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패도 정권도 자신이 3류임을 모르고 사는 비극 담는다”
몇 나절을 촬영장에 붙어 있는다 한들, 아니 설사 전 촬영 기간 동안을 따라다닌다 해도 <하류인생>이 어떤 모양새를 갖춘 영화일지 알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콘티북은 물론이요, 시나리오조차 존재하지 않는 이 영화를 상상하는 일은 불가능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대신 이 영화의 모든 장면 장면은 오직 한 사람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존재한다. 그 ‘절대자’는 두말할 나위 없이 임권택 감독이다. 곧, <하류인생>의 전모를 파악하기 위해선 임권택 감독을 만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결국, 누구 못지않게 임 감독의 새로운 영화를 고대하고 있는 허문영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 프로그래머가 조바심을 참지 못하고 부천 오픈세트을 찾아 임권택 감독을 만났다. - 편집자
“비애로운 세월을 살았던 우리 이야기”
-우선, 아주 무식하게 여쭙겠습니다. <하류인생>은 한마디로 어떤 영화입니까.
=스스로가 인생에 때 묻어가고 황폐화되어가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의 얘기죠.
-주인공인 태웅이는 어떤 인물입니까.
=처음엔 깡패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순진하고 정의감도 있고, 이랬던 친구요. 그런데 점점 인생의 때가 묻어가죠.
-지난해 감독님 댁에서 뵜을 때, ‘<취화선> 다음 영화는 부담감을 벗어던지고, 좀 편한 마음으로 장르적인 요소가 강한 영화를 만들 생각은 없으십니까’라는 질문에, 감독님께선 ‘이번엔 또 다른 시도를 생각하고 있다’, 뭐 그런 뜻의 말씀을 하신 것 같은데요.
=그런 뜻이라기보다는…. 내가 찍고 있는 이게 액션물로 알려져 있어요. <장군의 아들>의 아류일 것이다, 라고. 그렇게 지레 짐작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런 유의 영화가 아닐 거라고 얘기한 거죠.
-한 사람의 관객으로서는 감독님이 <축제> 때부터 형식적인 실험을 여러 차례 시도하셨고, 굉장한 성과를 거두셨기 때문에, 사실 한번쯤은 <서편제>처럼 감성이 진한 영화를 구경하고 싶다는 기대가 있었거든요.
=이번 영화는 그런 면이 대단히 강할 거예요. 50년대 말에서부터 70년대를 거치는 시대가 하도 우여곡절이 많던 시대이다보니, 주인공도 도리없이 그런 시대에 알게 모르게 영향받지 않을 수 없겠죠. 그래서 시대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장면들도 나오는 것이 사실이요. 하지만 이번에는 우리가 삶 속에서 끄집어낼 수 있는 재미로움을 가지껏 끌어내서 찍어볼 생각이거든요. 요즈막의 영화들이 모두 과장되고 너무 픽션스럽고 한데, 나는 내 주변에서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삶의 일부, 심지어 내가 살았던 일부까지도 이 영화 안에 끼워넣고 있어요. 그런 삶을 잘 끌어내도 재미가 얼마든지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고, 그런 재미로도 흥행이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해보고 싶어요. 욕심은 그런 거예요. 가능하면 재미있는 영화. 대신 허황된 꾸밈을 철저히 배제하고 실제로 산 사람들의 얘기를 배열해가면서 그 안에서 재미를 끌어내고자 하는 거죠.
-영화의 시대 배경이 4·19 무렵부터 70년대 초로 돼 있는데, 그게 의미심장해 보이거든요. 전쟁의 참화로부터 가까스로 벗어나 새로운 시대와 더 나은 삶을 향한 희망이 굉장히 강했고, 그만큼 좌절도 많았으며, 그만큼 파란만장했던 시대이기도 합니다. 감독님 개인사를 비춰보면 굉장히 힘들었던, 그리고 많은 자괴감을 느끼며 영화를 만들었던 시대인데, 배경을 그렇게 설정한 이유는 뭡니까.
=그때 나는 자괴감을 가지고 영화를 50여편이나, 아무 생각없이 만들었어요. 좋은 작품을 찍어봐야겠다는 꿈 같은 것도 전혀 없이. 영화를 찍어내는 기계처럼 살았다고 할까. 그냥 살기 위해서 영화를 생각없이 찍어냈던 시대. 그렇게 생각없이 산 사람들에 대한 얘기를 찍고 싶은 거예요.
-그 시기는 감독으로서의 생활을 시작하실 무렵인데, 개인적으로 자기 인생을 개척해야 하는 시기에 깊은 자괴감을 느끼셨기 때문에….
=개척한다는 마음은 전혀 없었어요. 단지 살았던 거예요. 싸구려 개런티 받으면 술 마셔 다 써버리고, 다시 돈 생기면 또 마시고 하면서 그냥 살았던 시대거든요. 단지, 주제랄 것도 없는 그런 영화를 찍으면서 현장에서 열심히 살았던 것 같아. 그거 아니면 내가 살아갈 길이 없으니까. 내가 영화감독으로 살아가면서 체험했던 영화판도 <하류인생>에서 상당한 분량을 차지하고 있거든요. 그때 영화판이란 게 참 코미디도 아니고 뭣도 아니게 이상스럽게 돌아갔는데, 그게 사람들이 얼핏 볼 때는 되게 웃기는구나, 할 거예요. 하지만 나로서는 그것이 얼마나 비애로운 세월이었는지를 담아내고 싶은 거죠. 또 이태원 사장이나 정일성 감독, 또 주변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체험을 영화 안에 도입하고 싶은 거예요.
-이태원 사장님 말씀이 나와서 그런데, 주인공을 깡패로 설정하신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오래전부터 이태원 사장의 삶이 재밌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게다가 그때 군사정권도 깡패 아니요. 개인도 깡패로 살고 있지만, 힘으로 정권을 장악해서 나라를 경영하는 방식도 깡패 같았던 시대란 말이야. 자유당 정권의 부패, 민주당 정권의 무능, 그리고 그것을 구실삼아서 군이라는 깡패들이 들어와서 나라를 경영하는데도 계속 거짓말해가면서 살아가는 시대였단 말이에요. 그런데도 그런 권력과 유착하며 살 수밖에 없는 시대를 살면서 이 깡패가 올바르게 살 생각을 하겠냐고요. 그런 가운데 인간성 자체가 황폐화된다는 것을 찍어보고 싶은 거죠. 그래서 우리가 인생을 맑게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은 거예요.
-이 영화 주인공, 그러니까 최태웅의 모델이 이태원 사장님이라는 얘기를 주변에서 많이 하던데요.
=아니요. 그때 그분의 에피소드가 하도 재미있는 게 있고 해서 그 생활의 일부를 인용한 거지. 이건 이태원 사장의 생을 다룬 영화가 아니죠.
-보도자료에는 최태웅이 깡패생활을 시작해 5·16을 맞을 때의 이야기 정도까지만 나오거든요. 이후 주인공은 어떻게 살게 됩니까.
=군인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깡패소탕을 하자 거기서 더 못해먹고 영화제작자로 살아요. 그 다음에 군납업자가 돼요. 입찰 가격을 담합해서 건설공사를 따내는. 그러다가 직접 정권과 유착이 돼서 직접 그 일에 나서면서 돈을 막 벌기도 하죠.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불알을 잡고 사는 세월이요 그게. 자기가 뭘 열심히 생각하고 무엇을 창의적으로 해낸 세월이 아니라. 그런데 이젠 계속 공사를 따내지 않으면 회사가 망하는 거예요. 그동안 쓰려고 들여놓은 장비며 인원이며 유지하려다가 더 심한 유착에 빠지고…. 그러면서 인간이 아 저기까지 황폐해져갈 수 있구나, 그런 것을 그려가는 거요.
-주인공은 이 사회의 중심이거나 이방인이 아니라, 그냥 주변에 빌붙어서 먹고사는 사람인 셈이네요.
=그렇죠. 단지 누가 허우적대냐 하면, 마누라가. 마누라가 어떻게든지 태웅이를 좀 밝은 쪽으로 삶을 유도해보려고 해요. 마누라는 체질적으로 폭력을 좋아하는 이 남편을 거기로부터 건져내면 그걸로 될 줄 알았단 말이요. 처음에 볼 때 사람이 괜찮았으니까. 그런데 뒤에 보니까 오히려 처음에 깡패생활 때보다 훨씬 나빠졌다는 거요, 인간이. 그건 몰랐었죠. 그런 얘기요. 그건 본인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지만, 정권을 운영해간 사람들에게도 책임이 있는 거요. 그 사람들은 그 사람들대로 태웅이 같은 애들이 필요한 것이요. 정권을 끌어가자면 돈도 필요하고 하기 때문에 약속위반을 밥먹듯이 해버리고…. 그런 맑은 어떤 것을 지키면서 살아야겠다는 의식조차 할 여가가 없이 시대의 혼탁한 물에 이렇게 휩쓸려 사는 인간을 그리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오죽하면 타이틀을 <탁류>라고 지으려고 생각도 했을까. 채만식의 소설 때문에 바꿨지만….
-그렇다면 영화가 불가피하게 비극적인 정조를 띨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하고 짐작이 되는데요.
=그럴 수밖에 없죠. 그러나 본인들은 그 삶 자체가 비극적이라는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사는 거요. 물론 그게 비극적이라는 것을 관객은 알아차리게 해야죠.
-운명적인 비애, 이런 느낌이 들 것 같습니다.
=중이 되는 식으로 탈세속을 하지 않는 다음에야, 한 개인에게는 우선 산다는 게 소중하니까 그런 데 매달려서 가다보면 그 얼마나 큰 흙탕물 속에서 살 수밖에 없냐 하는 거죠. 그런데 본인 자체는 흙탕물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모른다는 얘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