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영화아카데미 20년 [2]
2003-11-07
글 : 이영진
글 : 문석

학생들을 깨우친 영화의 '어른' 들

“촬영을 나가서 무심코 카메라를 땅바닥에 놓았는데, 유영길 촬영감독님이 막 화를 내는 거예요. 영화 하는 놈이 이것밖에 못하냐고. 영화를 한다는 것에 대한, 아카데미를 다닌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을 심어주시려 했던 것 같아요.”(박기용 감독·3기)


교수진이 취약하다는 점은 현재까지도 영화아카데미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지만, 그 와중에 학생들에게 큰 가르침을 준 ‘어른’들이 있다. 우선, 고 유영길 촬영감독. 그는 영화아카데미의 초창기 때부터 실습수업을 진행했다. 유 감독에 대한 기억은 대체로 ‘영화에 대한 자세를 심어줬다’는 것으로 집약된다. 허진호 감독은 “황영조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날 유 감독님과 술을 함께 마셨다. 새벽인데, 유 감독님이 쓰레기통을 앞에 가져다놓더니 이리저리 바라보면서 ‘빛이라는 것을 아직도 모르겠다’고 하시더라. 그때 이렇게 최선을 다하는 자세가 있구나, 하고 느꼈다”고 말한다.

또 한명의 스승은 유재형 촬영기사다. 그는 기자재를 담당했는데, 무척 엄격했다. 장비를 함부로 다루거나, 장비를 가진 채 긴장이 풀어지는 모습을 보면 바로 불호령을 내렸다. “영화현장은 많은 사람들이 엄청난 장비를 들고 움직이는 곳인데, 그런 곳에 임하는 기본적인 태도를 알려주신 것 같다”고 봉준호 감독은 회고한다.

김동호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도 교수는 아니었지만, 알게 모르게 아카데미에 도움을 준 인물. 그는 88년부터 91년까지 영진공 사장을 지냈는데, 아카데미를 거의 챙기지 않던 전임 사장들과는 달리 사소한 모임에도 참석해 젊은 영화인들을 격려했고, 힘을 실어줬다.

“현장에선 ‘아카데미 출신들 두고보자’는 분위기였어요. 왜 우리에게만 대단한 혜택을 주냐는 것이었죠.”(권칠인 감독·2기)

영화아카데미 출신들이 진짜 큰 빛을 발한 것은 현장에서였다. 이들은 특유의 ‘헝그리 정신’으로 현장에서 인정받았다. 하지만 그 과정은 고달팠다. 특히 초기 졸업생의 경우, 고생은 더욱 심했다. 당시 제작자들은 영화에 대한 다양한 진흥책을 요구하고 있었지만, 영화법은 85년에야 개정됐고, 특별한 지원책도 나오지 않았다. 때문에 아카데미는 이들에게 ‘나랏돈의 낭비’로 보였을 것. 게다가 도제 시스템 바깥의 통로를 통해 충무로로 들어오려 하니 이는 매우 불쾌한 일이었다. “졸업 뒤 초반에는 다들 이상한 눈으로 바라봤다. 어디 얼마나 잘하나 보자는 식이었다.” 장현수 감독의 말처럼 아카데미 출신들은 충무로 기존 인력들의 견제를 받았다.

이를 타개하는 것은 직접 몸으로 보여주는 길밖에 없었다. 이들은 충무로의 바닥에서 성실하게 신임을 쌓아나가기 시작했다. ‘헝그리 정신’은 이 와중에 체득된 것이었다. 현장에서 힘들다보니 동기, 선후배들은 자주 모여 서로를 위안했다. 권칠인 감독은 “또래의식과 함께 이런 연대의 기억이 영화아카데미의 결속에 기여했다”고 평가한다.

또 하나, 이들이 충무로에서 적응할 수 있었던 힘은 아카데미에서 익힌 영화에 대한 진지한 자세다. “들어갈 때 복무서약서라는 것을 쓰라고 하더라. 5년 동안 한국 영화계에서 일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권칠인 감독의 기억에 따르면, 이를 어기더라도 제재할 수는 없도록 돼 있어서 당시엔 코웃음치며 서명을 했지만, 시간이 지나니까 그 ‘서약’은 스스로에게 영향을 끼쳤다. “고생스러운데도 이상하게도 자꾸 5년, 5년 하면서 다짐하게 되더라.”

그리고, ‘한국영화의 신르네상스’가 일어나다

“심재명씨와 여러 편을 함께 작업했죠. 마음이 잘 맞았으니까. 당시엔 젊은 제작자들이나 우리나 서로를 필요로 했던 것 같아요.”(김의석 감독·1기)

아카데미 출신 졸업생들은 젊고 싱싱한 마인드와 아이디어를 충무로에서 해소하고자 했으나, 80년대 후반까지 여건은 성숙되지 않았다. 하지만 분위기는 무르익고 있었다. 85년의 영화법 개정은 그 신호탄이었다. 20개 영화사의 독점체제가 무너지면서 다양한 영화사가 만들어졌다. 이들 영화사와 극장에는 젊은 기획자들이 포진하기 시작했는데 신철, 유인택, 안동규, 심재명, 차승재 등이 그들이다. 조수 신세였던 아카데미 졸업생들은 기획 실무자로 의욕있게 일하던 제작자들과 다양한 영화 이야기를 나눴고, 이는 훗날 한국 상업영화의 새로운 조류를 위한 바탕이 된다. 박기용, 김태균, 허진호, 봉준호, 장준환 등 아카데미 출신 감독과 유난히 작업을 많이 한 차승재 싸이더스 대표는 “젊은 제작자들이 많이 나타났지만, 당장 충무로에 진입하긴 어려웠다. 다른 편에는 새로운 스타일의 감독들이 대기 중이었다. 서로 얘기가 되는 상대들이 충무로의 예비군으로 존재했던 셈인데, 90년대가 넘어가면서 주류로 편입 못하는 제작자와 감독이 눈이 맞으면서 한국영화에 새로운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라고 당시 분위기를 설명한다. 결국 아카데미의 영화인들은 젊은 제작자를 만나 날개를 달며 90년대 이후 ‘한국영화의 신르네상스’를 선도한다.

“예전에는 ‘나 아카데미 몇기다’라고 하면 알아줬다고 하는데, 요즘 들어선 그런 것 같지도 않아요. 아카데미는 여전히 매력적이지만 보장된 건 하나도 없는 셈이죠.”(한 15기 졸업생)

2000년대에 들어서도 영화아카데미는 꾸준하게 영화인력을 양성하고 있다. <염소가족>의 신한솔(16기), <그의 진실이 전진한다>의 신재인(17기), <써브웨이 키즈 2002>의 손정일, 의 이하(18기) 등 주목할 만한 단편영화들이 계속 기대를 갖게 하는 것. 하지만, 20년 사이에 교육환경은 바뀌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이 신설됐고, 사설 영화교육기관도 생겨났으며, 각 대학들도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아카데미의 ‘아성’도 흔들리는 것이다.

현재 영화아카데미의 원장인 박기용 감독은 이와 관련해 “연관된 사람들은 이미 아카데미의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지난 20년은 형성기에 해당된다. 교육을 잘해서 이렇게 됐다기보다는 시기를 잘 만나 우수한 사람들이 모인 것이다. 초창기만 해도 카메라 2대, 스텐백 편집기, 제작비 지원 정도만 갖고도 독보적일 수 있었는데, 이젠 그것으로 안 된다.” 실제로 아카데미 재학생들은 아카데미가 등록금(80만원)에선 다른 교육기관에 비해 우위를 갖지만, 장비나 지원면에서는 대등하거나 오히려 달린다고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현재 영화아카데미와 영화진흥위원회가 고민 중인 아카데미의 ‘새로운 정체성’은 ‘장편영화를 만들 수 있는 영화인을 양성하는 기관’이다. 그동안은 초보과정도, 전문과정도 아닌 어정쩡한 교육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전문화쪽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얘기다. 김혜준 영진위 사무국장도 “앞으로 대학 이상의 영화교육은 초·중·고교의 영화교육을 포함하는 포괄적이며 인문주의적인 형태와 확실히 전문적인 형태라는 두 방향으로 갈라져야 한다. 그중 아카데미는 프로를 양성하는 쪽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입시에서 영어를 없애고, 포트폴리오에 비중을 높이 두는 것도 이런 차원의 일환일 것. 이와 함께 올해부터 시작한 영화인 재교육 사업의 확대발전과 애니메이션 아카데미의 확고한 정착도 아카데미가 넘어야 할 과제다. 특히 침체를 겪고 있는 한국 애니메이션 산업의 부흥을 위한 영진위와 아카데미의 협력체제는 꼭 필요한 일이다.

20년째를 맞는 영화아카데미 내부의 분위기가 동문들에 비해 다소 차분한 것도 지난 나날보다 앞으로 가야 할 나날이 주는 무게가 훨씬 크게 느껴지기 때문인 듯하다. 체계적인 계획, 좀더 효과적인 지원, 산학협동 체제의 강화 등이 아카데미의 미래, 나아가서는 한국영화의 미래를 밝혀주는 보장이 될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지난 20년간의 아카데미를 돌아보면 정말 중요했던 것은 ‘스피릿’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아무리 작은 영화라도 한편 한편을 진지하게, 자신의 것으로, 성실하게 여기는 투철한 프로정신 말이다.

“정말 노동을 많이 했어요. 엄청 무거운 배터리와 조명을 들고 산에 올라가기도 하고. 그때 영화 만들기에 대한 느낌을 받은 것 같아요. 영화란 게 이렇게 육체노동을 해서 찍는 거구나, 피땀을 쏟아야 만들어지는 거구나, 하고.”(봉준호 감독·11기)

20년 기념행사 ‘성인식’

휴대폰에서도 만날 수 있다!

영화아카데미는 20살 생일을 기념해 성대한 행사를 준비 중이다. 12월19일부터 21일까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리는 이 행사의 이름은 ‘성인식’. 졸업생들의 작품을 상영하는 영화제, 전시회, 포럼 등이 한꺼번에 열릴 이 자리에서 가장 관심을 모으는 것은 아카데미 졸업생 20명이 제작하는 디지털 옴니버스영화 <異共>이다. 박경희, 허진호, 봉준호, 이수연 감독 등 외에 김소영, 김의석, 오병철, 이용배, 장현수, 황규덕, 박기용, 이영재, 정병각, 이현승 감독 등 최근 다소 뜸했던 아카데비 선배급 감독들도 동참한다.

<異共>이란 제목은 ‘이공’, 그러니까 숫자 20을 상징하면서도 각각 다른 감독에 의해 공통 주제의 영화를 만든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집요하게도 20편 영화의 공통주제는 바로 ‘20’이다. 김의석 감독은 화투 20장만 사용하는 ‘게임’에서 따온 <섰다>를, 권칠인 감독은 20년을 같이 산 부부 또는 20살 생일을 맞은 여자아이의 순결에 대한 이야기 중 하나를 <어른의 문제>라는 제목으로 만들 생각이며, 박기용 감독은 20번째 생일을 맞은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인 <스무살>을, 김태균 감독은 새벽 2시 편의점 안의 남녀의 이야기 <편의점/ 새벽 두시>를 만든다. 조민호 감독의 <이십세법>은 남성의 수명을 20살로 제한하는 상황에서 벌어지는 일을 그리고, 유영진 감독의 <스무켤레>는 스무 켤레의 신발의 짝이 바뀌는 상황을 담을 계획이며, 이수연 감독의 <스무고개>는 도시에서 느닷없이 부딪힌 스핑크스의 이야기다. 김소영 감독과 이현승 감독은 각각 주인공 이름을 ‘이공’으로 하거나 20컷으로만 찍는 ‘변칙’을 활용한다. <異共>은 11월 말까지 제작돼 12월부터 후원사인 SK텔레콤을 통해 모바일 서비스되며, ‘성인식’에서도 매일 상영될 예정이다. 현재로선 극장에도 개봉할 계획.

‘성인식’에선 이외에도 아카데미 20년을 돌아보는 다큐멘터리 ‘인사이드 아카데미’가 상영되며, 그동안 만들어진 단편영화들을 ‘올드보이’(그동안 이름났던 단편모음), ‘영 앤 이노센트’(2000년 이후 작품들), ‘와일드카드’(동기생의 설문조사에 의해 선정되는 숨겨진 문제작) 등으로 묶어 상영한다. 애니메이션 아카데미의 작품 중 20편을 상영하는 ‘스무개의 애니메이션’도 준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