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영화 <선택>의 선택 [4] - 배우 김중기 ②
2003-10-17
글 : 이성욱 (<팝툰> 편집장)
사진 : 정진환

-<선택>은 가해자와 피해자를 이분법적으로 나누지 않는 구도다. 인상적인 건 ‘청소’ 마크를 단 소지들이 교도관을 대신해 장기수들에게 폭력을 일상적으로 가하는 장면이다. 물론 그들도 피해자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말이다.

=내가 감옥에 있을 때 본 소지들도 그랬다. 저쪽에 붙어 혜택도 많이 받고. 가해자 오태식도 결국은 체제 대립의 희생양이다. 7·4 남북공동성명 이후 장기수들은 북에서도 ‘잊혀진 존재’가 됐다.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으나, 장기수 분들도 저쪽 체제의 피해자다.

-<선택>에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장면은.

=(환갑을 맞아 동료들이 넣어준 부식 중에서) 나직이 사과를 베어먹는 장면, “야, 첫눈 온다”라는 소릴 듣고 창 밖을 내다보는 장면, 출소하는 날 핸드헬드로 방 안을 휘둘러보다가 내레이션 들어가는 장면. 눈오는 장면에선 다른 죄수들과 동화돼 감옥생활을 편하게 자기 운명으로 받아들인 듯한 느낌이어서 그랬고, 나갈 때 장면은, 음∼, 왜 좋을까?

-세 장면 모두 약간 관조적이고 감성적으로 다가오는 공통점이 있는 것 같다. 감정을 자극하는 게 아니라. 그렇네. 이 장면들도 그렇고 뒤로 갈수록, 나이가 들수록 연기의 느낌이 아주 좋다.

=그런 말 많이 듣는다. 악역의 캐릭터는 종국에 죽음을 맞이할지라도 상황을 주도하는 게 있다. 이런 캐릭터는 밖으로 내보내는 연기를 하게 되는데 그게 매력이다. <선택>에선 악역은 아니지만 인물에서 빠져나오려 했고 뒤로 가면서 자연스레 된 것 같다.

-<선택>은 리얼리즘영화인 동시에 휴머니즘영화이지만, 고통스런 통과의례들이 알게 모르게 깔려 있어서 그런지 성장영화 같은 느낌이 있다. 인간 김중기의 통과의례는 어떤 게 있었는지.

=나도 성장영화 같은 느낌을 갖고 있다. 이 영화를 선택했을 때의 느낌은 아무리 빠져나가려 해도 벗어날 수 없는 운명 같은 게 있다는 걸 받아들이자는 거였다. 나를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까지를 포함해서 말이다. 99년 초 <북경반점> 개봉하고 인터뷰가 막 들어오면서 말하자면 좀 뜨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영화가 두편 들어왔는데, 한편 엎어지고 한편은 미뤄졌다. 그러면서 어영부영 1년이 흘러갔고, 아내가 과외하면서 생활을 유지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을 고생시키면서 이래야 하나 하는 생각과 함께 한없이 초라해지는 느낌이 들 때였다. 마침 아내가 공부를 마치기 위해 유학을 가겠다고 해서 생활을 책임져야 했고 그래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1년 반 정도 지났을까, 건강이 아주 나빠져 병원에 갔더니 위염이 아주 심해 암이 될지도 모른다고 하더라. 그때 제안받고 연기를 다시 시작한 게 <선택>이다.

-아까부터 뭔가 재밌는 일화들을 들려줄 듯한데 안 해준다. 예컨대 연애도 삶의 굴곡을 만들어주지 않나.

=고등학교 때부터 연애를 했다. 4번째인가 5번째인가 연애 끝에 결혼한 건데, 고등학교 때 좀 놀았다. 안동이 고향인데 고고장을 즐겨 찾았다.

-지식인을 바라보는 시선의 문제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노동자 출신의 김선명 주변에 여러 지식인 장기수들이 있고, 격렬한 논쟁을 벌이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와 같은 입장이다. 지식인 일반에 대해선 부정적이지만 개별적으로 들어가보면 좀 다르다. 80년대에도 그런 느낌이 많지만, 지식인 출신 중에 가장 먼저 전향한 분이 있지만, 끝까지 흔들리지 않는 분도 지식인이다. 출신 자체가 지식인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80년대에 세미나를 하면서 사회과학을 공부했듯, 상대적으로 여러 가지 공부를 많이 한 분들이다. 지금도 일상 대화가 아니라 어떤 주제를 가지고 얘기하면 굉장히 논리적으로 말씀들을 한다.

-80년대 동료들이 정치쪽에서 많이 활동할 텐데.

=개인적으로 그들을 믿고 가끔 만나기도 한다. 거기서 잘하면 되지만 그 친구들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영역이 우리 사회에서 너무 큰 것 같다. 한국사회 발전을 위해 정치영역은 줄어야 맞다. 개인적으로 정치를 안 좋아한다. 아주 똑똑한 친구들도 그 안에 들어가면 무뎌지는 것 같고 자기 처신하기가 힘든 것 같다.

-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것 하나가 세상을 바꾸는 건 없다. 아니, 세상을 바꾸는 것이 없다고 믿는 쪽이 아닐까 싶다. 다만 세상이 좋아지는 데 조금이나마 일조하길 바랄 뿐이다. 내가 영화를 보고 행복감을 느꼈듯 그런 영화를 한다면 개인적으로 영광이다.

-사람은 바뀌나.

=나는 많이 달라진 것 같다. 사람 만나면 별로 말이 없었는데 말이 많아졌고, 욕도 잘하고. 옛날보다 거침이 없어졌다고 할까, 순간순간 솔직해졌다고 할까.

-그런 변화로 예전보다 살기가 편해졌나.

=그렇다. 옛날보다. 남한테 싫은 소리 못했는데 조금씩 한다.

-어떤 인터뷰에서 “90년대는 생활을 발견하고 사랑에 접속하는 시대, 80년대의 편향됐던 감성이 해방되는 시대”였다고 했다. 2000년대는 어떤 시대인 것 같나.

=잘 모르겠다. 솔직히. 옛날 기준으로 보면 한국사회가 좋아진 것 같은데. 송두율 교수 문제는 이 사회가 궁극적으로 변하는 마지막 관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남남 갈등이라는 게 남북 사이의 문제로 생기는 건데, 분단 극복이 단순히 통일돼야 한다는 건 아니고. <한겨레> 문화면도 그런 걸 많이 조장한 것 같다. 네 멋대로 살아라, 네 감성을 터뜨려라 같은 식. 필요한 과정이었으나 그것도 일종의 편향이었던 같다. 문화적으로 2000년대가 어떤지는 좀더 지나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적과 아군을 구분하는 ‘피아(彼我)의 구분’은 사라진 건가.

=사라졌다? 궁극적으로 피아의 구분은 없다고 본다. 어떤 개인이나 집단에선 사라지지 않고 있지만 개인적으론 그게 싫다. 수단으로 피아를 구분하는 것도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과정이나 작은 동기가 순수하지 않으면 결과는 당연히 더 엉뚱한 데로 가지 않나. 결국은 사람의 문제다. 사소한 일상에서 챙겨지지 않으면 소용없다. 진보적인 사회단체에 들어가 얼마든지 사리사욕을 채우며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 있지 않은가. 요즘은 조직되지 못한 약자가 너무 많다. 민주노총 산하의 대기업 노조가 비정규 노동자의 문제를 얼마나 고민하는지 의문이다. 조직된 다수가 진보적 색깔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최근 한국사회에선 조직화되지 않으면 살아나기가 갈수록 힘들어진다. 80년대 세대가 너무 빨리 정치화됐다. 정치권에 들어간 걸 말하는 게 아니라 회사생활을 해도 정치적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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