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권택의 아흔아홉 번째 영화 <하류인생>
<취화선> 이후 만들어진 임권택 감독의 아흔아홉 번째 영화 <하류인생>은 돌아보지 않는다. 그의 전작들에 연연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인장처럼 사용됐던 형식들에도 매달리지 않는다. 그는 또다시 새로움을 추구한다. 언제나 임권택 감독의 세계 안에서 영화와 예술의 본질을 헤아려보는 영화평론가 정성일은 진심으로 이 너비를 해석하고 질문하면서 뒤쫓으려 한다. 정성들여 마련한 서문과 인터뷰를 통해 거장의 ‘지금’ 거처에 발을 디뎌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 편집자
정성일/ 영화평론가나는 궁금했다. <취화선>을 만든 다음에 무슨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그건 어떤 한계에 도전하는 영화였기 때문이다. 임권택은 거기서 어떤 결론에 도달했다. 장승업의 삶을 통해 그 자신이 봉착한 예술적 괴로움과 여기에 이른 자신의 기나긴 시행착오를 더할 수 없이 고통스럽게 펼쳐놓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가 혜원 김홍도나 추사 김정희가 아니라 오원 장승업을 통해서 조선화의 세계를 끌어안았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임권택은 장승업의 입을 빌려 그의 오랜 예술적 믿음을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그리고 장승업의 입을 빌려야만 설득될 수 있는 그 자리로 간다. 그러므로 <취화선>에서 장승업은 임권택의 뼈와 살이며, 그의 육신이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대사들만으로도 임권택 영화론의 집대성이라고 부를 만하다. 그러나 결국 역사는 이 위대한 화가를 밀쳐냈고, 수많은 열린 결론을 놓아두고 기어이 임권택은 장승업을 도자기 굽는 불가마 속으로 인도한다. 그래서 장승업은 그 안으로 기어들어가 한줌 재가 되어서 스스로 그 자신이 그린 그림의 일부가 되려 한다. 그럼으로써 저 넘쳐나는 열정은 동시에 숭고한 수난의 껴안음이 되고야 만다. 이름 모를 도공이 만든 도자기 안의 그림이 되어 세상에 머물고자 하는 그 자체로서의 존재. 어디에도 없으면서 세상 그 어디에도 있고자 하는 더없는 가능성 속의 감지 불능한 상태에로의 그 자신의 여김. 평생을 집없이 그 어디에도 머물지 못하고 떠도는 영혼의 오만한 겸허함, 그 모순된 표현 그 자체. 여기에는 넘쳐남과 껴안음 사이에서 스스로를 한줌 재로 만들고야 말려는 의지가 있다. 그것은 무서운 결론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다른 사람의 이해를 구하려는 영화가 아니다. 혹은 이 영화는 온전히 그 자신을 위해서 만든 영화이다. 오히려 임권택의 예술을 훔쳐내기 위해서 우리는 그의 영화 안으로 몰래 들어가 그 과정을 따라가야 하는 영화이다. 그것이 임권택의 아흔여덟 번째 영화이다.
필사적이었던 아름다움에의 의지를 집어던지다
그런 다음 (내 생각과 달리) 임권택은 망설이지 않고 돌아왔다. 100편의 목록을 한편 앞두고 있는 그의 아흔아홉 번째 영화는 <하류인생>이다. 그 자신이 직접 시나리오를 썼으며, 여전히 그의 주력부대를 이끌고 영화를 만들었다. 잘 알려진 대로 이 영화는 1957년 장충단 공원에서 시국 대강연이 있던 날 시작해서 1972년 10월 유신헌법 반대시위가 있던 날까지 최태웅(조승우)이라는 한 남자를 15년간 뒤따라간다. 그는 어려서 어머니가 바람나서 버림받았으며, 그 이후 싸움질로 커간다. 그러던 그는 친구 신명이 이웃 고등학교 떡대에게 매를 맞고 오자 그 길로 가서 매로 갚아준다(여기가 이 영화의 시작이다). 그걸 보던 박승문은 “저 새끼 하나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밟혀도 되는 거야!”라며 태웅의 다리에 잭나이프를 꽂고 도망친다. 그의 집까지 쫓아온 태웅을 승문의 누나 혜옥(김민선)이 처음 본 날이다. 태웅은 거리의 깡패가 되고, 혜옥은 그에게 이끌린다. 두 사람은 결혼하고, 그리고 살림을 차린다. 4·19를 거쳐 1961년 5월16일 군사 쿠데타 이후 그가 몸담던 깡패들의 시대는 막을 내린다. 태웅은 깡패를 그만두고 영화제작에 손을 대지만 그러나 곧 망한다. 그리고 알고 지내던 상필에게 몸을 의탁해 건축업에 뛰어든다. 그것은 그를 가난과 배고픔에서 구해내기는 하지만 돈과 권력에 빌붙어 돈을 뜯어먹는 삶이 되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점점 괴물이 되어간다. 그런 그에게 혜옥은 말한다. “당신! 사람이 많이 탁해졌어, 전에는 맑고 순수하고 정직하고 그거 보고 결혼했는데, 당신 하는 일, 사람들한테 무슨 도움을 주는 것도 아니고 오랫동안 권력에 기생하면서 이익을 추구하다보니까 정신 자체가 부패해졌어.” 하지만 태웅은 이미 멈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1972년 10월 시위대가 명동거리를 뒤덮은 어느 날 태웅은 건축업 일로 정보부에 미운 털이 박힌 채 끌려가 죽도록 매를 맞고 거리에 버려진다. 영화는 거기서 끝난다. 그리고 자막으로 “태웅은 이후에도 몇년을 더 그 일에 종사하다가, 1975년에 전업했다. 그의 인생이 맑아지는 조짐이 보였다”라고 후일담을 보탠다.
나를 가장 놀라게 만든 것은 <하류인생>에 있는 어떤 집어던짐의 의지이다. 맨 처음 보았을 때 이 영화는 공들인 도자기를 깨버리는 듯한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이건 비유법이 아니다. 임권택은 (<족보> 이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만의 형상을 안겨주기 위해 거의 믿을 수 없을 만큼의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것은 식민지 강점하의 시대와, 한국전쟁과, 그 이후의 야만적인 권력의 시간 안에서 흩어지고, 부서져내려서 걷잡을 수 없을 지경이 되어버린 우리의 삶 안에서도 (가련한) 아름다움을 보고자 하는 거의 필사적인 복원작업이었다. 모두가 근대에 매달려 부숴뜨리는 동안, 혹은 그 부서짐에 매혹을 느끼는 동안 그는 그 반대의 길을 택했다. 혹 그것이 의심스러우면 그는 기꺼이 조선시대까지 거슬러올라갔다. 그에게 영화는 그런 의미에서 타임머신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그는 아프지만 모든 것을 다해서 지킬 만한 아름다움을 보고자 하였다. 아무리 부서져도 그 안에서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렇게 해서 살아남았기 때문에 결국 삶이란 그 무엇보다도 의미를 지니는 것이 된다. <취화선>의 마지막 숏이 도자기로 끝나는 것은 임권택의 메시지이다.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그걸 집어들어서 일시에 깨트려버리는 듯한 예술가적 몸짓은 내게 몹시도 신기하게 보였다. 물론 여전히 모든 숏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면서 영화를 위해서 마치 처음부터 제자리에 있었다는 듯이 와서 척척 붙어 있으며, 대부분의 신인배우들이 카메라 앞에서 사소한 움직임에서조차 영화 안으로 묻어 들어온다. 물론 그것은 언제나 그래왔다. 그러나 임권택은 여기서 공들인 화면이나 한숏, 한숏 안에서 세상의 모든 질서가 담기는 듯한 아름다움을 그려내는 미장센의 우주를 그냥 밀쳐낸다. 여기서는 <취화선>에서 우리를 그렇게 취하게 만들었던 저 진경산수와도 같은 풍경 속의 인물을 볼 수 없다. 혹은 <춘향뎐>에서 느꼈던 음악과도 같은 리듬감 넘치는 동선과 그것을 펼쳐내는 이미지의 향연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 대신 <하류인생>은 시작하자마자 마지막 장면까지 그냥 내달린다. 그 어느 순간에도 돌아보지 않고, 일단 시작하면 그 15년이라는 시간을 단숨에 거의 추락하듯이 달려간다. 마치 어느 한순간이라도 숨을 돌려서 세상을 돌아볼세라 태웅은 세상에 밀려서, 또는 그를 둘러싼 인물들과 어우러지면서, 혹은 숨가쁘게 이어지는 수없는 신에 밀려서, 그만 (부서져가는 인간성의) 저 밑바닥까지 떨어지고야 만다. 2시간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무려 186개의 신을 운용하면서, 임권택은 최태웅이라는 한 인간을 따라붙는다. 그것은 동시에 그가 1960년대를 뒤따라가면서 명동거리를 회한에 젖어 돌아보는 방법이다. 회한이라고? 그렇다. 나는 그렇게 썼다. 그는 자신의 젊은 시절과 고스란히 겹치는 이 시대를 결코 추억에 가득 차서 돌아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