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배우 문소리, <송환>의 김동원 감독에게 묻다 [5]
2004-03-12
사진 : 정진환
정리 : 이성욱 (<팝툰> 편집장)
정리 : 이영진

송환, 장기수 스스로를 들여다보아야 할 시간

김 감독은 송환 뒤 북한에서 새 삶을 살고 있는 선생들의 모습을 직접 카메라에 담아 작품을 마무리하려고 했다. 평양행 티켓을 손에 쥔 적까지 있으나 끝내 이 희망은 이뤄지지 않았고 지인을 통해 간접적으로 성사됐다. 찍어온 화면과 자료 사진을 통해 선생들의 지금을 바라보며 김 감독은 이런 내레이션을 한다. “그들 앞엔 여전히 끝이 보이지 않는 혁명과 투쟁의 길이 놓여 있다. 어쩌면 남한에서보다 더 힘들게 그 길을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 긴장감을 주던 투쟁의 대상이 눈앞에 없고 이젠 스스로의 문제를 들여다보아야 할 시간이기 때문이다”라고. ‘강성대국’을 읊조리던 선생들이 감독의 이같은 말에 얼마나 동의할까? “다는 아니겠지만 깊이 생각한 몇몇 분들은 하실 거다. 선생들이 하실 것 다했으니 이제 쉬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여기서 멈추면 안 된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던 것 같다. (선전용 사진을) 딱 찍으라고 포즈를 취하고 있잖아. 행복하고 당당해뵈는 모습 같고 어쩐지 씁쓸해 보이기도 하고. 저쪽 뒤에 보면 무표정한 선생들도 계시고. 그 안에 많은 표정이 있다고. 내레이션이 과도한 주문인 것 같긴 하지만 그분들이 가셨으니까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었던 것 같아. 미국의 위협으로 모든 것을 합리화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지.”

‘송환 프로젝트’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송환>의 많은 ‘주인공’들 가운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팬클럽 조성 움직임까지 만들어낸 이가 김영식 선생이다. 그는 강제로 전향당해 출소한 뒤 사기까지 당해가며 어려운 생활을 이어가고 있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순박해 보이는” 성품을 잃지 않고 살고 있다. 강제 전향은 그에게 조 선생 같은 동료들과 북으로 가는 길을 막았다. 지금 그는 같은 처지의 동료들과 전향무효선언을 하고 2차 송환운동을 벌이고 있다. 김 감독은 “<송환>의 조연출이었던 공은주 감독이 이분들을 촬영하고 있다. 2차 송환에 관한 작품일지 아니면 휴먼드라마가 될지 아직 모르겠으나 제작은 계속될 것”이라고 했다.

<송환> 대표 배우(?) 4인을 소개합니다

김석형(1914∼) “태극기 위에 성조기가 나부끼고 있다.” “북한을 올바로 알아야 한다.” 출소 뒤 첫 대면 자리에서도 서슴없이 의견을 피력해 봉천동 주민들을 다소 당황하게 만듦. 김동원 감독은 ‘학식이 풍부하고 말솜씨가 좋았지만 지나치게 계몽적이었다’고 말함. 조선공산당 박천군 덕안면당 제1대 면당 책임비서 등을 맡은 간부급 당원으로, 1961년 6월 ‘남한의 지식인들을 포섭하고자’ 내려왔다 체포됨. 1991년 12월24일 형집행정지로 출소할 때까지 30년6개월 수감. 만주 신경신무학교에 다닐 적에 일본이 세운 만주 길림군관학교에 다니던 ‘키 작고 광대뼈 불거진’ 다카기 마사오(박정희의 일본 이름)를 만난 적 있음. 그로부터 30년 뒤, 결국 박정희 군사정부에 의해 ‘피오줌을 쌀 정도로’ 전기고문을 당함.

조창손(1929∼) <송환>의 주인공이라 해도 무방하다. 감독이 별 거리낌없이 ‘할아버지’라 부를 수 있었던 유일한 인물. 송환된 뒤 인편에 ‘(감독을) 아들처럼 여겼다’는 말을 전해 듣고서 감독은 지지부진한 편집작업에 박차를 가하기도 했다. 황해도 빈농 집안에서 태어나 1962년 진태윤 등과 함께 연락선을 타고 경북 울진에 닿았으나 예상치 못한 총격을 받고서 인근 산으로 도주했다. 굶주림 끝에 “부탁을 하게 되면 동정해서 밥을 줄 줄 알고” 마을에 내려왔다가 사람들에게 잡혀 무기형을 언도받고 29년8개월 동안 수감됐다. “동료의 빨래까지도 맡아줄 정도로”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무던한 성격으로, “새벽 4시면 동네를 쓰는 바람에” 봉천동 주민들의 일을 본의 아니게 뺏기도.

김영식(1934~) 조창손씨와 함께 남파된 연락선의 무전수. ‘떡봉’이라는 완장을 찬 깡패들의 몽둥이 찜질을 견뎌냈지만 정작 물고문을 견디지 못해 전향했다. 끔찍했던 옥살이를 기억하면서 “난 이 지구상의 어머니들에게 정말 호소하고 싶은 건 아들을 낳으려거든 나이팅게일 같은 그런 (착한) 사람을 낳았음 좋겠다”고 말하는 그를 김동원 감독은 “이보다 더 순박한 얼굴을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평한다. 출소 뒤에 두번씩이나 사기를 당하기도 했지만 어려운 살림일지라도 여전히 남에게 나눠주는 재미가 세상에서 가장 큰 재미라고 여기는 그는 강제전향 조치에 대한 무효 선언 이후 2차 송환 운동을 추진하고 있다. 먼저 영화를 본 이들이 팬클럽을 결성할 정도로 매력적인 인물. <송환>에 이어 현재 그를 중심으로 한 촬영이 공은주 감독에 의해 진행되고 있다.

안학섭(1930~) “취로사업 나가서 다른 사람은 꾀부려도 나는 해요. 내가 더한 만큼 다른 사람이 편해지니까.” 송환을 앞두고 결혼식을 올려 동료들의 애정 어린 질시와 함께 적지 않은 갈등을 겪었던 안씨는 깐깐한 성격의 소유자로 감독의 애를 여러 번 태웠다. <송환> 시사회 때 안씨를 소개했는데, “영화 속의 안학섭은 내가 아니라”며 혼자서 일어서기를 거부한 것이 일례. 조연출에게는 <송환>에 관한 불만을 털어놓으면서도 감독이 확인하려 들면 “내가 어제 약주가 과해 실수로 그런 것 같다”며 말을 바꾸는 것도 그렇다. 부인에게 육포를 직접 만들어줄 정도로 자상한 남편인 그는 화날 때는 감독에게 속을 슬쩍 내보이기도 한다고. 푸른영상과 오랫동안 관계를 돈독히 해온 그는 <송환>의 이후 이야기가 촬영된다면 김영식씨와 함께 치열하게 주연 경쟁을 벌일 인물이다.

장소협찬 아트선재센터(MixMax 2004. 2. 21∼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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