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 | 고민이 되는 건 세속적인 걸 버리면 편한데, 현실에선 그냥 미련을 버린다고 되는 게 아니거든요. 학교에서는 평화를 지켜야 한다고 하고 그게 옳지만, 현실에선 분명히 침략인데 그걸 받아들여야 하거든요. 또 정부에선 파병을 이야기하고. 혼란스럽죠. 그런데 영화 속 주인공은 그냥 본질적인 가치로만 산단 말이죠.
홍기선 | 나는 걱정 안 해요. 내가 그걸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은 | 아니, 정치에 신경 안 쓰더라도 당장 파병하면 나와 아주 가까운 누군가가 가서 사고를 당할 수도 있잖아요. 마음을 비우고 딱 잊어야 할지, 아니면 시민단체와 함께 국회 앞으로 가서 시위를 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운 거죠.
홍기선 | 그냥 마음으로만 반대할 사람은 그렇게 하고 시민단체와 더불어 움직일 사람은 그렇게 하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입장에서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싶어요. 이거 보면서 <아리랑>은 어떻게 풀어야 할지 뭐라도 떠올랐나요? 사실 <아리랑>은 여러 곳에서 만들려고 했는데.
주류와 비주류의 영화 만들기
이은 | 어쩌다 주류 영화사를 운영하다보니 나의 처지가 있어요. 그 첫 번째는 책임감이에요. 투자와 마케팅의 규모 안에서 미리 예측할 수 있어야 해요. 어떻게 얼만큼 투입이 되고 아웃풋이 어떻게 나와야 하는지 계산을 미리 해야 한다는 거죠. 시나리오도 그 연장선상에 있어야 하고. <선택>은 애초에 그 답이 없었던 거죠. 어떤 규모로 어떤 프로듀싱으로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그러니까 같이 하자고 할 때 책임을 져야 할 것에 대한 답이 없으니까 못했죠.
홍기선 | 그때 그 말을 해줬더라면 좋았을걸.
이은 | 그걸 알면 제가 했죠. 자신감도 없고. 근데 홍 감독님이 책임지고 만들어냈잖아요. 그래서 존경하는 거죠. 제가 과거에 리얼리즘영화의 프로듀서를 했다고 이것도 잘하리라는 보장도 없고.
홍기선 | 스탭들도 시작할 때는 일단 완성하고 보자는 거였어요. 극장배급 문제는 그 다음에 고민하자고.
이은 | 그거죠. 저를 부끄럽게 하는 가치라는 게. 합리화하면 난 지금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거죠. 장산곶매 시절처럼 일단 만들고보자는 거. 딜레마죠. 미리 결론을 내고 틀 안에서 만든다는 게. <아리랑>도 시나리오를 써보다가 투자자를 만족시킬 수 없다, 아니 만족하더라도 내 판단에 무모하다는 판단이 들면 그만둘 자세를 갖고 있어야 하니.
홍기선 | 다음부터도 이런 식의 작업이라면 무모하지.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고.
이은 | 그 경험과 결과를 잘 키워나가셔야죠. 홍 감독님의 작업이 미처 못 봤던 걸 다시 보게 하고, 함께 참여했던 이들에게 어떤 보람을 주었으니까. 만들고 보자는 게 무책임한 건 아니에요. 홍 감독님이 무책임한가. 영화를 보면 자유는 소중해 그러니 자유를 위해 어떤 것도 타협하지 않을 거야 하는데, 내 현실에선 그렇게 할 수 없는 현실이 답답해요. 예술적 성취감, 그리고 그 영화를 통한 관객과의 커뮤니케이션, 또 여기에 참여하는 모든 스탭들 이 세 가지를 다 고려하는 게 지금의 제 입장이에요. 들어간 비용에 비해 매출이 클 때 비로소 영화계에선 그 영화적 가치를 인정하니까요.
홍기선 | 주류의 메커니즘이 그건데, 비주류 속의 작품들 예컨대, <선택>이 그런 프로듀싱이 아니니까 어려움을 겪지만 분명히 고리는 있을 것 같아요. 요즘에는 이런 영화의 프로듀싱과 마케팅이 너무 없다는 게 문제지. 새로운 게 아니라 너무 검증된 것만 하려는 거. 물론 명필름 같은 제작사는 새로운 걸 하려고 하지만.
이은 | 그게 문제예요. 프로듀서가 비즈니스도 해야 하지만 감독과 더불어 창조의 활동인데, 말씀하신 것처럼 편한 것만 하려고 하면 그건 장사죠. 자기 노동으로부터 소외받는 것처럼 자기 예술로부터 소외받는 거죠. 자기 예술로부터 소외받기보다 힘들더라도 <선택> 같은 걸 해서 행복하면 좋은 건데, 다만 아직 그런 영역에서 개척하는 노하우가 부족하다는 게 문제죠. <섬>의 경우에 해외쪽에서 비용을 많이 뽑아서 길이 보이나 싶었는데 <욕망>에서 벽에 부딪혔어요. HD로 찍어서 9억원이 들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답이 안 나와요.
대중적으로 쉽게 말하기
홍기선 | 개인적으로 <선택>을 독립영화나 예술영화로 풀고 싶지 않았어요. 내 생각을 주관적으로 풀려고 했던 것도 아니고 내 생각이 그렇게 깊은 것도 아니고. 미장센도 스토리텔링도 대중적으로 풀려고 했던 건데, 여기에 답이 있지 않을까 싶어요.
이은 | 작품에서 인상적인 건 카메라가 다 안에만 있었다는 거예요. 장산곶매 시절 <심문>이란 영화를 봤을 때 굉장히 인상적이었는데, 그 영화와 대비해보면 형식적으로 아주 좋아요. 심리적인 게 중요한데도 클로즈업을 많이 배제했어요.
홍기선 | 그래도 바스트숏이 많은데.
이은 | 스토리텔링도, 카메라워크도, 연기도 내용이나 형식이 모두 리얼리즘에 충실하려고 하는 영화예요.
홍기선 | 유럽의 작가주의영화가 지닌 가치를 인정하지만 할리우드영화가 영화의 장점을 가장 잘 활용하는 것 같아요. 개인적인 생각으론 내용도 가장 진보적이고 쉽게 잘 푸는 게 할리우드영화가 아닐까 싶어요. 유럽영화는 너무 어렵게 풀어요. <공동경비구역 JSA>도 기본적으로 그런 스타일 아닌가요. 카메라워크에서 차이가 있지만.
이은 | 영화하면서 할리우드영화를 바라보는 건 감독님과 비슷해요. 시각적인 것과 사운드를 극도로 활용해 관객의 심리를 조작하고 그래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다 하는 것 말이죠. <선택>은 그런 건 없어요.
홍기선 | 그런 장난을 안 쳤지.
이은 | 장난이 아니라 노력이 아닐까요. 내 입장에선. 장산곶매할 때 <늑대와 춤을> 봤는데, 케빈 코스트너가 전쟁하다가 활을 쏴 휘익하면서 날아와 무릎에 팍 꽂히는데 그 소리와 장면이 아주 놀라웠어요. 똑같은 스토리를 소리와 화면을 통해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달라지잖아요.
홍기선 | 그건 기술과 관련이 있겠죠. 음향이 멀티화되면서 관객의 집중도를 극대화하도록 말이죠. 리얼리티를 왜곡시킬 소지는 있으나 더 강화할 소지는 많은 것 같아요. <플래툰>이 개봉됐을 때 내가 베트남전 소재를 개발 중이었는데 취재다니다보니 다들 사운드 이야기를 많이 하더군요. 정글에 있을 때의 느낌이 소리를 통해서 재현되더라는.
이은 | 홍 감독님에겐 장산곶매가 어때요?
홍기선 | 장산곶매가 장산곶매지. 좀 안타까운 게 계속 존재하면서 상업영화와 연관을 갖고 순환했더라면 하는 거죠. 그게 전체 한국영화라는 점에서 좋았을 텐데 <닫힌 교문을 열며>를 마지막으로 해체되면서 단절된 게 아쉬워요. 굉장히 중요한 역할이었는데. <파업전야>가 클라이맥스였고, 거기서 좀더 전문화됐어야 하는데. 그래서 필름 작업쪽에서 <선택>처럼 현실을 끌고들어가는 영화의 맥이 끊기는 현상이 생긴 거겠죠. 물론 상업영화에서 부분적으로 반영이 되기는 하지만.
이은 | 저에겐 장산곶매가 영화에 대해 고민하게 했고, 지금까지 영화를 하는 자세, 철학, 이유를 가르쳐줬죠. 함께 모여 기획하고, 배급까지 하면서 현실과 영화 사이에 겪을 수 있는 걸 다 배웠고. 장산곶매로 시작한 영화인으로 크게 변하지 않고 영화를 계속할 듯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