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는 없겠지만
좋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
<선택>의 김선명은 홍기선 감독의 명백한 페르소나이지만 배우 김중기의 초상이기도 하다. ‘통일’이란 단어에 온 신경을 날카롭게 세우는 김선명의 모습은 1988년 판문점으로 북쪽 학생 대표를 만나러 가겠다며 날을 세웠던 김중기의 눈빛과 겹쳐진다. 그때 그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배우 김중기가 한때 서울대 총학생회 조국통일추진위원장으로 격렬히 투쟁했다는 이력은 아득히 먼 과거가 돼버렸다. <선택>의 놀라움은 에둘러가지 않는 방식으로 그 아득함과 대결해 지금도 유효한 살아 있는 그 무엇으로 전해준다는 점이다. <선택>은 배우 김중기가 어떻게 지금에 이르렀는지 새삼 궁금하게 만든다. 노년의 김선명이 0.75평 안의 감옥에서 무언가 득도한 듯 초연한 태도로 삶을 다스리는 모습이 자꾸 인간 김중기의 실제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너무 반성한 것 같기도 하고 아예 반성을 못한 것 같기도 하다”는 말을 되풀이하는 그에게 자꾸 영화 바깥에서 뭔가를 캐묻게 된 건 그래서였다.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 <둘 하나 섹스> <연풍연가> <북경반점> <정글쥬스> <일단 뛰어>를 지나 <선택>과 <해피 에로 크리스마스>에 이른 그의 필모그래피가 보여주듯 이종의 길을 걸어온 그의 속내가 그제야 수긍이 갔다. 다부지게 단단한 그의 몸과 달리 내면은 ‘고무공’처럼 유연했다.
-유신정권이 잔혹한 전향공작을 펴면서 “그깟 종이쪽지 한장”이란 말을 되풀이한다. “죽으면 다 소용없는 것 아니냐”는 말과 함께 김선명 선생을 설득하지만, 그는 ‘전향서’라는 종이 한장을 끝내 거부하며 45년을 감옥에서 보낸다. 제3자가 보기에 정말 “그깟 종이쪽지 한장이 뭐기에”라는 심정이 들 수도 있다. 관객이 그의 선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가 갇힌 이유는 1차적으로 사상의 문제 혹은 체제의 대립에서 시작된 건데…. 미묘한 질문이다. 그분이 실제로 어떠했는지 잘 모르니. 자기의 존재근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분이 전향서를 쓰고 나왔다면 과연 행복했을까? 숨은 쉬고 있지만 살아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속이 없는 텅 빈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다면 김중기의 존재근거는 뭘까.
=나는 반성에 근거해서 나를 찾으려고 했다. 좀더 넓고 깊은 시야를 갖고 싶어서. 사람이나 세상을 너무 부분적으로 봤다고 반성했고, 그러다가 문득 선택한 게 연기다. 내 인생을 풍부하게 하고 싶어서. 연기란 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내 안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오는 건데 다양한 역할을 하려면 내 자신이 감성이든 이성이든 풍부해져야 한다. 그 어떤 것도 내게 살아 있다는 느낌을 주지 못할 만큼 가장 힘들 때, 어쩌다 영화를 봤다. 근데 영화가 살아 있다는 느낌을 줬다. 왜, 젊었을 때 가슴이 싸악 뒤집어지면서 온몸에 감동으로 물결치는 순간이 있지 않나.
-풍부한 인생이라는 목표가 얼마나 이뤄졌나.
=아직까지는 좌충우돌이다. 최근 고민은 캐릭터가 뭔지 모르겠다는 거다. 일상에서 나란 인간이 뭔지도 잘 모르겠고. 얼마 전에 광고회사 다니는 한 친구가 ‘배우로서 너의 캐릭터가 뭔지 모르겠다’고 하더라. 난 인간 김중기의 캐릭터가 뭔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날 술 무척 많이 먹었다. 독립영화하다가 전혀 그렇지 않은 영화도 하는데 내 캐릭터가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내 안 깊은 곳에서는 내 인생을 축소시키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다. 그래서 주류영화에서도 평가받고 싶다는 생각이 있고, 기존 이미지와 다른 역할이 오면 자유로운 느낌이 든다. 일종의 해방감이랄까.
-원래 연기와 전혀 상관없는 길을 가다가 배우로 접어든 경우인데, 언제 어떻게 자기만의 연기론을 찾았는지.
=연극원 시절에 선생님들이 항상 “입에 욕을 달고 다녀라”고 했다. 난 남한테 욕 듣기도 싫어했고, 욕도 못했다. 무엇보다 내가 욕을 하면 욕 같지가 않았다. 80년대가 워낙 사회과학이라고 하는 이성의 시대였고, 그 안에 갇혀 있어서 그랬는지 연극원에서 “누르면 쏙 들어갔다가 다시 튀어오르는 고무공 같은 사람, 1차원적 인간이 되어라”라는 말을 끊임없이 들었다. 그 말을 명심하면서 연기에 대한 느낌을 갖기 시작했다. 연기에 대한 감은 최근 3년 동안 직장생활(온라인 영화잡지 편집장과 프로듀서)을 하고 나서 갖게 됐다. 그 전까지는 늘 배우는 입장이어서 그랬는지 당당히 발을 디딘 자기 중심의 사람이 아닌 듯했는데 사회생활을 하면서 내 중심이 조금 생긴 듯했다. 이런 중심을 가지고 뭔가 표현하는 게 연기가 아닐까 하는. 뛰어난 연기를 하려면 혼탁하고, 사회적으로 도덕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뭔가가 내 안에 있고, 그것을 통제하는 내가 또 존재하는 다양함이 있어야 하는 것 같다. 어떤 상황에서도 나오는 상상력은 그래야 가능할 것 같다. 예전에 갖고 있던 판단의 준거틀 사이사이에 다른 욕망이 있다는 걸 많이 느꼈다.
-그런 욕망이랄까, 일탈이랄까 하는 것들을 실행에 옮겨보긴 했나.
=그렇다. 학생운동 때문이었는지 예전부터 그랬는지 잘 모르겠으나 연기를 시작한 이후로 내 안의 욕망대로 해보는 게 거부감이 없고 거기서 더 많은 걸 얻은 듯하다.
-김중기만의 연기론을 찾게 된 또 다른 계기는.
=연극원 졸업작품으로 셰익스피어의 2∼3개 작품을 합친 공연을 했다. 악역인 리처드 3세를 했는데 복잡한 캐릭터였다. 인간적이기도 하고 변태적이기도 하고. 성적으로 변태적인 건 아니고. 그 역할을 하는데 너무 기뻤다. 내 안에 그런 게 있었나 싶기도 하고, 그동안 틀에 갇혀 살았구나 싶은 느낌도 들고. 나에게서 보지 못했던 눈빛이랄까, 내 내면에서 치밀고 올라오는 것들을 강하게 느꼈다.
-그 느낌과 <선택>의 김선명을 연기할 때를 비교해보면 어떤가.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나 <둘 하나 섹스>의 인물이 <선택>의 김선명과 같은 범주일 텐데, 이런 시나리오를 보면 캐릭터에 팍 눌리는 듯한 느낌부터 온다. <정글쥬스>나 <북경반점>에선 이 캐릭터는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 하는 단상이 막 떠오르는데 말이다. 배우의 상상력으로 접근하기보다 잘해야 한다는 무게를 먼저 느껴서 그런 것 같다. <선택>을 제안받았을 때 고민이 됐지만 굳이 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었고, 내가 예전과 다르지 않을까 싶은 느낌이 들었다. 감독님이 장기수 분들을 만나보라고 했지만 일부러 피했다. 김선명 선생의 사진도 자료도 일부러 보지 않았다. 실제와 실존에서 좀 벗어나고 싶었다. 촬영하면서도 그랬다. 집이 우이동인데 쉬는 날이면 아무 생각없이 산에 가곤 했다. 그래서 의외로 극중 인물과 잘 어울려 보이는 것 같다. 그 인물로 팍 들어가려고 했으면 보는 사람이 부담스러웠을 거다. 캐릭터로 너무 들어가면 덧씌워진 느낌이 들 수 있는데,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 같은 경우가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