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사의 미세한 굴곡과 역설, 그리고 유머
‘절제했다’는 표현은 틀리지 않는다. 애초 김 감독이 작품의 중심에 놓으려 했던 건 조창손 선생이 아니라 김석형 선생이었다. 촬영을 해가면서 고위급 간부 출신에 사명감과 사상이 아주 투철한 김 선생보다는 조 선생에게 화자의 시선이 옮겨갔다. 편집단계에서 ‘주인공’은 완전히 조 선생으로 교체됐고, 인터뷰와 촬영을 통해 두 선생 사이의 괴리감이나 모순이 자연스레 포착됐으나 작품에서 모두 빠졌다. 예컨대 빨래와 청소, 설거지 등은 온전히 조 선생의 몫으로 돌아가면서 생기는 작은 갈등들, 김 선생에게 가졌던 동네 사람들의 경계심 등. 역시 외부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김선명 선생의 연애 이야기가 있다. 이 연애는 자못 심각해서 송환문제와 얽혀 복잡한 상황을 연출하기도 했다. 그 속내를 속속들이 알지만 김 감독은 이를 작품에 넣지 않았다. 김 감독은 “카메라는 왜곡이나 미화는 피할 수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선생들이 예쁜 척하거나 잘난 척하는 거는 다 뺐다고. (미화를) 최소화하려고, 그래서 담담하려고 노력했어. 선생들이 드러내기 싫어했던 안학섭 선생 결혼식 장면도 그래서 넣었지. 이건 촬영이나 편집 때 굉장히 부담이 컸다고. 가장 큰 건 선생들을 완전한 존재가 아닌 보통 사람처럼 그리고 싶었지. 많이 찍어놔서 그게 가능했을지도 몰라.”
문소리 | (그 연애담은) 극영화로 만들어도 재밌을 건데. 그걸 처음 알고서 어떤 느낌이 드셨어요?
김동원 | 우리 주변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들이 장기수 선생들한테도 일어난다는 거야. 우리랑 다를 게 없지. 다만 정치적 입장에서 그런 사견들은 해소된다는 게 차이점이랄까. 그런 점에서 그분들의 연애 감정 혹은 사랑이라는 것은 착각이기 쉽고, 그래서 비극이라고 봐.
문소리 | 보고나서 잠을 거의 못 잤어요. 나한테 그렇게 지키고 싶은 가치관, 신념, 세계관이 있나, 없나. 난 어떤 양심을 갖고서 살아가고 있나. 어쩌면 은밀히 다가오는 삶의 전향 공작들에 대해 난 기존에 갖고 있고, 믿고 있던 신념을 배반하는 일은 없었던가. 지금까지 겪었던 모든 것들이 새롭게 다시 떠오르더라구요.
김동원 | 상계동에 들어가면서 난 결단을 한번 한 적이 있어. 그리고 이후에는 그때의 가치를 인생관으로 삼겠다고 마음먹었지. 그 결심 자체가 내 인생에서 중요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결심만으로 내 모든 나머지 생활이 보장되는 것은 또 아니잖아. 그러다보니 매순간 나도 혼돈에 빠진다고. 막 흔들리고 또 지기도 하고. 그래도 난 다시 일어나고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면 행복한 거야. 할아버지들도 분명히 흔들린 적이 있지. <선택>의 김선명씨처럼 화장실에서 몰래 빵을 먹는 순간들이 왜 없었겠어. 80년대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겐 그런 게 있어. <송환>에 나오는 조선일보 기자처럼 부정하지만 않고 그때의 가치가 옳았다고 인정하는 건 중요하다고 봐. 내 지금 위치가 그렇진 못하더라도 말이지.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나도 70∼80살 됐을 때 ‘사랑도 명예도…’를 부를 수 있다면 행복할 거야.
문소리 | <송환>에서 감독님 스스로의 목소리를 많이 들을 수 있다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북한의 식량난을 다루는 방식도 그렇고. 그게 이 영화의 차별적인 정서이고 힘인 것 같더라구요.
김동원 | 객관적 내레이션을 썼으면 재미가 굉장히 없어졌을 것 같아. 그런 객관적인, 시사적인 사실을 다룰수록 내가 깊숙이 개입하고 내 관점에서 이야기하고 그러려고 노력을 좀 했어. 예를 들어 6·15 남북정상회담에서 그냥 김대중 대통령하고 김정일 국방위원장하고 만났다, 그것만으론 재미없잖아.
문소리 | 월드컵하고 같이 나오는 장면 말이죠?
김동원 | 마침 그 장면 편집할 때가 2003년 6월쯤이었어. 월드컵 1주년이라고 언론에서 너무너무 요란법석을 떠는 거야. 경기를 다 재방송하고. 그런데 2년 전의 남북공동선언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더라고. 그거 보면서 배알이 좀 꼴렸어. 식량난 문제도 직접 언급하기보다 일본인 저널리스트 이시마루 사건이 있어서 그걸 활용했고.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일수록 나의 시선으로 특별하게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문소리 | <송환> 보기 전에 제가 예상했던 영화는 <선택> 같은 분위기였나봐요. 그런데 비전향 장기수뿐만 아니라 주변에 대한 이야기, 그러니까 어쭙잖게 운동했던 분들, 종교단체들, 비전향 장기수들의 가족들, 납북자 가족들, 봉천동 아주머니들 또 TV토론에 나와서 이야기하는 사람들, 또 <조선일보> 기자 등등. 그분들과 연결되어 있는 주변의 관계들이 드러나더라구요. 그러면서 나 또한 혹시 저분들을 단선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아닌가 싶었죠. 또 그분들 입장 중에 어떤 것이 옳은 것인가 자문하게 되고. <선택>도 비전향 장기수 선생들의 내면의 고통을 이야기하지만 <송환>은 다양한 등장인물의 시선이 존재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김동원 | 우리 현대사가 낳은 여러 군상이 등장하지.
문소리 | 그게 부딪치면서 되게 유머러스 해지더라구요. 어떤 분들 같은 경우는 저렇게 황당한 이야기를 할 수도 있나 싶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