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영화아카데미 20년 [4] - 졸업생들이 회고하는 영화아카데미 ②
2003-11-07
글 : 이영진
글 : 문석

아카데미 5수생의 합격비법

박경목 | 16기·단편 <그녀>, 중편 <후회해도 소용없어> 연출

나는 영화아카데미를 다섯번 만에 들어왔다. 그것은 아카데미 20년 역사에 전무후무한 일일 것이다. 대부분 세번 정도의 시도에 들어오거나 아니면 그 정도에서 그만둬버리기 때문일 거다. 이런 면에서 나는 바보이면서 일면 쓸데없이 집요한 놈이다.

처음 영화아카데미에 대해 들은 것은 1994년도 독립영화협의회에서 하는 정기상영회에서였다. 그때 상영작이 아카데미 11기 작품이었다. 봉준호 감독과 장준환 감독, 그리고 지금 데뷔를 준비하는 허재영 감독의 작품이었다. 영화를 하겠다고 대학 졸업 뒤 고향 대구를 등지고 독협 워크숍을 들으면서 아무것도 모르던 시기에 그들이 만든 영화를 보면서 아카데미에 들어가면 나도 저들처럼 영화를 잘 만들 수 있겠지, 라고 꿈을 꿨다.

아카데미를 향한 첫 도전은 12기를 선발하던 94년 겨울이었다. 당시 아카데미 시험의 방식은 매번 바뀌었다. 영어는 항상 서울대학교 어학원에서 치렀지만 상식문제와 영화전공 문제는 1차시험이 되기도 하고 2차시험이 되기도 했다. 그때 촬영시험 문제가 기억난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유영길 감독님이 출제한 문제였는데,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이란 그림을 놓고 프레임을 정하는 것이었다. 플라스틱 자를 이용해 클로즈업, 풀숏 프레임을 그으라는 것이었다. 난 너무 심각하게 생각했다. 그냥 자로 그으면 되는 것인데 ‘이게 문제인가?’ 하는 마음에 특이하게 보이려고 프레임을 사선으로 그었다. 하지만 그것이 패착이었다. 물론 영어능력도 엄청 달렸지만(아직도 그 부분은 이해가 안 간다. 영화아카데미 시험에 웬 영어시험?),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유 감독님이 바란 답은 아주 평범하게 프레임을 잡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한번의 도전이 실패로 끝났다.

그뒤에도 나는 장비에 대한 갈망에 허덕이며 단편작업을 하면서 영화아카데미가 영화 만드는 데 있어 지상낙원이라는 판타지를 가졌었다. 13기(95년) 시험이 장비에 대한 갈망 때문이었다면 14기(96년), 15기(97년)에 응시한 것은 시험에 질 수 없다는 오기와 아카데미 시험에만 합격하면 앞으로는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주술 같은 믿음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주술은 저주가 되었다. 3번 모두 떨어졌고, 결국 나이 제한 때문에 더이상은 응시할 수도 없었기에 아카데미의 시험제도를 저주하고 울화가 치미는 감정으로 단편영화를 만들었다. 그때 여자친구는 나를 북돋워주었고, 나는 아카데미를 깨끗이 포기하곤 장선우 감독의 <거짓말>의 연출부로 일했다. 그런데 그곳에서 연출부로 들어온 조근식 감독을 만났다. 그는 시험을 다시 쳐보라고 권유했다.

마침 16기(98년) 시험 때 제도가 다시 바뀌었다. 포트폴리오를 심사하는 대신 영어시험이 없어졌고 나이제한도 완화되었다. 한해 전에 만든 그 영화가 포트폴리오가 됐다. 나는 인연이 없다고 생각했기에 예전처럼 합격에 연연치 않고 아주 편하게 시험을 치렀다. 사랑하지 않으면 사랑을 받는다고 했던가? 1차, 2차 모두 합격됐다. 어이가 없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투닥거리면서 내 옆에 있던 여자친구는 축하한다는 말을 하고 이별을 고했다. 그렇게 아카데미의 생활은 시작되었다.

6년 뒤의 보충수업

이현승 | 4기·<그대안의 블루> <네온 속으로 노을 지다> <시월애> 연출·중앙대 영화과 교수

영화가 나를 매혹시킨 것은 ‘빛’ 때문이었다. 어둠 속으로 뻗어나가서 스크린 위에 부딪혀 형상을 만들고 색으로 번져가는 빛을 보는 것은 신비로운 일이었다. 그러나 보는 일과 만드는 일은 다른 일이었고 충무로 현장에 있던 나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예술은 학습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체득되어지는 것이고, 이야기는 혼자서 시나리오를 쓰면서 공부할 수 있지만, 표현방식들은 영화를 만들어보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대학 시절 8mm 영화를 만들다 이런저런 이유로 결국 완성하지 못한 나는 권칠인 감독의 권유로 영화아카데미의 문을 두드렸고 운좋게 합격했다. 아카데미는 교육기관이기에 질문이 가능한 곳이었고, 또한 거기에는 유영길 촬영 감독님이 계셨다. 영화판에 발을 들여놓은 지 얼마 안 된 1986년, 당시 나의 영화적 고민은 여전히 빛을 가지고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의 문제였지만 현장에서 그것을 배울 수는 없었다. 영화현장에서 연출부가 촬영감독과 대화를 하고 궁금한 것을 물어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 당시에 그렇게 질문을 했다면, 한 사람이 “질문있는데요”라고 했다가 낭패를 당하는 요즘의 한 인터넷 업체의 광고에서처럼 어딘가로 질질 끌려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때문에 아카데미 시절 가장 행복한 일은 유영길 감독님에게 마음 놓고 궁금한 것을 물어볼 수 있는 것이었다. 나 스스로 ‘아폴로’라는 닉네임으로 불러달라며 촬영과 조명에 관심을 많이 보이자 유 감독님은 “너 촬영 할 거냐?”하고 물으셨고 난 “아뇨, 연출 해야죠. 그러나 연출공부는 어차피 평생 하는 거고 영화는 기술적인 메커니즘이 베이스가 되기에 지금 아니면 언제 제가 새삼 촬영이나 조명을 공부하겠습니까. 더구나 촬영감독이 촬영을 하지만 감독이 빛에 대해서 잘 이해할 때 촬영감독의 새로운 표현도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당신은 기특해하는 표정을 지으시면서도 촬영을 몇 십년 했지만 이제 겨우 조금 알 둥 말 둥하다면서 빛을 이해하는 것 역시 평생 걸려도 쉽지 않은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색채에 관심이 많은 나에게 비토리오 스토라로 촬영감독의 작품을 다시 볼 것을 권유했다. 나는 어렵게 구한 테이프로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지옥의 묵시록>을 다시 보며 빛의 세계를 공부했다.

6년 뒤 결국 유 감독님하고는 <네온 속으로 노을 지다>에서 감독과 촬영감독으로 만났다. 촬영 중 아프리카에서 지는 해를 바라보며 유 감독님과 나누던 대화, 특히 자연광과 인공광의 조화에 관한 이야기는 참으로 유익했다. 그때 난 6년 만에 아카데미의 보충수업을 한 셈이었다.

내 진로를 바꾸어 주었지

노종윤 | 5기·싸이더스 제작이사

영화제작에서 마케팅, 외화구매, 배급, 영화투자까지 다양한 영화 관련 일들을 하였고 현재 영화제작을 담당하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내가 영화아카데미 출신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 나의 출신에 대해 아무도 관심이 없는 것도 그 이유겠지만, 내가 다닐 때나 지금이나 영화아카데미에는 연출 전공과 촬영 전공만 있으며, 프로듀서 전공이 전무하여 영화아카데미 출신의 영화프로듀서가 있을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은 나도 영화아카데미를 지원할 때에는 꿈 많은 영화감독 지망생이었다. 당시 각 대학에 영화서클도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대학외 영화서클인 ‘영화마당 우리’에서 영화를 공부했고, 선배들의 추천으로 영화감독이 되고자 영화아카데미를 지원하였는데, 이때부터 나의 영화인생은 180도 바뀌게 되었다.

아카데미를 다니기 전에는 두서없이 영화 관련 원서로 연출공부를 했고, 조감독으로 활동하는 선배들에게 충무로 이야기만 들었던 나로서는 아카데미에서 제공하는 영화인들과의 토론시간에서 하늘 같은 영화제작자들을 접하게 되면서 당시 충무로 영화산업의 실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단편영화를 제작할 때는 동료 감독들의 작품 제작을 지원하게 되면서 서서히 아카데미에서 유일한 ‘제작부장’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순전히 친구들의 작품을 위해 협조를 해줬던 건데, 시간이 지나면서 동료들은 나를 ‘노 PD’로 불렀고, 아카데미의 행정부서에서도 나를 프로듀서 지망생으로 취급하게 됐다.

아카데미를 3분의 2 이상 다닐 때쯤, 드디어 나는 영화인생을 바꾸기로 결심하였다. 유능한 감독이 되는 것보다 유능한 감독을 발굴하고 재능있는 감독을 유능한 감독으로 성장시킬 수 있는 프로듀서가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아마 영화아카데미가 없었다면 난 지금도 어느 영화사에서 감독 데뷔를 하였거나, 아니면 영화감독 데뷔를 준비하기 위하여 열심히 시나리오를 들고 돌아다니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