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부재하는 아버지에 대한 애증의 그림자
<공동경비구역 JSA>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는 모두 분단이라는 한국 근대사의 가장 큰 상처를 배경으로 한다. 그리고, <실미도>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고, <태극기 휘날리며>는 6·25 전쟁의 실제 상황을 시간순으로 따라가며 이야기를 병치시켜놓았다. 이러한 설정, 즉, ‘역사적 사실’에 대한 환기는 두 가지 경로를 통해 흥행요인으로 작용하는 듯하다.
첫째는 한국사회의 가장 깊은 상처의 원인이자 가장 집요한 욕망의 대상인 정치라는 범주에 대한 호명이다. 근대사에서 한국인의 삶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정치다. 정치는 언제나 생존의 문제와 결부된 형태로 나타났고, 정치에 대한 주목은 상어수족관에 갇힌 망둥어의 경계태세와 같은 것이었다. 난폭한 정치를 미워할 수 있어도 잊을 수는 없는 상황. 거기서 정치에 대한 집요한 애착이 발생한다. 삶을 바꾸기 위해 정치를 바꾸어보려는 열망과 좌절의 순환은 정치에 대한 애증이 구조화되는 과정이었으며, 그러한 흔적은 지금도 선명하다. 한국 사람처럼 걸핏하면 정치인을 욕해대면서도 막상 정치권력 앞에 서면 고양이 앞에 쥐가 되는 국민도 드물다. 정치권력은 한국인의 집단 무의식 속에 가장 확실한 현실적 힘의 상징으로 욕망되었고, 늘 억압하는 힘으로 증오됐다. 그 사이에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 억압하지 않는 제대로 된 정치에 대한 열망은 집단적 기원과도 같은 것이다. 그리하여, 역사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것은 이 집단적 기원에 대한 개인의 의무감을 다하는 것으로 다가간다. 이는 역사적 사실을 강조하는 영화를 관람하는 그 행위 자체에 교양주의의 가치를 부여하는 뿌리가 된다.
역사적 사실이 흥행코드로 돌변하는 이유
이런 구도는 한국 가족사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일제 때부터 한국의 아버지들은 집 밖에 나가 있었다. 전장이거나 산업현장이거나 아버지는 멀리 떠나 있고 집에는 아버지의 자리만 존재했다. 비어 있는 아버지의 자리에는 아버지보다 더한 아버지의 관념이 지배했다. 한국 남성의 성장사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아들은 아버지의 관념을 추구하며 실제로는 어머니의 관계 속에 길들여진다. 그는 아버지의 역할이 어떤 것인지 보지 못한 상태에서 아버지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더 강박적으로 아버지의 법칙을 추구한다. 거세되지 않기 위해 거듭거듭 아버지의 자리를 확인하는 과정은 권위를 통한 억압자로서의 역할을 연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아버지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이 연기를 중단할 수 없다. 그는 피곤하다. 부재했던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아버지의 자리를 지켜야 하는 강박 사이의 피로는 어머니로 퇴행해서만 휴식을 취할 수 있다. 그에게 아버지는 상처이자 욕망이고, 어머니는 요람이자 무덤이다. <실미도>의 설경구는 이 구도가 찍어낸 너무나 전형적인 인물이다.
한국 남성은 어떻게 ‘아버지’의 역할을 연기하는가
소년의 육체로 아버지의 관념을 지고 사는 고단한 소년 가장은 이 캐릭터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거기에는 아버지에 대한 적의가 있고, 아버지가 되기 위한 의지가 있고,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에게 고해하고픈 자기 연민이 있다. 이는 훌륭한 아버지가 되기 위해 이 세상의 나쁜 아버지들과 싸우다 전사함으로써 모든 어머니에게 고해하고자 하는 남성 판타지의 전형적 캐릭터다. 이 구도를 아주 직설적으로 한국 근대사와 맞물려 가족관계 안에서 구성해놓은 캐릭터가 설경구다. 말하자면, 설경구는 보편적인 남성 판타지와 한국의 역사와 가족 구도 속에서 형성된 한국 남성적 욕망의 지형을 절묘하게 포개놓은 캐릭터이다. <태극기 휘날리며>의 장동건은 여기서 나쁜 아버지의 존재를 전쟁을 일으킨 국가로 일반화해놓고 어머니와의 관계 속에 동생을 매개했지만 크게 다를 바 없다. 말하자면 조금 완곡하게 설정된 설경구이지 그 캐릭터의 심리적 구조는 동일하다. 나쁜 아버지의 존재를 내세우지 않고 헌신하는 형의 존재를 부각한 것은 아버지에 대한 부정이라는 감정적 부담없이 설경구와 동일한 감정구조를 건드리는 완곡어법이다. 미국 블록버스터가 SF나 성공담으로 미래의 환상에 호소하는 반면 한국은 과거의 상흔에 호소한다. 그건 상처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위안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4. 그래서, 리얼리즘은 없고 휴머니즘만?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는 처음부터 이 상처를 건드리는 데 전적으로 조준돼 있다. <실미도>에서 설경구의 어머니 사진은 지속적으로 등장하면서 감정을 건드리는 중요한 소재로 등장한다. <태극기 휘날리며>도 장동건과 원빈의 형제관계를 감정적으로 고조시키기 위해 거의 융단폭격을 가하는 수준이다. 문제는 이들 영화가 관객의 감정고조를 위해 쓰는 전략이다. 두 영화는 모두 남북 이데올로기 대치 상황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기계적인 중립을 지킨다. <실미도>는 초반부에 북한 124부대의 침투장면과 이에 대응한 684부대의 창설과정을 교차편집을 통해 보여줌으로써 이런 입장을 분명히 한다. <태극기 휘날리며>도 이야기 전개를 국군의 후퇴와 북진, 미군 개입과 중공군 개입, 국군의 폭력과 인민군의 폭력 등 정치적 뉘상스를 갖는 대목에서 철저하게 균형을 맞추고 있다. 이는, 이데올로기 문제는 논외로 하겠다는 일종의 선언이다. 이 바탕 위에서 국가와 개인의 관계는 나쁜 가해자와 선량한 피해자의 선악구도로 선명하게 대비된다. 그리하여,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피해자에 감정이입이 된 관객에게 국가는 비인간적이지만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폭력으로 추상화된다. 이건 국가가 정치의 논의장 밖으로 물러나게 됨을 의미한다. 이런 구도가 정치에 대한 혐오와 애착이라는 한국의 집단적 감정구조와 맞물리면 어떤 정치적 효과를 낳을지 상상해보라.
집단 컴플렉스를 정조준한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
분단 이데올로기에 대한 중립적 입장은 과거의 반공영화에 비하면 발전이다. 또, <실미도>에 적기가가 삽입됐다는 이유로 감독을 국가보안법으로 피소한 단체의 시각으로는 정치성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남북관계를 감안하면 그런 관점은 평균적인 국민 정서를 반영한 것인데 거기에 무슨 정치성이 있을까? 2004년 한국에서 이들 영화가 갖는 정치성은 분단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이들 영화에 간접적 형태로 내장된 하부담론들을 중심으로 얘기돼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내가 관심있는 부분은 도덕적인 국가라 하더라도 국가주의가 지금 이 시점에 던지는 의미가 무얼까 하는 점이다. 국가주의의 대립되는 개념은 개인주의이고, 개인주의는 국가권력을 국가와 동일시하지 않는다. 국가권력은 국가를 운영하기 위해 가동하는 도구적 존재이고, 그 주인은 개인으로 구성된 시민들이다. 그래서, 개인주의는 국가권력의 전횡을 예방하기 위해 시민사회를 강조하며, 국가는 그 두축에 의해 움직인다. 한국사회는 오랫동안 국가권력이 국가를 독점해왔고, 최근에 들어서야 시민사회가 정치에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이 시점에서 국가에 대한 균형잡힌 시각은 개인주의를 강조하는 방향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서, 행여 한국 블록버스터가 결과할지 모르는 도덕적인 국가주의는 당대적 유효성이 극히 미약한 보수 논리로 귀착되기 쉽다.
한뼘의 진보를 얻은 댓가로 맞게 되는 파편들
여성들이 보면 한국 블록버스터들은 더 많은 정치적 문제를 갖고 있을 듯하다. 하나같이 남성들의 얘기이며, 그것도 군인과 깡패들 얘기가 많다. 어떤 메시지를 의도했던 이런 영화들이 플롯상에 들이미는 병정놀이와 무협장면은 군대를 체험하면서 군사주의의 미학을 은영중에 내면화한 한국 남성들의 폭력적 욕망을 자극한다. <실미도>에서 684부대원들이 군대에서 훈련받는 과정은 비인간적이면서도 뭔가 비장하고 장엄해 보였다. 확실히 이 영화에는 무(武)에 대한 호감과 문(文)에 대한 야유가 진하게 묻어 있다. 가장 난폭하게 굴던 조교인 허준호는 훈련병들을 사살하라는 명령을 거역하고 가장 인간적인 의리를 보여준다. 평소 냉혹했던 안성기도 여기에 속한다. 이들은 무인이다. 그러나, 평소 탐구적인 자세와 온정적인 태도를 보이던 000????은 자신의 이해관계가 걸리자 가장 비열한 모습으로 표변한다. 이는 지식인의 이중적 태도에 대한 신랄한 풍자이다. 아무런 대항 능력도 없이 무기력하게 강간당하는 여자의 직업이 선생이라는 것도 나는 그 연장선상에서 보였다. 무의 미학은 종종 그 열등한 형태인 군사주의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나르시시즘의 기제로 작용한다. 의도야 아니겠지만, 멋있는 무인을 그리다 보니 끌어들인 이런 파편들이 유탄으로 관객의 가슴 한 귀퉁이에 박힐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영화가 탈냉전이데올로기라는 거대서사에서 보여주는 한뼘의 진보보다, 그걸 보여주는 과정에서 사방으로 돌출되는 미시적 파편들이 더한 의미작용을 하지 않을까? 2004년 한국의 블록버스터는 리얼리즘의 그늘 아래 위험한 휴머니즘만 꿈틀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