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는 것인가. 마침내 실미도의 원혼들이 1천만명의 관객을 극장으로 불러들였다. <실미도>가 2월19일 전국에서 1003만3천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꿈의 기록’으로 여겨지던 1천만 고지를 넘어선 것이다. 투자배급사인 (주)플레너스 시네마서비스에 따르면, 2003년 12월24일 전국 300여개 스크린에서 포문을 연 지 58일째 만이다. 이는 관람 가능한 15살 이상 인구 3750만명 중 약 27%를 차지하는 수치. 하루 평균 17만3천명의 관객을 극장으로 불러들인 이 괴력의 영화가 과연 한국 영화산업의 장밋빛 미래를 예고하는 신호탄이 될 것인지에 관한 궁금증이 피어오르고 있다.
<실미도>의 이같은 흥행을 처음부터 점친 이는 많지 않았다. 강우석 감독도 “인구 대비 1천만이란 스코어란 건 바람이지. 주문처럼 한번 외워본 거다”라고 말했을 정도. 그러나 뚜껑을 여는 순간 폭발력은 기대 이상이었다. 개봉한 지 3일 만에 전국에서 71만2천여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한주 앞서 개봉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을 제압한 <실미도>는 1월31일에는 좀처럼 깨지지 않을 것 같던 <친구>(2001)의 전국관객 818만명이라는 기록마저 무너뜨렸다. 3월까지 전국 스크린 수 200여개를 유지하기로 함에 따라 최종 기록 추산은 당분간 미뤄진 상태다.
멀티플렉스 시대의 힘
편당 관객 1천만 시대의 도래가 가능했던 데는 최근 4∼5년 동안 비약적으로 늘어난 멀티플렉스의 공이 컸다. 이는 역대 흥행작들이 전국관객 100만명을 모으기까지 걸린 시간을 따져보면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쉬리>(1999)가 서울관객 100만명을 돌파한 것이 개봉 뒤 21일째. <공동경비구역 JSA>(2001)의 경우 15일로 단축됐다. 멀티플렉스 체인을 주축으로 한 와이드릴리즈 방식의 배급 또한 <실미도>가 각종 기록을 양산하는 데 한몫했다. <실미도>가 등장하기 전까지 흥행 1위를 수성했던 <친구>(2001)는 개봉 당시 전국 스크린 수가 160개. 두배에 가까운 스크린 수를 확보하며 초반 기세를 잡았던 <실미도>의 승리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록은 깨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 <실미도>에 이어 후폭풍으로 지목됐던 <태극기 휘날리며>의 기세 또한 만만치 않다. 순제작비만 147억8천만원을 쏟아부은 강제규 감독의 <태극기 휘날리며>는 <실미도>가 세워놓은 온갖 기록을 경신하며 맹렬하게 뒤쫓고 있다. 2월3일 개봉한 이 영화는 개봉 13일 만에 500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며 <실미도>가 세운 기록을 무려 6일이나 단축했다. 2월20일 현재 스크린 수만 무려 513개. 전국 스크린 수가 대략 1200여개임을 감안할 때 한편의 영화가 무려 전국 스크린의 50%에 육박하는 점유율을 보이고 있다. “자고 일어나면 기록이 바뀐다”는 한 제작자의 말이 과장이 아닌 셈. 투자배급사인 쇼박스에 따르면 관객 수 1200만명 돌파도 너끈할 것이라고 한다.
끊이지 않는 극장가 러시 행렬에 젊은 관객뿐 아닐라 중장년층 관객이 대거 가세했다는 것도 이들 영화의 특징이다. <실미도>는 금기의 소재를 끄집어낸 것이 주효했고, <태극기 휘날리며>는 스펙터클한 전쟁 안에 가족애라는 보편적인 주제를 담아낸 것이 좀처럼 극장을 들르지 않는 관객층에까지 어필했다는 평가. 이들 영화의 게시판에만 무려 1만3천여건, 2만여건의 글이 각각 실려 있을 정도로 반응이 뜨겁다. 이와 관련해 싸이더스의 노종윤 이사는 “1인당 연평균 영화 관람 횟수가 2.2회에 불과한 한국영화 시장을 감안할 때 중장년 관객까지 흡수한 영화가 두편 나왔다는 것은 이후 안정적인 시장을 구축하는 데 있어서도 큰 도움이 된다”며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다.
두편의 영화는 사회적인 이슈가 되기도 했다. 실미도 사건은 매일 저녁 뉴스의 한 꼭지를 구성했고 “실미도 사건을 은폐말라”라는 여론이 빗발치자 2월6일 국방부는 <실미도>가 소재로 삼았던 실미도 부대의 존재를 처음으로 시인했다. 이후 피해자 가족들의 신원확인 요구 또한 줄을 이었다. 열린우리당도 얼마 전 사건의 진상규명과 피해자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진상조사위원회까지 꾸린 상태다. 최근 열린 국회 대정부질문 자리에서 이창동 문화관광부 장관을 상대로 일부 국회의원들이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가 용공적인 영화라며 들고 일어선 것 또한 이미 신드롬이 되어버린 이들 영화의 상황을 말해준다.
"수익모델과 시스템 구축에 플러스 요인"
그렇다면 한국 영화산업 발전에 있어서 이들 영화들은 어떤 촉매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이에 대해 영화계는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가 일궈낸 성과에 대해서 박수를 보내는 분위기다. 명필름의 심재명 대표는 “DJ 정부 출범 이후 영화산업의 중요성이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쉬리> 이후 한국영화 콘텐츠에 대한 관객의 신뢰가 쌓여져온 당연한 결과”라며 “이후 한국영화의 수익모델이나 시스템 구축에 있어서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비판이 없진 않다. 특정 대작영화에만 자본이 쏠릴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영화인은 “시장을 감안하지 않은 무리한 기획들이 영화화될 수 있다는 우려 또한 상존한다”며 성공 뒤에 따르는 위험요소를 경계할 필요가 있다는 주문을 내놓는다.
그러나 장기적인 관점에서 이는 한국 영화산업이 도약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낙관이 더 많다. 잃는 것보다 얻을 것이 더 많다는 것. 싸이더스 노종윤 이사는 “예년처럼 단기적으로 시장이 혼란스러운 상황이 올 수도 있지만 해외시장 개척 등을 함께 고려한다면 굳이 우려할 필요까진 없다”고 말한다.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아 유 레디?> <예스터데이> 등 2002년 영화계의 재앙으로 찍혔던 블록버스터영화들의 연이은 참패에 이어 지난해에도 <튜브> <블루> <천년호> <이중간첩> 등의 대작들의 흥행성적이 좋지 않은 관계로 한동안 투자 자본이 코미디 등에만 몰렸음을 감안한다면 이번 기회가 한국형 블록버스터영화들의 숨통을 틔워줄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물론 여기에는 몇 가지 전제가 따라 붙는다. 부가 판권 및 해외 수출 등 수익 구조를 안정화할 만한 장치들을 최대한 마련하는 것은 중요하다. 씨네클릭 아시아의 서영주 대표는 “해외에서 한국영화 시장이 굉장히 크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면서 “그러나 수출가가 국내 흥행 성적과 정비례하는 것은 아닌 만큼 배급과 구매가 더욱 용이한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는 주문을 잊지 않는다. 좀더 글로벌한 소재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거나 해당 문화권의 언어로 더빙하는 등 세심한 부분까지 챙겨야 한다는 것이다. <실미도>는 일본쪽에 미니멈 개런티 300만달러에 배급권을 넘겼다.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 관계자 등을 상대로 대규모 시사를 벌였던 <태극기 휘날리며> 또한 6월 일본 개봉을 앞두고 해외 마케팅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중이다. 어쩌면 진짜 축제는 지금부터 준비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실미도>
수익 현황
(2월19일 현재)
개봉
2003년 12월24일
스크린수
220(개봉 300)
관객수
1003만3천명(295만3천명)
총제작비
110억원
순제작비
83억원
극장흥행수입(예상액)
700억2100만원(입장료 7000원으로 계산)
기타부가매출(예상액)
30억원(TV+VIDEO+DVD)+3백만달러(일본판매 3백만달러 포함)+α
*<태극기 휘날리며>
수익 현황
(2월19일 현재)
개봉
2004년 2월5일
스크린수
513(개봉 452)
관객수
543만8942(서울 157만6055)
총제작비
190억원
순제작비
147억8천만원
극장흥행수입(예상액)
380억7260만원
기타부가매출(예상액)
40억원(TV+VIDEO+DVD)+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