억’이라는 제목과 결부된 게 아닌가 생각했다.
봉준호 | 그렇다. 추억이라는 게 시간적인 개념 아닌가. 2003년에 그 시대를 돌아본다는 거. 에필로그는 시나리오 쓸 때부터 생각했던 거다.
김소희 | 시대를 드러내겠다는 의지와 한 시대를 추억으로 감싼다는 것이 어울릴 수 있을까.
봉준호 | 그게 바로 제목이 ‘살인의 추억’이 된 이유다. 멀쩡하게 살아가던 박두만이 어느 순간 문득 과거로부터 날아온 화살을 맞는 거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을 박두만이 똑바로 쳐다보는 컷에서 마무리지었다. 송강호씨가 “정말 똑바로 봐도 돼요?” 하고 묻고, 촬영감독도 “조끔만 옆을 보면 안 될까?” 하더라. (웃음) 난 정면으로 찍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결코 추억이 될 수 없다는 느낌으로 마침표를 찍고 싶었다.
김소희 | 연쇄살인이라는 소재로부터 시대를 코멘트하겠다는 의도를 갖게 된 계기가 있다면.
봉준호 | 그 과정은 자연스러웠다. 처음 이 소재를 영화로 만들겠다고 덤빌 때는 그 시대에 포커스를 맞추겠다는 의도가 없었는데,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첫 6개월간 자료조사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사건이 실렸던 신문을 찾아 한면 전체를 복사해서 보면 항상 한쪽에 화성살인사건 소식이 있고 다른 한쪽엔 ‘아시안게임 드디어 개막!’이나 ‘문귀동 고문사건’처럼 당시에 벌어진 다른 소식들이 같이 있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그 사건을 시대적인 맥락 속에서 읽게 되더라. 이렇게 사건을 접하는 과정에 개인적인 경험도 흡수됐다. 그 시대에 대한 나의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기억들 말이다. 사건이 일어났던 그때 난 난생처음 미팅이란 걸 하고 있었구나, 하는 식으로. 결정적인 계기는, <플란다스의 개> 때문에 런던에 갔을 때다. 잭 더 리퍼라고, 1890년대 영국에 실존했던 연쇄살인범 있잖은가. 런던의 대형 서점에 갔더니 한 코너가 아예 그 사건에 대한 보고서, 논문, 소설, 만화 등으로 꽉 차 있더라. 영구 미제 사건이 그런 상상력과 해결 욕구를 불러일으킨 거다. 그중 <프롬 헬>이라는 만화를 보게 됐는데 전화번호부처럼 두꺼운 그 책을 덮고 나서 가장 강렬하게 든 느낌은, 런던 사람들이 그때 이렇게 살았구나, 하는 거였다. 그런데 <살인의 추억> 자료조사를 하면서 유사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자문했다. 왜 범인을 못 잡았을까. 영화를 만들려면 그에 대한 내 대답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담당형사가 무능해서? 범인이 엄청 천재적이고 카리스마적이어서? 미국 장르영화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그런 건 아닌 것 같았다. 1980년대라는 시대 자체가 가진 무능함과 조악함이 있었던 거고 그 때문에 그 시대를 조금, 많이도 아니고 아주 조금 앞서갔을 뿐인 연쇄살인범에 대응할 수 없었던 거라고 결론지었다. 그런 관점에서 시대를 파고들었는데 화성사건과도 따로 놀지 않더라. 영화 속에서 보여진 에피소드들, 전경이 전부 다 시위에 동원돼서 화성엔 병력 지원도 안 되고, 동네 초소엔 경비도 하나 없고, 보다 못한 동네 사람들이 자위대 조직해서 순찰 돌고, 이런 해프닝들이 다 실제 있었던 일들이다. 무능하고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형사들의 수사 행태는 시대의 열악함과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결국 범인을 잡지 못한 채 패배한다는 결말을 위해서도 시대상은 끌어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