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르네 랄루 & 롤랑 토포르의 <판타스틱 플래닛> [1]
2004-04-13
글 : 김준양 (애니메이션 비평가)
<판타스틱 플래닛>에 대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비판을 비판하며

르네 랄루의 애니메이션 <판타스틱 플래닛>은 탄생한 지 30년이 지나서야 정식으로 우리를 찾아왔다. 프랑스의 애니메이터 르네 랄루는 1960년 단편 <쥐의 이빨>로 그의 세계를 열었다. 이 작품은 한때 정신병원에서 치료의 일환으로 인형극과 연극을 상연했던 르네 랄루가 환자들의 집단 창작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만든 작품이다. 그뒤 르네 랄루는 단편 <데드 타임즈>(1964)와 <달팽이들>(1965)을 만들었고, 1973년에는 장편 데뷔작 <판타스틱 플래닛>으로 칸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했다. 이후에도 르네 랄루는 <타임마스터>(1982), <간다하르>(1988)에 이르기까지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지닌 애니메이터로 인정받아왔다. <씨네21>은 애니메이션의 철학적 신기원을 이룬 르네 랄루와 서면 인터뷰를 진행 중이었지만, 갑자기 날아온 비보는 그의 죽음을 대신 전했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한 목적으로쓰여진 글들을 제외한다면, 아마도 지금 이 글은 르네 랄루에 관해 쓰여진 이 세계의 마지막 변론일 수 있다.

김준양/애니메이션 칼럼니스트·<애니메이션, 이미지의 연금술> 저자

원제가 ‘미개의 행성’(La Planete sauvage)인 장편애니메이션 <판타스틱 플래닛>에 대해 미야자키 하야오는 1981년 그것을 보고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미술의 부재를, 그리고 미술의 부재가 자신들을 2류로 만들고 있음을 깨달았다고 쓴 적이 있다. 그러나 자신은 ‘애니메이터’이기 때문에 미술이 선행하는 영화창작에 대해 저항이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상당히 분별없는 폄하를 하였다.

“그 영화 자체에 대해서는, 재미있는 작품이지만 좋아하는 작품은 아니다. 기술적 수준에 감탄했지만 공명은 할 수 없었다. 보기를 아주 잘했지만 두번 볼 생각은 없다. 아주 잘 만들어졌지만 조잡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토포르의 세계가 먼저 있고, 그것을 전개시키기에 적당한 원작을 찾은 것은 아닐까? 그 영화에서 주제가 성공적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단지 토포르의 세계가 명백하게 영화 속에 창출되어 있었다.”-미야자키 하야오, <출발점1979∼1996> 도쿠마 쇼텐, 1997년, 149쪽.

롤랑 토포르의 일러스트를 위한 작품이라고?

우선 내가 위와 같은 글을 인용한 이유는 <판타스틱 플래닛>의 이야기가 조잡하다고 주장하고 싶어서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정반대이다. 칸의 심사위원들이 그림만 보고 이 영화에 특별상을 줄 만큼 바보였을 리도 없다. 물론 미야자키 하야오의 말대로 <판타스틱 플래닛>을 창조한 두 주역인 르네 랄루와 롤랑 토포르가 미술 경력을 가진 이들이고, 특히 후자의 미술 감각이 그 작품 세계의 구축에서 아주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에는 틀림이 없다. 이것은 토포르가 빠진 상황에서 만든 르네 랄루의 이후 장편들인 <타임마스터>(Les Maitres du temps, 1982)과 <간다라>(Gandahar, 1987)의 화면이 비록 뫼비우스와 필립 카자 같은 걸출한 만화 작가와의 작품이었을지라도 <판타스틱 플래닛>의 그것과 크나큰 대조를 보이는 점에서는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롤랑 토포르는 뛰어난 일러스트레이터인 동시에 작가였다. 그는 자신과 같은 폴란드 출신인 로만 폴란스키 감독, 주연(이자벨 아자니와 함께)의 라이브액션영화 <하숙인>(Le Locataire, 1976)의 원작자이고, 앙리 조뇌 감독의 <후작>(Marquis, 1989)에서도 원작과 미술감독으로 크레딧에 올라 있다. <후작>은 애니메이션과 라이브액션, 인형극과 관상술을 조합한 이색적인 가면극 형식에 대혁명 직전의 바스티유 감옥 안에서 사드가 자신의 페니스와 논쟁을 하는 도발적이면서도 사변적인 내용의 영화이다. 그러므로 토포르가 자신의 미술을 내세우기 위해 타인의 원작을 골라서 <판타스틱 플래닛>을 만든 것 같다는 미야자키의 추측은 한마디로 난센스이다.

르네 랄루 역시 미술로 시작하긴 했지만 ‘애니메이터’이기도 했으며 더욱이 줄곧 시나리오를 (토포르, 뫼비우스와는 공동으로) 직접 쓴 시네아스트였다. 그가 당시의 누벨바그, 특히 트뤼포의 작가 정책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는지의 여부는 불확실하지만, 토포르에서 뫼비우스로, 뫼비우스에서 필립 카자로 옮겨가면서도 그의 애니메이션들은 늘 일관된 경향, 특히 타자의 시간과 타자의 장소를 소환하는 경향을 갖는다. 거대해진 달팽이들이 인간의 문명세계를 파괴한다는 아이디어에서 르네 랄루의 초기 단편인 <달팽이들>(Les Escargots, 1965)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1984)보다 20년 정도 앞선 작품이었다. <달팽이들>을 함께 만든 르네 랄루와 롤랑 토포르가 그것의 상상력을 장편으로 발전시킨 다음 작품이 바로 <판타스틱 플래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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