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임권택 감독의 신작 <하류인생> [5] - 허문영vs임권택 ②
2003-11-28
사진 : 이혜정
정리 : 문석

“더 사실 같은 격투를 아주 힘있는, 힘있는 영상으로”

-듣다보니 이야기 구성이 참 까다로울 것 같다는 예상이 됩니다.

=이게 자칫 잘못하면 우스운 삶을 살아간 사람들의 삶을 재미로만 좇아가 찍은 영화가 될 수 있어요. 그렇게 결과지어진다면 문제가 많은 거지. 주인공들은 흙탕물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흙탕물인지 모르고, 관객은 그것을 알아차리고 얘기를 들여다볼 수 있는 그런 영화가 돼야 하는데.

-양식미에 좀더 노력을 기울였던 <취화선> <춘향뎐>에 비하면 다른 어려움이 있을 것 같습니다. 어쨌건 <춘향뎐>은 이미 있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삼았고, <취화선>은 많은 부분이 새롭게 창조가 됐다고 하더라도 실존 인물이라는 틀이 있으니까 그 틀 안에서 만들면 됐을 것 같은데, 이번에는 이야기가 도대체 어떻게 짜여질지, 기승전결이 어떻게 될지 짐작이 안 돼서….

=이야기야 그렇게 살았던 체험담이 있으니까 별로 어려운 게 아닌데, 깡패만 하류라고 생각했는데 그들을 잡아간 정권도 다 같은 부류라는 것, 그러니까 여기는 3류들이 들어와 사는 세상이구나, 이렇게 알아차리게 하는 것이 중요하죠. 기품도 우러나게 하는 그런 영화를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이렇게 힘이 드는 거죠.

-혹시 결말을 미리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아직은 나도….

-못 정하셨군요.

=그러니까… 결말은 주인공이 아주 황폐한 인간이 돼버리는 것이죠. 정신적으로. 옛날 같으면 친구에 대한 의리도 있고 이랬던 친군데, 한 사업자로 살아가면서 배신을 밥먹듯이 하면서…. 그건 정권이 가는 것과 궤를 같이해서 가는 거죠. 그따위 짓을 하는 게.

-시대배경이 60년대니까 어쩔 수 없이 이념문제를 피해갈 수 없을 것 같은데요.

=그런데 이 사람은 이념이 있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가령 어느 정도냐면, 영화 제작자가 된 다음, 흥행 때문에 야한 장면을 집어넣었는데 검열에서 걷어내지자 차라리 반공영화를 찍을 걸 잘못했다는, 그런 말을 할 정도니까.

-그렇게 거꾸로 이념문제가 드러나게끔 하는 거네요.

=가령, 어떤 사람이 통행금지에 걸려서 파출소에 들어갔는데, 경찰이 혁명공약을 외우면 치안재판에 안 넘기고 내일 아침에 보내주겠다고 하니까 땀을 내고 외우고 있는, 그런 장면을 통해 전체적인 사회의 분위기를 심어가면서 가는 거죠.

-이야기가 70년대 초에서 멈추는 것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10월유신에서 영화가 끝나요. 장면으로 보면 시대배경이 작게 나오고 있지만, 실제론 강하게 들어온다고. 가령 4·19랄지, 5·16이랄지…. 제작자는 복통 터질 거예요. 이야기하고 큰 관계도 없는데, 시대의 흐름을 왜 돈을 저렇게 처발라가면서 찍는지…. (웃음) 답답하고 할 테지만, 그게 없으면 그놈의 격조가 안 살아나는 거예요.

-궁금한 것 중 하나는, 분명 액션 장르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액션 요소는 많을 것 같은데요. 비중이 어느 정도 되는지요.

=초기에 주인공이 깡패생활할 때가 액션물이라 할 수 있죠. 뒤에는 액션물이라고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요. 단지 영화제작을 하든 군납사업을 하든 간에, 깡패 출신다운 기질이 매번 드러난다는 거죠.

-섣부른 짐작인지 모르겠는데, 어제 중부경찰서 앞에서 4·19 장면을 촬영하는 걸 보면서, 컷이 자주 나뉘는 다이내믹한 액션이 아니라 구도를 안정적으로 잡고 약간 느리게 진행되는 액션이 아닐까 하는 짐작을 했습니다.

=그럴 수도 있죠. 그러나 뭐에 신경을 많이 쓰냐 하면은… 홍콩영화나 요즘의 액션물들이 너무 허황된 액션을 보여주잖아요. 그래서 여기선 어떻게 사실감을 주는 액션을 박력있게 찍어낼 것인지 하는 데 힘을 모으고 있어요.

-혹시 <장군의 아들> 때는 못했는데 이번에는 이렇게 해야겠다고 생각하시는 요소들이 있다면.

=더 사실 같은 격투인데, 그것을 아주 힘있는, 힘있는 영상으로 한번 해보려고 하는 거죠.

-사실 요즘 액션영화와 비교할 때 <장군의 아들>은 서정적인 아름다운 느낌이 들 정도로 아주 부드럽고 아름다운 액션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그땐 낭만이라는 게 있었죠. 그런데 여기서는 액션이 아름다울 수는 없고. 단지 이번에는 사실감이라는 것 때문에 더 박진감 있을 거라는 생각은 있어요.

-이번에 오디션으로 조연들을 116명이나 뽑으셨다는데, <장군의 아들> 때 생각이 나셨겠습니다.

= 아, 옛날하고는 또 달라진 게 있더라고. <장군의 아들> 때는 연기학원에도 안 가본 놈이 전부 몰려온 거예요. 진짜 깡패도 오고. 그래서 한 3분의 1쯤 찍다가 내가 속으로 ‘야 이거, 큰일났네, 이런 개새끼들하고 내가…. 무슨 꼴을 당하려고 내가 얘들하고 이렇게 헤매고 있는가’ 하는 생각을 했는데. (웃음) 그때는 연기고 지랄이고 그냥 덩치만 좋으면 썼는데, 무슨 배짱이었냐면, 액션영화니까 주인공부터 미세한 연기를 통제해서 액션 일변도로 갈 생각을 했단 말이에요. 그래도 새끼들이 하도 못해갖고…. (웃음) 그런데 이번에는 극단 학전에서 제대로 훈련된 배우들도 무진장 오고, 또 그런 것 아니더라도 무슨 경험있는 사람들이 많더라구. 시대가 그렇게 달라졌더라니까.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할아버지요. 여기서는 연기를 시켜도 모두 좀 어느 정도 돼 있으니까 안심스럽지.

“일상이 흥행도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좀 애매한 질문이 될지도 모르겠는데, 많은 사람들이 감독님은 좀더 전통 드라마에 가까운 영화를 찍는다고 생각하지만, 제 생각에 감독님은 또 어떤 새로운 차원을 염두에 두고 있는 느낌이 듭니다.

=전통 드라마라면 기승전결도 있고, 뭔가 복선도 있고, 뭐 이렇게 해가지고 농밀하게 그 스토리를 만들잖아요. 그런데 내게는 그런 극적인 게 전혀 없어요. 툭, 어느 세월을 찍고, 또 툭, 어느 세월을 찍고 하는데, 그 ‘툭’ 속에서 전부 비약하고 있는 거죠. 세월만큼. 예전의 어떤 관계가 끝까지 극적으로 유지된다든가 그런 건 없어요. 그냥 편편이 끊어서 무슨 짓을 하고 살았다, 그것만 찍는 거요. 단지 큰 맥이 있다면, 어떤 시대를 살아가면서 저놈이 저렇게 변해가고 있구나, 하는 것을 짚어내는 거죠.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지난번<취화선>을 놓고 인터뷰할 때도 제가 그런 느낌을 말씀드린 것 같은데, 병풍화의 느낌 말이죠. 그러니까 각 신들이 독자성을 갖고 아름다운데, 그것들이 한데 모여 풍기는 전체적인 느낌이 중요한. 그러니까 이야기가 이어지는 게 아니라, 사건이 가는 게 아니라 각각의 요소들이 쌓인 전체적인 덩어리로 보이게 하는….

=그래서 자칫하면 지엽적인 게 재미없어 보일 수도 있기 때문에, 거기에 굉장히 신경을 모으고 있어요. 또 자칫하면 너무 드라이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신경을 쓰고 있어요. 가령, 주인공이 김추자의 <님은 먼 곳에>를 좋아해서 늘 이 음악을 듣는 거라든가. 신중현씨가 갖는 조금 몽환적이기도 한 그런 것을 받쳐냄으로써 드라이한 느낌을 부드럽게 해가는 거죠.

-신중현씨에게 음악을 맡기셨는데, 감독님 젊은 시절에 신중현씨 음악을 좋아하신 편이었습니까.

=아주 좋아했다기보다는…. 어쨌건 김추자 노래는 내가 하도 좋아했으니까.

-신중현씨의 그때 곡도 쓰시겠지만, 새로 주문도 하셨죠.

=그렇죠. 테마는 신중현씨가 작곡하겠죠.

-음악을 맡아달라고 부탁했을 때 신중현씨가 좋아하시던가요.

=좋아하는 것 같더라고요. 그이도 나이들어서 활발한 활동을 못하고 있는데, 그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 어찌 욕심이 없겠어요.

-감독님의 최근 10여편 정도는 완결된 시나리오를 갖고 크랭크인하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 상세한 이야기만을 갖고 수정하고 새로 써나가고 하는 방식을 취하셨는데, 이렇게 얘기를 듣고 있으니 이번엔 그 작업이 좀더 힘들 것 같다는 느낌이 드네요.

=그런 느낌이에요. 이번에는 뭐인가 극적인 구성도 뭣도 아무것도 없잖아요. 때문에 편편이 당시 삶의 안에서 뭐인가 얘기를 끌어내서 그것을 충실히 찍고, 전체적으로 통일성을 주고, 이렇게 되는 영화이기 때문에 굉장히 힘이 들어요. 그런데 저거는 돼 있어요. 시놉시스는 다 돼 있다니까요. 제작비도 어느 정도 들 것이라는 것이 큰 윤곽으로는 다 드러나고 있어요. 단지 삶을 어떻게, 그러니까 일상을 어떻게 드라마틱하게 찍을 것인가 하는 부분이, 현장에 와서까지 고민이…. 그렇다고 큰 틀이 달라지는 것은 없어요. 지엽적인 에피소드나 대사들이 달라지는 거지.

-오픈세트를 만든 주병도 미술감독은, 감독님이 화사하면서 슬픈 느낌의 톤을 주문하셨다고 하는데, 감독님 말씀을 들으니까 그 느낌이 어디서 나오는지 짐작이 갑니다. 그런데 촬영에 대해서는 이번에 다르게 생각해두신 원칙이나 방식 같은 게 있나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개판으로 살지만, 앵글 자체는 뭔가 비애스런 느낌으로 잡아내보자 하는데, 이게 도시가 되니까 힘들어. 전체적인 느낌, 등장인물들이 살아가는 모습에서 비애가 우러나도록 찍어야죠.

-도시를 배경으로 하니, <춘향전>이나 <취화선> 때처럼 정서를 한번에 보여주는 롱숏을 보여주는 게 어렵겠습니다.

=그러니까, 롱숏은 이미 틀린 것 아니겠어요. 그래서 가깝게 사람을 중심으로 잡으면서 어떻게 그런 맛을 배어나오게 할지 나도 고민이요.

-<취화선>에선 유장한 롱테이크가 굉장히 강렬했었는데, 생각해보면 <취화선>은 편집의 영화였다는 생각도 듭니다. 컷 수도 굉장히 많고. 그런데 감독님 얘기 듣고 있으면 그런 면에선 <하류인생>이 컷 수가 적고, 더 느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느리지는 않을 거에요. 커트나 신간의 비약이 더 심해지는 것은 있겠죠.

-이런 상상을 해보는데, 감독님께서 지금 생각하고 있는 영화의 모습이나 느낌과 완성된 영화와 많이 달라질 수도 있을까요.

=지금까지 그런 일은 없었던 것 같아. 전체적으로는 이런 빛깔이어야 하고, 또 크게는 이야기의 틀이 이렇고, 그런 것을 벗어난 일은 한번도 없었던 것 같아. 벗어나면요, 무슨 문제가 생기나 하면, 이야기가 달라져버려요. 시작하고 끝이. 그러면 내가 하고자 했던 어떤 주제나 이런 것들이 다 무너져가는데…. 그러니까 이 시퀀스에선 에피소드 뭐뭐가 들어가 있다, 이런 것은 나와 있다니까. 그런데 그 디테일이 짚이지 않는 거죠. 스탭들도 그래서 환장하는 거죠. 그래도 어떡해, 그건 나도 모르겠는데. 현장에 와서까지 계속 모색하면서 해결되는 일들이 굉장히 많기 때문에 그래서 미치려고 하는 거예요.

-감독님도 아침에 일찍 일어나셔서 그 작업을 하셔야겠네요.

=일찍 일어났다고 특별히 되는 게 아니라니까요. 몸은 24시간을 돌아다녀도 속에서는 이렇게 암중모색하고 있는 거라구.

-사람들이 <하류인생>에 대해서 기대하는 바가 사람들마다 제각각이더라구요.

=<장군의 아들> 같은 영화가 될 줄 아는 사람도 있으니까.

-그렇게 보는 사람부터 <취화선> 못지않게 품격있는 영화가 될 거라고 보는 사람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만약 여기서 그런 격조가 빠지면 진짜 삼류영화가 돼버려요.

-감독님 말씀을 들어보면, 그런 상반된 두 가지 기대를 동시에 끌어안고 가시려는 것 같은데 그걸 어떻게….

=그러니까…. 그게 될는지는 모르겠는데, 그것을 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아주 절박한 생각을 갖고 있거든요. 만약에 그게 됐을 경우는 나는 어쨌거나 또 한 꺼풀 벗고 나가는 거예요. 이번에는 하여튼 영화가 우리 일상을 잘 들여다보면 삶을 이렇게 재미있게 끌어낼 수도 있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한번 입증해내고도 싶고, 그런 일상이 흥행도 좀 될 수 있다는 것을… 내가 욕심이 너무 많은 놈인데, 그런 것을 해보이고 싶은 거야. 그런데 괜히 욕심만 잔뜩 부리다가 실제 영화는 우습지 않은, 그런 결과를 만날지 걱정이에요, 걱정.

-몇편째 계속 시작할 때 그런 말씀을 하시는데요. (웃음)

=매번 그런 것도 사실인데, 그것은 아주 솔직한 술회였어요. 지금도 마찬가지고. 어지간하면 자신있다고 해야지. 그런데 그 말을 할 수가 없다니까.

-담배를 요즘 들어 더 많이 피우신다고 하던데.

=무지 많이 피우죠. 하루 세갑.

-아침에 일어나면 가슴이 막히고 그러시죠.

=아 그럼요. 남들은 감독이란 자가 의자에 앉아 있고 그러니까 ‘저놈이 편할 것이다’ 하는데, 사실 편하기는 뭐가….

-지금까지 찍은 분량 중에는 가장 어려운 신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여기(세트장)서 하는 ‘다찌마와리’가 어렵다고. 몇번 얻어맞아도 다시 일어나고 하는 초인적인 사람들이 영화 안에 나오곤 하는데, 난 그런 것을 피하려고 하니까. 이 친구들이 열심히 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상당히 실감나는 다찌마와리를 얻어낸 것 같아.

-오랜만에 액션장면을 찍으니까 재미있지 않으세요.

=재미는…. 늙어가지고…. 젊었을 때나 하는 짓인데, 요런 것을 많이 느끼죠. (웃음)

-촬영은 언제쯤 끝나겠습니까.

=2월 정도…. 길어지면 3월 초에 끝나겠죠.

-그렇다면 다시 칸영화제와 마주칠 수밖에 없겠네요.

=아니, 영화 꼴이 돼야 될 텐데. 그쪽에서는 벌써 재촉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아무리 기대하는 감독이라도 영화 꼴을 봐야지….

-어쨌든 건강 조심하십시오. 저희는 영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나는 자신이 없어… 자신이. 이렇게 하고는 있지만….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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