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 |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제76회 오스카 시상식이 열리고 있는 LA 코닥 극장입니다. 오늘 중계는 영화, 패션, 가십에 두루 통달한 평론가 봉씨가 거들어주십니다. 단지 실황을 바로 옮기지 못하고 일주일 지연 중계해드리고 있는 점이 아쉽네요.
봉 | 지난번 재닛 잭슨의 슈퍼볼 사건도 있고, 피터 잭슨 감독의 돌발적인 맨발 노출 사태를 우려한 조치가 아닐까요?
몽 | 어쨌거나 할리우드 대로의 레드 카펫 쇼가 흥청망청한 축제 분위기를 회복한 것도 2년 만이군요. 이라크 공습 직후 열린 지난해 오스카에서는 아예 사전행사가 취소됐고 9·11 테러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았던 지지난해에도 스타들이 화려한 드레스는 삼갔으니까요.
봉 | 그래서인지 올해 스타들의 패션 키워드는 할리우드 황금기를 상기시키는 복고풍이군요. 여객선 모양 모자를 썼던 셰어나 백조 한 마리를 몸에 두르고 나왔던 비욕 같은 도발은 전혀 없고 어디를 보나 그레이스 켈리와 진 할로의 얌전한 후예들뿐이네요. 샤를리즈 테론은 〈LA 컨피덴셜>의 바에서 걸어나온 듯하군요. 헤어스타일도 곧은 머리나 올린 머리보다는 흘러내리는 웨이브가 강세입니다.
몽 | 하지만 영화팬들에게 가장 감동적인 것은 다이앤 키튼의 씩씩한 랠프 로렌 판 <애니홀> 정장입니다. 그녀에게 주연상을 안겨줬던 영화인 만큼 행운의 부적인지도 모르겠네요.
봉 | 수백만달러의 광고 효과가 있는 자리이니만큼 심지어 디자이너에게 돈을 요구하는 배우도 있답디다. 한데 빌 머레이는 옷이며 반지를 카메라에 들이대는 분위기가 영 마음에 안 드나봅니다. “뭘 입고 계시죠?”라는 리포터의 수선에 “사각팬티요”라고 딱 잘라 답하고 있군요. 몽 게스트들이 착석하는 동안 올해 오스카의 특징과 전망을 정리해주시죠. 아무래도 작품상, 감독상 부문에서는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이 무관의 제왕으로 지낸 그간의 세월을 끝내고 대관식을 올리지 않겠습니까? 1편과 2편은 기술부문상 6개의 트로피로 자족했는데요.
봉 <반지의 제왕>은 말이 3부작이지 하나의 작품으로 간주되는 만큼 아카데미 회원들이 그간 미뤄왔던 최고의 명예를 승인하는 요식적인 자리로 생각할 가능성이 큽니다. 11개 부문 후보에 오른 <반지의 제왕>에 이어 <마스터 앤드 커맨더>도 10개 부문 후보 지명을 받았지만, 글쎄요. 마스터와 커맨더를 합친들 제왕에 대적이 되겠습니까? 피터 위어의 역작은 투철한 장인정신이 돋보이지만, 감정이나 메시지를 내세우지 않는 작품이라 오스카에서는 호소력이 약해요. 오히려 감독상, 작품상에서는 <미스틱 리버>가 <반지의 제왕>의 위협이 될 것입니다.
몽 | 그런데 올해는 미라맥스가 뒤풀이 파티를 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있던데요?
봉 | <콜드 마운틴>이 작품상 노미네이션을 얻지 못한 미라맥스는 11년 만에 처음으로 작품상 후보 없는 오스카를 맞았어요. 15개 후보를 내긴 했지만 지난해 미라맥스가 40개 지명을 받은 사실을 상기하면 가뭄은 가뭄입니다.
몽 | 발음하기 난처한 낯선 이름들도 후보 중에 꽤 있는데 지난해의 로만 폴란스키와 에미넴 수상이 연출한 깜짝파티를 기대해도 좋을까요?
봉 | 조연상 부문의 이란 여배우 쇼레 아그다슐루, 브라질 감독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13살로 최연소 여우주연상 후보기록을 세운 뉴질랜드의 케이샤 캐슬-휴즈 등이 뜻밖의 주자들입니다. 지금으로서는 그중 아그다슐루가 그나마 가장 수상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아, 사회자 빌리 크리스털의 오프닝이군요. 캠코더로 불법복제를 시도하던 관객 빌리 크리스털이 절대반지의 힘으로 영화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있습니다!
빌리 크리스털 : (<콜드 마운틴>에 들어가 니콜 키드먼에게) “<매트릭스>가 무슨 뜻이었는지 색시는 아슈?”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의 전장에 마이클 무어의 모습으로 뛰어들어) “호빗들, 부끄러운 줄 알아! 이건 허구적 전쟁이야!” (올리판트에게 밟힌다.)
몽 | 3년 만에 돌아온 빌리 크리스털은 예전처럼 후보작 패러디와 뮤지컬 개사곡으로 오프닝을 준비했네요. 아, 캐서린 제타-존스가 남우조연상 수상자로 <미스틱 리버>의 팀 로빈스를 호명했습니다. 가족과 극단 액터즈 갱의 동료들에게 인사를 보냅니다.
팀 로빈스 : “아동학대의 비극을 겪은 희생자라면, 도움을 청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도 약한 일도 아닙니다. 때로는 그것이 폭력의 순환을 끊을 수 있는 가장 강한 행동입니다.”
봉 | 팀 로빈스는 공개적으로 전쟁에 반대하는 입장을 밝혀왔지만, 오늘은 자제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