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2004년 한국영화 트렌드 [4]
2004-01-09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새로운 관객이 도착했다. '고딩', 관객에서 주인공으로.

<내 사랑 싸가지> <그놈은 멋있었다> 등 인터넷 소설 8편 준비중

<내사랑 싸가지>

현재 눈앞에 닥친 딜레마. 인터넷 소설의 영화화를 준비 중인 제작자와 감독들 중 몇몇은 영화가 인터넷 소설을 원작으로 삼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수록 불편해한다. 좀더 그 사실과 절연하거나 우회하려는 반응까지도 보인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헤프닝으로 맺어진 현대판 노비관계에서 사랑이 싹트는 <내 사랑 싸가지>, 멋지고 싸움도 잘하는 남학생과 보통의 평범한 여학생의 사랑 줄다리기 <그놈은 멋있었다>, 한명의 여학생을 두고 두명의 남학생 킹카가 연적이 되어 겨루는 <늑대의 유혹>, 여대생을 좋아하는 삼수생의 사랑 고백인 <삼수생의 사랑 이야기>, 자유로운 동거생활 속에서 좀더 진실한 사랑을 만들어가는 <옥탑방 고양이>, 할 일 없는 백수와 백조의 유쾌한 사랑에 대한 <백수와 백조>, 성질 격한 악녀와 헌신적인 순종남의 사랑 <나는 악녀일 수밖에 없었다>, 한국인 여자와 외국인 남자의 로맨스를 소재로 한 <키애누리브스 꼬시기> 등 인터넷 소설을 원작으로 올해 준비 중인 영화만 대략 8편을 넘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갑작스런 양적 팽창의 분위기 속에서 혹 유행에 편승한 영화라는 인상을 주게 되지 않을까 고민하는 것이다. 비교적 먼저 개봉되는 영화는 영화의 창조력을 전적으로 인터넷 소설이라는 원작의 힘에 내주게 되지 않을까 고민하고, 뒤따라 준비 중인 영화들은 앞서 개봉된 영화가 수준 이하라는 인상을 심어주거나 흥행에 참패할 경우 인터넷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는 같은 근거에 휩싸여 거친 후폭풍에 시달리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관심을 집중시키던 공통의 소재지 ‘인터넷 소설’은 영화가 되면서 이제 서로간의 차이를 강조해야 하는 시점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인터넷 소설이라는 점이 초반에는 강점이었지만, 이제는 인터넷 소설이라는 것만으로 어필할 것 같지는 않다”는 좋은영화 김미희 대표의 지적도 이런 인식을 반영한다.

새로운 문화세대의 출현

말하자면 2004년에 찾아올 인터넷 소설 원작 영화화 붐은 올해의 전망이라는 표현보다 지난해와 그 전해의 물밑작업들이 내놓은 결과물이라고 표현되어야 더 옳을 것이다. 좀더 넓게는 인터넷 문화의 일상화가 이루어진 2000년대 이후 ‘새로운 문화세대의 출현’과 더불어 온 것이다.

<엽기적인 그녀> <동갑내기 과외하기>가 이런 흐름에 일정한 분기점이 된 것은 분명하다. 두 영화의 흥행성공은 다른 인터넷 소설에까지 관심을 갖게 하는 기폭제가 됐다. 물론 그 영화들 자체의 질적 수준이 뒷받침됐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것이 중평이지만, 인터넷 소설 자체에 대한 관객의 초반 호기심이 작동한 탓이기도 하다. 이 두 작품의 흥행 성공담 이후 ‘인터넷 소설이 상업적으로 유효하다’는 판단이 팽배해졌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상업적인 고려가 지금의 지형에서도 한축을 이루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현재로선 그 이외의 좀더 포괄적인 면에 주목하는 것이 긍정적인 해석을 낳을 수 있는 길이 될 듯싶다.

김대현 감독은 “인터넷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지는 것에 대해 하나의 편중된 방식으로만 보는 것은 옳지 않다. 인터넷 소설이란 이러이러하다라고 틀을 짓는 순간 우리는 소재의 창고를 잃어버리게 된다”고 지적한다. 이 말은 ‘소재의 창고’라는 표현을 통해 어떤 긍정적인 가능성을 시사한다. 혹은 “인터넷 소설이어서가 아니라 그 이야기 자체가 흥미로웠다”는 다른 제작자와 감독들의 목소리와도 겹친다. 그러니까 일상화된 인터넷은 아마추어리즘에 입각한 자유로운 글쓰기를 가능하게 했다. 누구나 쉽게 올릴 수 있었던 그 글들은 어떤 전통적인 틀거리를 가볍게 벗어났고, 때문에 새롭다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그것들이 인터넷 소설이라고 불린 이유는 먼저 인터넷이라는 장소를 활동 무대로 삼았기 때문이다. 또, ‘인터넷 소설’이라고 했을 때 떠오르는 엽기성, 발랄함, 과감함, 진솔함, 촌스러움 등의 특징들은 누가 이 문화를 주도했는가에 따라 결정되었다. 늘 인터넷을 사용하는 주체들이며, 동시에 창작주체의 무게를 두려워하지 않는 집단- 주로 독자이면서 창작자인 10대들- 에 의해 새로운 비약이 생겨난 것이다. 범주로서의 ‘소설’ 이전에 장소로서의 ‘인터넷’을 재고할 필요가 있는 셈이다(이 점에서 정말 급진적인 방식은 10대가 쓴 인터넷 소설을 10대가 나서서 영화로 만들거나, 말 그대로 인터넷이 보편화되어 <죽어도 좋아> 주인공들의 연령대가 인터넷 소설의 창작자로 등장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인터넷은 소재의 창고일 뿐

<늑대의 유혹>

2003년 말 <한겨레>가 마련한 대담자리에서 평론가 정성일씨는 <동갑내기 과외하기>를 되돌아보면서 “새로운 영화가 왔다기보다는 새로운 관객이 도착했구나”라고 느꼈다고 말한다. 같은 자리에서 평론가 허문영씨는 “이야기가 있을 법한 사건인가가 아니라 영화를 구성하는 갖가지 요소들이 나를 얼마나 매혹하는가 하는 양식들과의 대화”라고 지적했다. 덧붙여 정성일씨는 “<동갑내기 과외하기>의 성공에 대한 해석은 좀더 긍정적, 창조적으로 이뤄져야 하지 않을까”라고 제시한다. 여기서 <동갑내기 과외하기>를 통해 출현한 ‘양식들과 대화를 시도하는 새로운 관객’이 곧 인터넷 문화와 함께 나타난 세대들이라는 점을 각인할 필요가 있다. 이런 문화배경 속에서 생각해보면, 인터넷 소설이 영화화되고 있는 지금의 상황은 아마추어리즘으로 쓰여진 형식들이 다시금 숙련된 틀과 만나고 또 어울려야 한다는 말이 된다. 바로 이 점이 앞으로 인터넷 소설을 영화화할 때 생겨날 수 있는 차이의 양상들이 될 것이다.

몇 가지 갈림길이 예상되는데, 첫 번째는 <동갑내기 과외하기> <엽기적인 그녀>가 가졌던 장점을 강화하는 것이다. 에피소드 중심인 원작을 따라가면서 서사의 중압감에서 탈출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독특한 캐릭터를 돌출시키면서도 기승전결의 구조를 덧입혀 전통적인 영화서사의 흐름 안으로 흡수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그 서사구조가 기여할 내용 중 하나로 향수, 추억, 순수의 심리를 불러와 20, 30대의 관객에게도 어필하는 것이다. 네 번째는 기존의 영화 장르적 틀거리들, 즉 멜로드라마, 액션영화 등과의 교접을 시도하는 것이다. 이런 식의 변형들은 이제 인터넷 소설이 영화화되면서 겪어야 하는 통과의례와도 같은 절차가 될 것으로 보인다. 단, 단순히 상업적인 목적에 기능하는 방식이 아니라 동시대를 반영하는 소재로서 인터넷 소설을 가공하려는 노력들이 덧붙여져야 할 것이다. 아직까지도 인터넷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들의 홍수가 올 한해 한국영화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는 미지수다. “긍정적인 영향과 부정적인 영향 둘 다 있다”는 LJ필름 이승재 대표의 말은 다른 모든 제작사와 감독들에게도 적용될 수밖에 없다. 아마도 상품이 아니라 문화라는 것을 거듭 상기하는 것이 창조적인 방향을 잡는 데 키가 될 것이다.

극과 극, 달라야 튀지

인터넷 소설의 남녀 캐릭터들

<엽기적인 그녀>
<동갑내기 과외하기>

인터넷 소설을 영화로 각색하고 만드는 감독들은 전반적으로 기승전결이 없는 원작의 구조에 낯설었다는 말을 종종 한다. 그러나 생동감 있게 살아 있는 캐릭터들이 눈에 들어왔다는 말 역시 많이 한다. <엽기적인 그녀>가 나온 뒤 이 영화의 특징을 규정한 것은 이른바 엽기녀라 불리는 그녀의 엉뚱한 행동들이다. 뒤이은 <동갑내기 과외하기>의 수완은 다소 다른 의미에서의 엽기녀라고 할 만큼 용감하다. <내 사랑 싸가지>의 주인공은 속은 것을 알고는 복수소동을 벌일 만큼 활력적이다. 또한, <나는 악녀일 수밖에 없었다>에서의 성은은 남자친구를 애완동물 취급할 만큼 무서운 그녀이다. 하지만 이 여주인공들은 한결같이 매력 만점이다.

이와 반대로 매력없어 보이는 평범한 그녀들이 주인공으로 나설 때가 있다. 대신 이들은 주위의 시선을 한몸에 받는 ‘킹카’들에게 둘러싸인다. 그럼으로써 그 평범함이 오히려 매력으로 뒤바뀐다. <늑대의 유혹>과 <그놈은 멋있었다>의 여주인공 캐릭터가 그것이다. 남자주인공들의 캐릭터는 돈도 많고 얼굴도 잘생긴 <내 사랑 싸가지>의 경우이거나 공부도 잘하고 싸움도 잘하는 <그놈은 멋있었다>의 경우처럼 무엇이건 모자람이 없는 인물들이 우선 특징적이다. 한편으로는 상대여성 캐릭터와의 대조를 극대화하는 현실적으로 찾아보기 힘든 순진남들이 그 반대편에 있다.

무엇보다도, 대부분의 캐릭터가 ‘극단성’의 논리에 의해 창조된다는 점이 키워드이다. 그 극단의 방향이 완벽한 매력 만점의 남녀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순간에 하이틴 로맨스에서 인터넷 소설로 전이된 판타지가 작동하며, 여성 캐릭터의 평범함과 남성 캐릭터의 믿기지 않는 순수함으로 극단화될 때는 고전적인 욕망의 모습으로 소환된다. 캐릭터의 극단성으로 인한 생동감은 인터넷 소설을 특징짓는 중요한 조각이면서, 또한 영화가 매력을 느끼는 중심적인 요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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