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매트릭스> 3부작 메가토크 [5] - 진중권이 말한다
2003-11-14
글 : 진중권 (문화평론가)
매트릭스의 철학,무엇을 말했는가

철학하는 블록버스터의 철학하기

“어떤 인간이 사악한 과학자에게 수술을 받았다. 그 사람의 두뇌가 육체에서 분리되어 두뇌를 계속 살아 움직이게 해줄 영양분이 가득 담긴 통 속에 옮겨졌다. 신경조직은 그대로 초과학적 컴퓨터에 연결되어 (…) 모든 것이 완벽히 정상적인 듯이 보이는 환각을 일으키도록 한다고 하자. 사람들, 사물들, 하늘 등등이 모두 있어 보이지만 그 사람이 경험하는 모든 것은 컴퓨터로부터 신경세포에 이어지는 전자자극의 결과다. (…) 그 사악한 과학자는 여러 가지로 프로그램을 변형시킴으로써 그 사람으로 하여금 과학자가 원하는 어떠한 상황이나 상태일지라도 ‘경험’하도록 할 수 있다.”(힐러리 파트남, <이성, 진리, 역사>)

실재론과 관념론

<매트릭스> 1편에서 거대한 수조 속에서 배양되는 인간 클론들의 충격적인 영상을 보고, 곧바로 미국 철학자 파트남의 사유실험이 머리에 떠올랐다. 이 “과학적 공상”은 “외부세계의 존재에 관한 회의론이라는 고전적인 문제”를 새로이 제기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하나의 두뇌로는 성에 차지 않았던지 그는 곧 이 운명을 전 인류에 지워 “모든 인간이 통 속에 들어 있는 두뇌라고 상상”하더니, 이어서 자기가 묻고자 했던 그 질문을 던진다. “정말로 우리가 통 속에 들어 있는 두뇌라고 한다면 그와 같은 사실을 우리가 말하거나 생각할 수 있는가?”

대답은 ‘아니오’이다. 이 물음 자체가 모순, 즉 “스스로 논파하는 가정”에 입각해 있다는 것이다. 내 견해를 묻는다면, 나 역시 파트남처럼 ‘아니오’라고 대답할 게다. 세계 속에서 특정 사물의 존재를 의심할 수는 있으나 세계 전체를 의심할 수는 없다. ‘의심’의 문법은 ‘믿음’이라는 낱말의 문법 위에 서 있다. 모든 것을 의심한다면 생각 또한 못하게 될 것이고, 그 결과 의심이라는 것도 할 수 없게 된다. 푸른 하늘과 빛나는 햇살, 새들의 지저귐과 들꽃의 아름다움을 맘껏 즐기라. 데카르트처럼 “방법적”으로만 회의를 하든, 아니면 그보다 더 진지하게 회의를 하든, 세계 전체를 회의하는 것은 철학적 난센스다.

팬텀과 매트릭스

‘매트릭스’라는 표현을 처음 사용한 이는 미디어 철학자 귄터 안더스로 안다. 하이데거의 제자였던 이 유대인 비평가는 잠깐 한나 아렌트의 남편 노릇도 했는데, 훗날 그의 아내는 “그의 대책없는 페시미즘(염세주의)이 견딜 수 없어서” 그와 헤어졌노라고 술회했다. 아내를 질리게 한 안더스의 비관주의는 대중매체가 만들어내는 미래에 대해서도 매우 우울한 전망을 내놓는다. 이 현대판 묵시론에는 인간이 만든 도구와 그것에 대한 인간의 통제능력 사이에 점점 벌어지는 ‘격차’(Diskrepanz)를 걱정하는 하이데거의 우려가 깔려 있다. 이 철학적 우려는 오래전부터 SF영화를 위한 풍부한 상상력의 원천이었다.

안더스에 따르면 대중매체는 새로운 존재층을 만들어낸다. 가령 안방의 텔레비전 속에서 쌍둥이빌딩이 실시간으로 불탈 때, 그 영상은 ‘가짜’ 하기도 뭐하고, ‘진짜’라 부를 수도 없다. 이렇게 가상도, 현실도 아닌 이 제3의 존재층을 안더스는 ‘팬텀’(환영)이라 부른다. 실제로 대중매체가 등장한 이래로 우리의 세계는 점점 더 관념적인 팬텀으로 변해가고 있다. 가령 미국에 가보지 못한 나의 머리 속에서 미국이라는 나라는 100% 사진이나 영화, 혹은 텔레비전 영상, 즉 내가 아닌 남이 본 영상들로 짜여져 있다.

‘팬텀’을 재료로 세계를 짜는 원리가 바로 ‘매트릭스’다. 철학자 칸트에게 시간과 공간이 주관의 선험적 형식인 것처럼, 대중매체는 세계를 세계로 제시할 때 ‘매트릭스’라는 선험적인 틀을 사용한다. 가령 <조선일보>를 생각해보라. 노무현 대통령이 말을 아끼면, “대통령, 꿀 먹은 벙어리인가”, 대통령이 말을 흐리면, “대통령 입장을 확실히 하라”, 대통령이 입장을 확실히 밝히면, “대통령, 입이 헤프다”. 이렇게 세계는 미리 짜여진 선험적인 틀에 따라 우리에게 제시된다.

사건은 원본의 형태로는 더이상 ‘사건’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보도라는 형태로 복제가 될 때 비로소 사건은 ‘사건’으로 인정받는다. 이렇게 모든 것이 원본이 아니라 외려 복제의 형태로서 사회적으로 더 중요해질 때, 현실은 팬텀과 매트릭스의 가상현실에 자리를 내주고 점차 사라져간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누가 짠 것인가? 이 세계는 과연 누구의 표상인가? 오래전에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나의 꿈이 너희의 표상이다.” 누굴까? 이 말을 한 매트릭스의 창조주는 히틀러다.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

어디선가 주인공 네오는 해킹 프로그램을 감추려고 서가에서 책을 하나 꺼내든다. 영화의 원작자들이 성경처럼 여긴다고 하는 보드리야르의 저서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이다. ‘시뮬라크르’란 ‘원본보다 더 실재적인 복제’를, ‘시뮬라시옹’이란 그런 복제들로 이루어진 세계를 가리킨다. 그렇게 놓고 보면 이 개념들이 실은 안더스의 ‘팬텀과 매트릭스’를 인터넷 버전으로 번안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원래 자기 사유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이에 대해 함구하는 게 철학자들의 못된 버릇인 모양이다.

‘가상’에는 늘 인식론적 문제가 따른다. 현실의 모습과 일치하면 그것은 ‘참’이요, 일치하지 않으면 ‘거짓’이다. ‘현실’이 아직 펄펄하게 살아 있을 때만 해도 조작은 개별적인 사실의 날조를 통해 이루어졌다. 하지만 ‘현실’의 개념 자체가 위험에 빠진 시대에는 사정이 달라진다. 조작은 개별 사실이 아니라 아예 세계 전체를 날조하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오늘날의 조작은 ‘시뮬라시옹’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가상현실을 만들어 유지하는 거시적 규모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돌발사태와 저지전략

가령 워터게이트 사건을 보자. 이는 예기치 못한 우연이 하마터면 깨끗한 이미지로 포장된 미국 정치의 추악함을 폭로할 뻔했다. 그러나 시뮬라시옹의 관리자들은 이 돌발사태를 성공적으로 저지했다. 이 놀라운 조작의 비밀은 권력의 본질을 보여주는 필연적 사건을 한갓 우연적인 ‘스캔들’로 만들어 제시한 데에 있다. 더러운 것은 권력 자체가 아니라, 닉슨이라는 한 개인의 도덕성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에게 이 사건은 외려 ‘대통령도 잘못 하면 처벌하는’ 민주주의의 위대한 승리로 기억된다. 얼마나 완벽한가?

‘시뮬라시옹’을 관리하는 자들의 골칫거리는, 미리 입력하지 않은 돌발사태가 가상의 세계로 치고 들어와 현실의 실재성을 주장하는 것. 현실이 자기 주장을 하면 가상의 가상성은 폭로된다. 관리자들은 이를 저지해야 한다. 1편의 시나리오는 이 ‘저지전략’의 포맷을 따른다. 저지되어야 할 ‘돌발사태’는 네오처럼 미리 입력된 프로그램을 거스르는 자들. 이들은 제거되어야 할 ‘버그’다. ‘버그’는 프로그램의 작동을 멈춤으로써 그 속에 몰입해 있던 이를 돌연 바깥의 현실로 끄집어낸다. 버그를 잡아내는 프로그래머처럼 스미스 일당은 네오와 그의 친구들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기계들의 도시로 향하는 네오의 모습은 예수의 모습과 다름없다. 네오는 시온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전쟁이 끝난 뒤 모피어스는 전쟁의 끝을 선포한다. 이는 결국 <매트릭스>가 가진 기독교적 세계관을 보여준다.

결정론과 자유의지

이때만 해도 아직 가상과 현실의 구별이 존재했다. 선택은 기껏해야 빨간 약과 파란 약 중 하나를 고르는 문제였다. 인간을 구하려고 네오는 행복한 가상을 포기하고 현실의 비참함을 받아들인다. 2편에서는 이 선택마저 미리 입력된 프로그램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로써 1편의 소박한 ‘해방’의 서사는 흔들린다. 만약 네오의 선택마저 미리 입력된 것이라면? 그리하여 매트릭스 밖의 현실도 또 하나의 매트릭스라면? 이제 그것은 ‘무엇을 선택하느냐’의 윤리학적 문제가 아니라, ‘도대체 선택이란 걸 할 수 있느냐’의 존재론적 문제가 된다. 여기서 제기되는 것은 ‘결정론과 자유의지의 대립’이라는 고전적인 물음이다.

’라플라스의 악마.’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입자들의 위치와 운동량을 입력할 수 있는 무한한 용량의 두뇌. 이런 슈퍼컴퓨터가 있다면 우주의 진행을 남김없이 예측할 수 있으리라는 것. 그것이 근대 자연과학의 인식이상이었다. 이런 관념에 따르면 우연은 아직 인식되지 않은 필연일 뿐이며, 나의 자유의지는 내가 아직 의식하지 못하는 타인의 결정에 불과하다. 매트릭스의 창조주는 ‘라플라스의 악마’다. 2편에서는 이 악마를 대변하는 목소리들이 강박적으로 “자유의지란 피지배자의 환상에 불과하다”는 대사를 반복한다.

정해진 프로그램에 따라 시온은 이미 다섯번 멸망했고, 네오 역시 여섯번 태어났다. 우주는 유전하고, 만물은 윤회한다. 안더스의 논문 제목은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패러디한 것. 그가 말하는 ‘표상의 세계’를 불교에서는 ‘사바세계’라 부른다. 니체의 ‘영겁회귀’에서도 불교적 기원을 추측할 수 있을 게다. 현각 스님의 해석에 따르면 불교에서는 “새로운 우주가 나타날 때마다 새로운 부처”가 나타나는 바, 석가모니는 “고해의 매트릭스인 이 우주에 나타난 여섯 번째 부처”라고 한다.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부처의 길이 어떤 의미에서는 ‘매트릭스 탈출하기’가 되는 셈이다.

매트릭스 벗기

슈퍼맨이 되어 하늘을 나는 네오를 보는 괴로움 속에서도 2편을 참아줄 수 있었던 것은, 그 안에 철학적 충격을 강화하는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그 충격은 매트릭스를 교란시키는 네오라는 ‘버그’마저도 매트릭스의 특정한 필요에 따라 미리 입력된 존재로 상정된 데에서 비롯된다. 1편의 철학적 패러다임은 가상과 현실의 구별 위에 서 있는 플라톤적 매트릭스다. 하지만 리로디드된 2편의 패러다임은 가상이 아닌 현실 자체도 하나의 매트릭스, 그것도 새로이 생성되어 소멸하기를 영원히 반복하는 니체적 매트릭스다.

합리적으로 관리되는 매트릭스의 필연에서 빠져나오게 해주는 것은 계산되지 않은 우연, 즉 믿음, 소망, 사랑 같은 비합리적 동인에서 비롯된 행위들이다. 2편에서 네오는 예정된 대로 시온을 구하러 가는 대신에 돌연 위험에 빠진 트리니티에게로 간다. 3편에서 네오는 스미스의 냉철한 합리성 앞에서 인류에 대한 “사랑”을 설교하고, 또 그가 구원해줄 인류들은 네오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을 토로한다. 이 믿음은 그야말로 비합리적인 믿음, 즉 ‘근거가 없는 믿음이야말로 진정한 믿음’이라는 중세적 믿음이다.

이 우발성의 개입에, 합리적 결정론의 화신 스미스는 히스테리 반응을 보인다. “내가 올 것을 미리 알았지? 그런데 왜 피하지 않은 거지?” 쿠키를 집어던지며, “내가 집어던질 것을 미리 알았지? 그런데 뭐 하러 구운 거야?” 하지만 스미스를 당혹하게 만든 이 돌발사태도 혹시 미리 예정된 게 아닐까? 결말 부분에 비슷한 질문이 반복된다. 매트릭스의 과학자가 오라클에게 “이렇게 될 줄 미리 알았지?”라고 묻자, 오라클은 가볍게 부정을 하며 입가에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띄운다. 이로써 대답은 슬쩍 유예된다.

종교와 철학

3편의 분위기는 철저하게 기독교적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전형적인 십자가 책형의 모티브를 따르고 있다. 네오는 예수 그리스도가 된다. 스미스는 신에 의해 창조되었으나 그에게 반기를 든 사탄의 역할을 한다. 네오와 스미스가 3편에 걸쳐 벌이는 결투는 마치 광야에서 벌어진 사탄과 예수의 세 차례의 대결을 연상시킨다. 몸에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죽음을 극복한 예수처럼, 네오는 몸 속에 스미스를 받아들임으로써 스미스를 사라지게 한다. 순간 묵시록에서 예언한 아마겟돈의 결전은 멈추고, 네오의 사도 요한이 군중 앞에서 인류가 구원받았음을 외친다. 기쁜 소리, 복음이다. 할렐루야, 성령 충만한 은혜로운 시간이다.

성가족의 성스런 대화(웅덩이에 쓰러진 네오의 얼굴에서 언뜻 오라클을 본 것 같다. 제대로 본 것이라면 이는 수육(受肉)의 드라마, 즉 인류를 구원하러 인간의 몸이 되어 내려온 신의 얘기가 된다). 매트릭스의 창조주에게 오라클이 묻는다. “이제 저들을 어떻게 할 거죠?” “이제 저들에게도 자유를 줘야지.” 유일신교의 승리다. 이집트 당국은 다시 이 영화를 허용하라. 하지만 이렇게 끝낼 수는 없는 일. 창조주는 “이 평화가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 것 같냐”고 묻고, 거기에 오라클은 “가능한 한 오래”라고 대답한다. 이로써 이 평화가 궁극적인 것은 아님이 슬쩍 암시된다. 기독교사관의 직선은 다시 불교사관의 원환과 합류한다.

포스트모던

이 절충주의가 이른바 ‘포스트모던’의 일반적 특징이다. 영화 <매트릭스>는 온갖 철학과 온갖 종교에서 따온 인용들로 가득 차 있다. 이를 ‘혼성모방’이라고 하는데, ‘포스트모던’ 계열의 작품에 종종 사용되는 기법이다. 나아가 현대의 최첨단 기술이 신화나 신학 같은 고대적 모티브과 모순적 결합을 이룬다든지, 가장 대중적인 오락에 매우 난해한 지적 유희를 도입하여 대중과 엘리트를 가르는 구별을 내파(implosion)하는 것도 포스트모던의 특징으로 볼 수 있다. 매트릭스 속의 ‘키치’를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키치’는 포스트모던에 본질적으로 속한다.

끝없이 자기 복제를 하는 스미스는 자본주의의 이미지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유일물의 제작이 아니라 동일한 ‘코드’에 따라 수천, 수만개의 동일자를 복제하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보드리야르는 현대사회를 동일자를 무한복제하는 암세포에 비유한 바 있다. 상품만이 아니라 자본주의는 그것을 생산하는 인간들마저도 획일화한다. 현대사회는 인간들을 다양하게 획일적으로 만들고, 이 매트릭스 안의 인간 시뮬라크르들은 남이 정해준 인생의 목표에 따라 남의 삶을 살아가며 자본의 확대재생산을 위한 역사적 사명을 다하다가 죽는다. <매트릭스>는 이런 현대사회의 영화적 반영이다.

아이러니와 몽타주

벗어날 길은 없을까? 포스트모던은 계몽의 서사와 해방의 수사를 비웃는다. 영화 속에서도 매트릭스를 벗어나려는 네오와 그의 동료들의 노력은 스미스나 메로빈지언에게 비웃음만 사게 된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게다가 대중들은, 적어도 영화를 보러 온 순간만큼은, 아직도 구원의 복음과 그것의 세속적인 형태인 해방의 서사를 보고 싶어한다. 3편의 시나리오가 진부한 기독교적 대속의 서사로 귀결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리라. 이런 점에서 포스트모던은 모던의 엘리트주의와 구별된다.

해방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해방의 수사는 벌써 낡은 것이 되었다. 이것이 현재의 상황이다. 가끔 ‘매트릭스’ 안에 갇혀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른바 ‘전투적 글쓰기’를 한다고 하나, 어쩌면 그 전투도 미리 체제의 프로그머에 의해 입력이 되어, 대중에게 값싼 카타르시스를 제공해줌으로써 이 현실을 견딜 수 있게 하는 역할만 하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이제 헛된 저항을 포기해야 하는 걸까? 해방의 뜨거운 열정과 순응의 차가운 지혜를 종합할 수는 없다. 영화의 결말처럼 다만 절충이 있을 뿐이다.

절충을 피하는 방법도 있다. 가령 네오가 스미스가 되고, 스미스가 네오가 되는 것처럼 ‘아이러니’를 실천하는 것이다. 이는 현대판 낭만주의자들의 방법이다. 아니면, 두개의 생각을 부싯돌처럼 충돌시켜 거기서 얻어지는 불꽃을 보는 것이다. 이것은 삶의 몽타주 예술이리라. 구원은 구세주에 대한 믿음에 있는 게 아니다. 스스로 구세주가 되는 데에 있는 것도 아니다. 영화 속의 대사처럼 구원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너 자신뿐이다. 하긴, 촌스런 구원의 수사학을 포기하고도 여전히 구원을 얘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뿐이 아니겠는가?

관련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