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로 불붙은 가족 테마, 올해 <맹부삼천지교> 등 줄잡아 8편 채비
가족은 일종의 금기였다. 적어도 90년대 한국영화에서 가족이 중심에 놓인 영화는 극히 드물었다. 단적인 예로 90년대 전반기를 풍미한 로맨틱코미디에서 남녀는 그들의 부모세대와 마주치지 않았다. 90년대 후반기에 등장한 신인감독들의 다양한 장르실험에서도 이런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창동, 허진호, 김지운 등 몇몇 감독이 가족을 돌아보긴 했지만 장르로서 홈드라마 또는 가족 관객을 위한 영화는 결코 주류가 된 적이 없었다. 그런 점에서 2004년 개봉할 영화 가운데 상당수가 가족을 소재로 삼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암울한 시대를 이겨낸 아버지상을 담은 <효자동 이발사>, 철없는 아버지를 그린 <아빠하고 나하고>, 뒤죽박죽인 가족관계를 그린 <귀여워>, 사라진 부모의 사랑을 찾아가는 <인어공주>, 불치병에 걸린 아버지와 어린 남매의 이야기인 <가족>, 반목하는 형제의 화해를 모색하는 <우리 형>, 9살 어린이의 시점에서 바라본 세상을 담은 <아홉살 인생>, 자식의 교육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아버지를 그린 <맹부삼천지교> 등 줄잡아 8편 이상이 새해에 관객과 만날 준비를 하고 있다. 막혔던 둑이 터지듯 가족영화가 쏟아져나오는 지금, ‘왜?’라는 질문은 당연할 것이다.
멀티플렉스는 가족영화의 토양
금방 떠올릴 수 있는 것은 2002년 <집으로…>의 성공이다. <집으로….>는 그간 주류 영화계에서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한 기획이었지만 서울관객 159만명을 동원하며 <가문의 영광>에 이어 2002년 한국영화 흥행순위 2위에 올랐다. 이 영화의 흥행에 크게 자극을 받은 쪽은 무엇보다 스타 캐스팅에 매달렸던 제작자들이다. 그들은 <집으로…>를 통해 상업영화에 대한 고정관념이 깨지는 충격을 받았다. <집으로…>는 스타는커녕 얼굴을 알 만한 배우조차 등장하지 않는 영화였고 제작자들이 믿고 있던 젊은이들의 취향과 상반된 이야기였다. 2003년 개봉한 <선생 김봉두>도 <집으로…>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이다. 비록 차승원이라는 스타를 기용하긴 했지만 <선생 김봉두>가 보여주는 화면 역시 첨단유행과 거리가 멀었다. 두 영화는 지금 관객이 잊고 있던 가치를 일깨우는 데서 호소력을 발휘했다. 고향, 시골마을, 할머니, 동심 등 주류무대가 낯선 이야기들이 보는 이의 가슴을 파고든 것이다. 2003년 추석에 개봉해 흥행작이 된 <오! 브라더스>도 가족영화 유행에 기폭제가 됐다. 스타를 기용했으며 코미디 문법에 충실한 영화인 <오! 브라더스>는 <선생 김봉두>와 더불어 <집으로…>의 예외적 흥행을 상업영화의 틀에 안착시키려는 시도였다. 반면 대조적인 방식으로 흥행에 성공한 영화도 있다. <바람난 가족>은 가족과 결혼제도에 대한 주류적 가치를 뒤집는 영화였다. 당연히 파격적인 주장이 두드러진 영화였지만 관객은 그런 도발을 신선하고 흥미로운 문제제기로 받아들였다. <집으로…> 이후 상업영화가 가족을 감싸안는 스펙트럼이 <오! 브라더스>에서 <바람난 가족>까지 펼쳐진 것은 가족영화를 준비하는 이들에게 용기를 줄 만한 일이었다.
일부에선 이런 영화의 성공 배경에 멀티플렉스의 급성장이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주거지 근처에 멀티플렉스가 속속 들어서면서 가족 단위 관객이 늘고 있다는 얘기다. 특히 <오! 브라더스>는 지난해 추석, 가족이 볼 만한 영화라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관객의 눈길을 끌었다. 관객층이 넓어져서 가족영화가 늘어난 것인지, 가족영화가 많아져서 관객층이 넓어지는 것인지는 단순한 인과관계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이런 영화들의 성공이 멀티플렉스의 확산과 관련있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단적인 예로 할리우드에서 가족영화 또는 전체관람가 영화가 양산되는 이유는 그만큼 폭넓은 관객층이 있기 때문이다.
세대적 결핍과 허기를 달랜다
또 하나 제작자들을 자극하는 것은 한동안 영화계를 풍미한 조폭코미디 유행이 잦아들고 있다는 점이다. 2003년 12월에 <해피 에로 크리스마스>를 개봉한 튜브픽처스의 황우현 대표는 “관객의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걸 체감한다”고 말한다. 특급 캐스팅이라고 할 만한 차태현, 김선아를 내세웠지만 <해피 에로 크리스마스>에 대한 선호도는 높지 않았다. 황우현 대표는 “비슷한 방식으로 웃기는 영화가 계속 이어진 탓에 또 그런 영화겠거니, 하는 인식이 형성된 것 같다”고 설명한다. 2년 전 <집으로…>를 제작해 유행을 선도했던 튜브픽처스는 올해 <귀여워>와 <가족>을 개봉할 계획이다. 위기철 원작의 <아홉살 인생>을 준비 중인 황기성사단 대표 황기성씨도 지나치게 20대를 겨냥한 영화만 나왔던 상황에서 <아홉살 인생>이 다양한 관객을 흡수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 희망한다. “한국영화가 다양성을 키우자면 남녀노소 누구나 볼 수 있는 영화가 필요하다. 스필버그의 영화는 대부분 그렇지 않나. <집으로…> 같은 영화가 흥행한 데서 알 수 있듯 관객의 요구는 있다. 그간 포기했던 관객을 껴안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장르로서 가족영화의 가능성에 의미를 두기보다 가족이 모두 볼 수 있는 영화가 필요하다는 걸 강조하는 황기성씨는 공포영화, 스릴러, 사극 등 다양한 장르를 개발하는 데 힘을 쏟았듯 다양한 연령대의 관객에게 어필할 수 있는 영화가 필요하다고 덧붙인다. 노인들이 주인공인 <고독이 몸부림칠 때> 같은 영화도 그런 면에서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지금의 가족영화 유행이 의미있는 이유는 산업적인 측면에서 관객의 저변을 확산시키는 노력이기 때문이지만 영화미학적인 측면도 간과할 수 없다. 부산영화제 프로그래머 허문영씨는 <씨네21> 381호에 실린 ‘타자와의 기꺼운 조우’라는 글에서 90년대 중반 이후 한국영화가 젊은이들의 놀이터였지만 그 세대적 폐쇄성은 윤리적 결핍이기도 하다고 지적한다. <집으로…> <오아시스> <죽어도 좋아> 등 3편의 영화를 분석한 이 글에서 그는 “세 영화의 특별한 주인공들은 텍스트상의 기능을 넘어, 그들의 실존이 한국영화의 결핍과 허기를 상기시키고 달랜다. 요컨대 한국영화는 이 영화들을 통해 자신의 타자들과 조우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썼다. 물론 새해 잇따라 개봉하는 가족영화가 이런 윤리적 결핍을 메울 작품이 될지는 알 수 없다. 몇몇 작품은 도발적인 문제제기를 포함하고 있지만 단순히 가족의 노스탤지어에 기대는 기획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집으로…>나 <바람난 가족>이 보여줬던 비주류적 모험에 비하면 개봉을 준비 중인 가족영화 중 상당수는 소재의 차이에만 매달리는 듯한 느낌이다. 그렇게 된다면 지금의 가족영화 유행은 아주 일시적인 현상에 그칠 수도 있을 것이다. 2004년의 가족영화는 <집으로…>에서 <바람난 가족>까지 스펙트럼을 넓힌 한국영화가 전진하느냐, 후퇴하느냐를 보여줄 시금석으로 보인다.
처절하고 온화하고 엉뚱한
90년대 한국영화에서 드러난 가족
90년대 한국영화에서 가족을 다루는 것은 상당한 용기와 배짱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기획영화로서 가족에 관한 영화를 만든다는 건 20대 관객을 주타깃으로 삼는 영화계에서 쉽게 용납하기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임권택 감독은 독보적인 존재다. <서편제>는 가족 멜로드라마의 어떤 경지를 보여준 작품이었고 <축제>는 <집으로…> 이전에 할머니라는 낯선 타자를 영화 안으로 끌어들였다. 한국의 근대화 과정과 가족의 해체는 임권택 감독의 다른 영화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이야기다.
90년대 후반 등장한 이창동, 허진호, 김지운 등 세 감독의 데뷔작도 가족을 다루고 있는데 그 차이가 흥미롭다. <초록물고기>의 가족이 처절하다면 〈8월의 크리스마스〉의 부자관계는 온화하며 <조용한 가족>의 가족은 엉뚱하다. 이창동 감독이 어딘가 망가진 가족관계를 그린 데 비해 허진호 감독은 가족관계의 회복을 꿈꾸는 쪽이었고 김지운 감독은 개인주의자로 이뤄진 가족을 묘사했다. 세 감독의 스타일과 세계관의 차이를 그들이 그린 가족의 모습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이들 세 감독의 영화 외에 가족에 초점을 맞춘 영화로는 장길수 감독의 <아버지>와 윤인호 감독의 <마요네즈>가 대표적이다. <아버지>가 희생하는 아버지상의 전형을 보여준 반면 <마요네즈>의 어머니는 철없는 중년여인의 모습에 초점을 맞췄다. 베스트셀러 소설이 원작인 두 영화는 결국 관객의 호응을 얻지는 못했는데 이는 TV 홈드라마와 다른 점을 부각시키지 못한 결과로 보인다. 사실 TV 홈드라마는 가족영화의 기반을 무너뜨린 장본인이다. 60년대 한국영화의 주축 가운데 하나였던 가족 멜로드라마는 TV 홈드라마의 성장과 함께 자연스레 위축됐다. 지금 가족영화 역시 TV 홈드라마와 어떻게 달라야 하는가라는 숙제를 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