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배우 문소리, <송환>의 김동원 감독에게 묻다 [3]
2004-03-12
사진 : 정진환
정리 : 이성욱 (<팝툰> 편집장)
정리 : 이영진

장기수 주변으로 90년대 한국인의 단면을 펼치다

<송환>에 등장하는 장기수 선생의 주변 인물들은 몇 가지 갈래로 나뉜다. 장기수 선생의 존재로부터 어떤 정화를 받으려는 386세대처럼 그들의 존재에 대해 막연한 존경과 연대감을 품고 있는 이들이 있고, 다른 한편에선 그들을 돕고자 하나 철저히 자기중심적 방법으로 접근하는 이들이 있다(<송환>에선 반신불수의 류한옥 선생을 보호하고 있는 꽃마을이 그를 ‘가둬놓는다’는 인상으로 묘사된다. 오웅진 신부는 성경의 잠언을 읽게 해달라는 류 선생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관계를 맺고 있으나 그 관계를 애써 부정하려는 장기수 선생의 가족과 친인척의 피해의식이 비중있게 등장한다. 김선명 선생의 누이동생은 어머니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끝내 알려주지 않는다. 또 장기수 선생들과 작은 충돌을 빚는 납북자 가족들. 이런 다양한 인물과 사건이 ‘90년대 한국인의 단면’을 다채롭게 펼쳐간다.

김동원 | 소리씨는 이전에 정보들이 있었던 편 아닌가? 학교 다닐 때 선생님들을 한번이라도 만났다거나 아니면 이야기를 들었다거나.

문소리 | 그렇진 않아요.

김동원 | 비전향 장기수 문제가 세상에 알려지고 내가 관심을 갖게 되고 많이 배울 수 있었던 과정에는 서준식씨의 몫이 컸어. 서준식씨가 전향공작의 실체에 대해서 폭로를 했었는데 감옥에서 30∼40년씩 있는 분들이 있다, 또 그런 분들이 많다는 것을 이야기했거든. 그리고 왜 그 사람들이 중요한가 하는 것도. 서준식씨한테 그들이 중요했던 이유는 감옥 안에서 만났는데 자기 정체성을 깨우쳐줬다는 거야. 일제 때 항일운동한 사람도 있었고, 동학운동한 사람도 있었는데, 자기가 그 운동의 역사 위에 위치지워지는구나 하는 걸 알게 되면서 힘을 얻었다는 이야기지. 나도 그런 의미에서 꽁무니쯤 있지 않나 생각하게 돼. 모든 사람이 그렇지. 알든 모르든 역사 한가운데 있는 것이고 분단현실이라든지 민족의 비극의 한 부분의 역할을 하고 있는데 요즘 젊은 세대에게 그런 이야기하면 씨알이 안 먹히잖아. <송환>을 만들면서 나한테 최소한의 목적이 있다면 통일이라는 단어를 가능한 사용하지 않고 통일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문소리 | 카메라를 든 사람이 어떤 감정이냐에 따라 분위기나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잖아요. 그런데 <송환>은 비전향 장기수 선생들을 만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아요.

김동원 | 내가 원래 좀 밋밋해서 그런가? (웃음) 사실 난 카메라를 상당히 휘두르는 편이야. <상계동 올림픽>만 하더라도 그렇잖아. 싸우는 거 찍다보니까 그렇게 된 거지. 근데 이번에는 좀 정적이지. 휘둘렀다면 이 작품 톤하고는 안 맞았을 거야. 나도 과정에는 굴곡이 있었겠지만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는 느낌이 들어. 할아버지들의 생각에 동조를 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그분들이 좋다, 뭐 이게 처음 카메라를 들게 한 이유잖아. 끝도 다르지 않지. 다만 남한이 더 낫다는 게 아니라 북은 북이고, 남은 남인데 그냥 서로 다르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는 인식을 얻었지.

문소리 | 북한에서 찍었던 선전용 영상이 나오면서 감독님께서 내레이션으로 비전향 장기수 분들이 멋쩍어하셨을 것 같다, 라고 하셨는데. 그게 그런 감독님의 생각을 잘 표현한 것 아닌가 싶어요.

살아 있는, 그래서 더욱 고통스러운 ‘유령’들

비전향 장기수,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살아 있는, 그래서 더욱 고통스러운 ‘유령’들이었다. 1988년 5월 비전향 좌익수로는 처음으로 17년 동안의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서준식(현 인권운동사랑방 대표)씨의 전언이 있기 전까지 100명이 넘는 30년 이상 비전향 장기수가 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일제시대보다 더한 고문과 비인도적인 처사가 감옥에서 비일비재하게 이뤄졌지만, 정부는 죄책감을 가질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들은 ‘자유대한’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빨갱이 간첩’에 불과했기에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일제시대의 더러운 유산이기도 한 ‘국가기관의 폭력과 강압에 의한 강제전향’은, 아이러니하게도 남북이 잠시 해빙기에 접어든 1972년 7·4 남북공동선언 직후부터 체계적으로, 조직적으로 이뤄졌다. “옥중의 장기수들은 남북 화해의 분위기에 감동했으며 석방과 송환의 희망을 품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엄청난 고통의 시작이었다.”(<송환> 중에서) ‘체제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해’ 박정희 정권은 교도소에 있는 모든 좌익수들을 없애기로 했다. 그러나 다름을 허용하지 않는 군사정부가 아무런 덫을 준비하지 않을 리 없었다. 강제전향과 사회안전법은 그렇게 등장한다. 1973년 6월 대전, 광주, 전주, 대구 등지의 교도소에는 사상전향공작반이 만들어졌고, ‘재범의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이미 형기를 마친 이들까지 감호소에 집어넣는다. 적갈색 수인번호를 달고 0.75평에 불과한 독방에서 이들은 기약없는 끔찍한 수형생활을 감내해야 했다. 30년 이상 장기수라는 딱지를 이마에 붙이고 살아야 했던 이들은 대개 남파간첩 공작원 출신.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 평택 이남의 좌익 재감자들은 모두 처리되었고”, “1989년 사회안전법 폐지로 (한국전쟁 중의) 유격대 출신들은 모두 출소하였기 때문”이다.

이들에 대한 강제전향이 유례없이 폭력적으로 진행된 데는 “남로당의 군사부 핵심 간부였다가 군내에 침투한 공산주의자들의 명단을 넘겨주고 살아남은 박정희의 콤플렉스가 작용했을 것”이라고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는 말한다(<대한민국사>). 남북정상회담 직후 전격적으로 비전향 장기수 63명이 북으로 돌아간 이후, 한때 강압에 못이겨 손을 내줬던 이들 또한 전향무효 선언을 하고 2차송환 운동을 준비하고 있다.

장소협찬 아트선재센터(MixMax 2004. 2. 21∼5. 2)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