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권택, 정일성, 이태원, 한국영화 최고의 트리오가 11번째 뭉쳤다. 정일성 감독은 촬영장에서 가장 활기차게 움직이는 스탭이었고, 이태원 태흥영화 사장은 매일같이 촬영장에 나와 현장을 둘러봤다. 이들 외에도 60살 이상 '노장' 스탭이 세명 더 있으니, 김동호 조명감독, 김호길 소품감독, 신중현 음악감독이 그들.
완성된 테이크를 보니 42초 동안 숨 쉴 틈 없는 액션이 엄청난 스피드 속에 살아난다. 그런데 임 감독은 왜 어려움을 무릅써가며 액션장면을 롱테이크로 찍었을까. “사실감나는 액션이 최고로 중요한 거요, 여기서는.” 임 감독은 요즘 유행하는 와이어 액션을 인정하지 않는다. “단순한 기예”일 뿐이란 거다. <하류인생> 액션신의 모토는 사실감이다. 그 사실감이란 말 그대로 정말 때리고 정말 맞고 정말 그 충격에 턱이 돌아가고 벌러덩 넘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실제로 격투를 하란 얘기는 아니지만, 당사자들의 육체가 스크린 안에서 충돌해야 한다는 것이다. 권성환 무술감독은 “임 감독은 액션 대가 출신이라 그런지, 매우 섬세하다. 게다가 바라는 수준도 높다. 전체가 10이라고 했을 때, 나는 6 정도면 오케이 하는데 그는 9가 아니면 오케이 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하류인생>은 임권택 감독의 ‘새로운’ 액션영화가 될 것이다. 이 새로움은 <장군의 아들>에서 보여준 일대일의 결투 스타일 액션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다른 이들의 액션영화들과도 차별점을 긋겠다는 포부일지도 모른다. 액션장면 중 상당 부분을 롱테이크로 촬영했다는 점도 그건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 결국, 롱테이크를 사용하면 컷 효과를 노릴 수 없으니 좀더 리얼한 액션을 펼칠 수밖에 없는데, 혹시 그는 이 ‘실제 액션-롱테이크’의 조합을 통해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려는 게 아닐까.
11월18일 경기도 부천시 부천 판타스틱 스튜디오 안 <하류인생> 오픈세트
“이렇게 형이상학적 주제의 작품(<만다라>)이라 하더라도 뭔가 무거운 의미를 띠는 영상이나 몽타주는 배제하면서 어디까지나 지극히 자연스러운 연기와 화면 처리로 구성해간다는 점이 이 작품의 품격을 한층 높이고 있다. 그것은 어쩌면 임권택이 원래 영화감독을 지망한 청년이 아니라 철저하게 현장에서 영화를 배우고, 그 속에서 즉물적인 영화를 중시하는 상업영화 세계에서 잔뼈가 굵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사토 다다오, <한국영화와 임권택>(한국학술정보 펴냄) 168쪽)
오픈세트장을 공개하고 제작발표회를 하는 날을 맞아 분위기가 들썩거린다. 행사를 끝내놓고 이곳을 찾은 기자들에 대한 ‘서비스’ 차원에서 조승우와 김민선이 함께 등장하는 신을 촬영했다. 명동 거리에 쓰러진 태웅을 혜옥이 찾아내서 여관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이 장면이 심야에서 초저녁으로 당겨진 것이다. 이 첫신을 시작으로 이날의 촬영은 매우 순조로웠다. 대부분 첫 테이크에서 바로 임 감독의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이날 찍은 7개의 컷 중 NG가 난 것은 가장 나중에 찍은 명동파와 혜옥이 스쳐지나가는 장면뿐이었다. 전날처럼 어려운 장면이 없었던 탓이기도 했겠지만, ‘참관’ 사흘째가 되니 여기엔 임권택 감독만의 ‘비법’이 자리함을 어렴풋이 알게 된다. 사실, 그 ‘비법’이란 어찌보면 매우 단순한 것이기도 하다. 정확한 연기 지도와 철저한 리허설 말이다. 그러고 보니 16일 이태원 사장은 “저 양반이 연습을 엄청 시켜. 완벽하게 될 때까지 하는 거야. 옛날부터 필름을 아끼기 위한 게 아주 체질화돼 있어. 제작자 입장에선 제일 고맙지” 하고 속삭였다. 다른 영화들이 20만∼30만자를 쓰는 와중에도 <춘향뎐>은 8만자, <취화선>은 11만자 정도만을 썼다. 특히, <취화선>은 그림과 풍경을 따로 찍고, 대역들도 별도로 촬영해야 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극도의 절제라 할 수 있다.
물론 필름 절약은 결과이지 목적은 아니다. 임 감독이 그토록 철저하게 리허설을 벌이는 것은 그의 영화에 시나리오가 없다는 사실과도 관련있는 듯하다. 최소한 그는 최근 20여년간 시나리오를 미리 준비한 채 영화를 찍어본 일이 없다. 그는 대략 큰 이야기 틀거리만을 만들어놓고 영화를 시작하고 있다. 그가 구체적인 시나리오를 안 쓰는 이유는 현장의 분위기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촬영 당일 촬영장의 모습이나 배우들의 느낌 등을 종합적으로 감안해서 영화 속에 담으려다 보니 자연 시나리오도 빨리 나올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촬영에 임박해서 시나리오가 나오지만, 이것 또한 절대적이진 않다. 리허설을 거듭 하는 와중에 이조차 계속 바뀌어간다. 이날도 임 감독은 배우들이 리허설을 하는 와중, 계속 골목을 서성거리고 두리번거렸다. 그건 전날도, 그 전날도 마찬가지였다. 그 ‘배회’의 시간 이후 대사와 움직임, 카메라의 앵글 등은 여지없이 바뀌었다. 결국, 거듭되는 리허설과 두리번거림은 좀더 생생한 영화를 만들어내기 위한 임 감독의 몸부림인 셈이다. 물론, 이러한 ‘즉흥연출’이 가능한 것은 98편의 영화를 만들어온 장인의 기량이 받쳐주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25회 촬영을 끝낸 <하류인생>이 갈 길은 상당히 멀다. 애초 80회로 예상됐던 촬영 회수는 120회 정도까지 늘어날 조짐이고, 크랭크인이 늦어진 탓에 한겨울을 정면돌파해 내년 2월까지 촬영을 마쳐야 한다. 게다가 임 감독 생각에 이 영화는 흥행이 되면서도 기품이 살아야 하고, 새롭고 실감나는 액션을 보여줘야 하며, 관객에게 웃음을 주되 그 안에서 아픔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은가. 결국, 임권택 감독이 “무작정 시작은 했는데, 이걸 어떡하냔 말이요, 어떻게…”라고 애끓는 시름을 뱉는다. 하지만, 임 감독을 제외한 누구도 그의 탄식을 진지하게 듣는 것 같진 않다. 그림을 스크린에 담은 <취화선>, 소리를 영상으로 표현한 <춘향뎐> 등 이미 임권택 감독은 어려운 난관을, 그것도 스스로가 만들어놓은 어려움을 너무도 완숙하게 헤쳐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류인생> 스탭 중 그 누구도 임 감독이 무수한 고비를 넘기지 못하리라 생각지 않는 것이다.
이날 새벽 1시30분쯤 마지막 장면 촬영을 마친 뒤 임 감독은 조감독과 연출부원들을 불렀다. “이제, 겨우, 스탭들이 상당히 손발이 맞았단 말이야. 이제부터 분량을 조금씩 높여가잔 말야. 드디어 자리가 잡혀가는 거야, 여기도.” 거장이 드디어 99번째 봉우리를 향해 성큼 발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