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관객 천만 시대 어떻게 볼 것인가 [4]
2004-02-27
글 : 남재일 (문화평론가)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 흥행 돌풍에서 읽어내는 전체주의와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실미도>가 1천만 관객 동원을 눈앞에 두고 있다. <태극기 휘날리며>의 목표도 1천만이라 한다. 1천만이면 전체 인구 4.7명당 1명, 한 가구당 한명꼴이다. 아무리 블록버스터지만 영화가 집집마다 1명씩 불러낸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취향 문화가 정착된 개인주의 사회라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온전한 개인은 저마다 복잡한 자아의 서사를 갖고 있고, 하찮은 것에도 자기 취향을 고집하는 까다로운 존재들이 아닌가. 이건 아무래도 영화 소비 취향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1천만이란 숫자는 평소에 영화를 거의 보지 않는 중장년층 남성들을 대거 동원해야 가능한 숫자다.

월드컵 때 시청 광장에 운집한 인파를 보고 외신은 놀라움을 표현했다. 축구에 대한 관심으로만 그 현상을 설명하기에는 뭔가 부족했기 때문일 게다. 관객 1천만도 한국형 블록버스터영화의 성공적인 기획으로만 설명하기에는 뭔가 허전하다. 거기에는 축구 이전에, 영화 이전에, 한국사회를 조직하고 움직이는 어떤 힘이 있다. 이 글은 그 힘들과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1. 동원체제의 상흔, 방어적 집단주의

한국 근대사의 성격을 가장 잘 압축하는 말은 국가 동원체제다. 일제 식민지 때는 국가가 하라는 게 참 많았다. 성도 바꾸라 하고 전쟁에 나가라 하기도 하고 군량미 비축한답시고 쌀 내놓으라 하기도 하고. 해방되고 6·25 전쟁 때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이데올로기라고 해봐야 배부르게 밥 먹고 사는 거밖에 없는 사람들을 좌우 사상범으로 몰아 총질을 해댔다. 국가가 국민에게 해준 건 사상에 대한 단죄밖에 없었다. 박정희 정권 때부터는 ‘채찍’ 외에 ‘당근’이 추가돼 동원의 방법이 달라졌지만 국가동원의 양상은 더욱 심각해졌다.박 정권은 노동집약적인 수출을 통한 경제성장 정책을 추진하면서 저임금 장시간 노동의 조건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국가동원 체제를 필요로 했다. 그래서, 민족주의를 내세워 경제발전이 민족발전이라는 ‘산업 민족주의’를 발명했다. 이는 두개의 하부 담론에 의해 유지됐는데, 정치적 비판을 거세하기 위해 반공주의를 특권화해서 ‘한국적 민주주의’를 정당화하는 것과 여기에 한국전 전통을 접목시켜 문화적 헤게모니를 창출하기 위해 전통을 창조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충효와 같은 유교사회의 사회조직 원리가 집중적으로 동원되면서, 강압적 통치방식은 전통적 가족주의에 뿌리박은 한국적 형태로 정당화됐다. 말하자면, 국가동원의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기 위해 가족주의와 같은 전통적 문화를 편의적으로 전유한 것이다. 이런 경향은 이탈자에 대한 처벌의 과정에 연좌제를 적용해 가족의 유대가 감시의 하부 단위 역할을 하도록 한 데서 극단적으로 나타난다.

<실미도> 안보면 왕따?

어쨌거나, 일제 때부터 지속된 국가동원은 동질적인 하나의 집단을 만들고 그 유대를 강화하면서 이탈자에 대한 가혹한 처벌을 가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독립군’에서 ‘빨갱이’, ‘용공분자’로 이어져온 이탈자에 대한 낙인은 생존의 문제와 결부됐다. 이런 상황에서 살아남으려면 국가가 지정한 집단의 경계 안에 머무르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렇게 구성되는 집단은 생산의 필요에 따라 상호부조 목적으로 자생적으로 형성되는 공동체와는 성격이 다르다. 단지 ‘빨갱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빙하기 위한 인자들로 구성된 집단은 안티테제로서만 존재한다. 즉, 아무런 실질적 유대의 계기가 없기 때문에 유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부정할 그 무엇을 필요로 한다. 말하자면, 이데올로기적인 희생양들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이런 유형의 집단에 소속된 구성원들은 이탈자로 낙인찍히지 않을까 하는 지독한 거세콤플렉스에 시달리게 되고, 그러한 불안을 집단의 승인을 위한 자아의 현시와 이탈자에 대한 가혹한 폭력을 통해 극복하고자 한다.

근대사의 동원 체제를 통한 이러한 집단 경험은 ‘방어적 집단주의’라는 형태로 내면화돼 한국사회의 행동양식을 결정하는 아비투스로 자리잡은 듯하다. 방어적 집단주의는 집단을 만드는 아무런 동기없이 맹목적으로 사람 많은 편에 남으려는 무의식적 반응을 말한다. 2004년 현재에도 방어적 집단주의의 징후들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한국사회의 무수한 ‘열풍’ 현상의 특징은 후반부로 가면서 수요가 폭증한다는 것이다. 대학입시 원서접수가 그렇고, 주식투자의 행태가 그렇고, 아파트 청약 접수가 그렇고, 휴대폰과 인터넷의 보급과정이 그렇고, 성형 열풍, 명품 열풍, 다이어트 열풍 등 각종 사회현상이 그렇고, 이효리의 인기가 그렇고, 선거철의 여론 형성과정이 그렇다. 이런 집단적 동조 현상은 일반적으로 획일화된 전체주의 사회에서 그 가속의 정도가 폭증한다.

취향보다 다수를 따르는 불안 심리

한국사회의 집단 동조 과정은 처음에는 ‘눈치작전’을 통해 소강상태를 보이다가 어느 한순간부터 폭증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 시점은 ‘결정적 다수’가 형성되는 시점이다. 결정적 다수는 인터넷과 휴대폰 같은 뉴미디어 보급 과정에서 처음에는 부진한 상태를 보이다가 급속히 확산되는 순간을 유발하는 숫자를 말한다. 뉴미디어에서 이런 현상은 상호 의존 관계 때문에 불가피하다. 하지만, 독자적인 생각과 취향에 따를 법한 정치적 의사결정이나 문화 소비에서도 한국은 결정적 다수의 후반 파급효과가 유난히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한국의 모든 열풍의 외곽에는 자신의 생각이나 취향과 무관하게 단지 다수의 집단에서 이탈하는 불안 때문에 가담하는 방어적 집단주의의 동인이 있다는 걸 말한다. 방어적 집단주의의 아비투스 속에서 “<실미도> 봤어?”라는 질문은 ‘<실미도> 안 보면 간첩’이라는 울림을 갖는다. 질문을 받는 사람에게 봐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관객 1천만 고지를 점령하는 전략의 가장 외곽에는 방어적 집단주의의 야포지원이 있었다.

2. 산업민족주의에서 문화민족주의로

관객 1천만 고지를 점령하는 데 방어적 집단주의가 뒤에서 밀어주는 힘이었다면 문화민족주의는 앞에서 끌어주는 힘으로 작용한 것처럼 보인다. 문화민족주의는 박 정권 시절의 산업민족주의 담론의 현재적 버전이다. 산업발전이 민족발전이라는 논리는 문화의 시대를 맞아 문화산업의 발전이 산업의 발전이라는 논리로 치환된다. 그리고, 그 발전의 표식은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성공으로 상징된다. 세계시장의 할리우드 독점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한국이 만든 블록버스터가 수출해서 세계시장에서 통한다면, 그건 올림픽 10위와는 비교가 안 되는 국가적 쾌거가 된다. 박찬호와 박세리에 열광하던 한국은 이제 스포츠를 통한 도전 욕구 자체에 시들해진 듯하다. 국가의 역량이 궁극적으로는 내국민의 삶의 질을 통해 나온다는 인식은 문화의 영역으로 한국의 도전욕구를 전환시킨 듯하다.

새로운 민족주의 - 우리도 할리우드만큼 한다

영화는 그 대표선수로 발탁돼온 국민적 기대 속에 있다. 한국형 블록버스터에는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구호가 “우리도 할리우드처럼 만들 수 있다”고 수정돼 덧붙여져 있다. 언론도 블록버스터들에 대해서는 영화적 평가보다 산업적 성과를 더 강조하고 있다. 일반 관객 입장에서도 할리우드에 도전하는 영화를 만들었다는데, 그거 한번 봐주면 얼마나 보람된 일인가. 국제통화기금(IMF) 때 금붙이를 모으는 데 줄을 선 국민들이 아닌가. 그러니, 한국형 블록버스터를 감싸고 도는 문화민족주의의 기류는 관객 1천만 고지를 정복하는 데 기갑부대의 역할을 톡톡히 한 셈이다.

그리고, 이 기갑부대에 길을 터준 일등 공신은 문화소비의 욕구증가와 취향의 부재 사이에 펑 뚫린 고속도로이다. 요즘은 룸살롱 접대가 줄고 공연 티켓이 인기다. 볼쇼이 발레가 들어오면 효도관광 차원에서라도 그 표가 팔리기 시작한 것이 90년대 중반 무렵이다. 뮤지컬이 만들어지고, 각종 공연이 늘어난 것도 이 무렵이다.

말하자면, 이때부터 문화소비에 대한 욕구는 폭증했다. 하지만, 계급적 취향의 한 항목으로 갑작스레 늘어난 문화 소비는 문화를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를 소비하는 행태로 나타났다. 취향과 관계없는 티내기는 공연표의 가격이 결정적 수요계기가 되게 마련이다. 영화 소비에서도 취향 문화가 자리잡기 전에는, 즉 감독이나 장르가 관람의 계기가 아닌 상황에서는 영화에 투자된 자본과 배우의 얼굴이 주요한 이용 동기로 작용한다. 한국형 블록버스터는 문화소비에 대한 막연한 욕구와 취향이 부재한 부동표를 흡수하는 요소를 골고루 갖추고 있다. 관객 1천만은 이렇게 외부적인 지원을 바탕으로 돌격선 앞에까지 나아갈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 돌격선에서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가 조준한 탄착점은 어디일까? 가장 많은 관객을 울릴 수 있다고 생각한 집단적 감정의 구조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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