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하류인생> 혹은 임권택 [5]
2004-05-25
글 : 정진환
정리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정성일 | 처음 <하류인생>을 볼 때는 액션장면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두 번째 보니까 그리 많지 않더군요. 그래서 왜 착시를 일으켰나 생각해봤더니, 앞부분과 뒷부분에 굉장히 강한 액션장면을 딱 넣어놓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하류인생> 액션장면 설계를 새롭게 하신 것 같은데요. 재룡이파가 쳐들어와서 벌어지는 미도극장 심야싸움은 정말 좋았습니다.

임권택 | 정말 사실감을 주는 한컷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관객이 보고 아 이거 진짜다 하는 그런 거. 그걸 찍어내기만 하면, 앞에 붙어 있든, 뒤에 붙어 있든 다찌마와 리 전체에 대한 신뢰를 줄 수 있다고 생각을 한 거요. 처음에는 승우가 그런 실감나는 액션을 해낼 수 없을 것이다, 판단해서 한컷이되 얼굴 보이는 장면은 승우로 찍다가, 안 보일 때는 가짜로 찍었어요. 그런데, 그걸 버리고 전부 다 승우가 했단 말이에요. 결정적으로 사실감을 주는 그런 컷이 필요했단 말이에요.

정성일 | 저는 처음에 영화 속 상필이 태웅이 오다가다 만난 깡패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산부인과에 갔더니 친구인 의사가 치과의사가 될 놈이 깡패가 됐다고 하면서, 하류인생이라고 해두자고 합니다. 그런데, 태웅이 아니라, 상필에게, 그것도 태웅이 없는 자리에서 그 말을 들려준다는 것이 낯설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게다가, 그뒤에 이어 5·16공약 혁명뉴스가 흘러나오는데… 그 대목에서 구태여 태웅을 배제시킬 필요가 있었겠느냐는 것이죠.

임권택 | 상필은 깡패 집단에서 태웅과 같이 생활하는 자고, 그 집단 자체를 하류로 평가한다는 점에서는 태웅이가 있으나마나 상관이 없는 거죠. 태웅도 이미 잘 알고 있어요.

정성일 | 태웅과 상필이 왜 어울리는가에 대해서 휠체어를 밀고가면서 태웅이 “형은 먹물이잖아”라고 대답하지 않습니까? 태웅은 초지일관 끝까지 상필에게 관심을 쏟고 있는데, 의리를 지키는 그 감정은 어디서 시작된 건가요?

임권택 | 어머니가 외도를 하고 가출도 했지만, 태웅이라는 인물의 성장과정에서 준 영향이겠죠. 체면도 중요하고, 의리도 중요하고. 그런 것을 지켜가면서 살아가야 된다 하는.

정성일 | 그러니까 그 인물이 꼭 상필이 아니었어도, 그렇게 했겠군요.

임권택 | 그렇죠.

정성일 | 그런데 상필의 후일담을 혜옥이 이야기하긴 하지만, 장인어른이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승문을 만나는 장면에서, 영화 드라마에서는 그것을 마지막으로 상필은 빠져나가고, 그 자리에 승문이 들어오는데. 그러니까, 전반부를 상필, 후반부를 승문으로 배치했다는 느낌이 드는데요.

임권택 | 나는 무슨 배열을 하는 데 어떤 원칙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거예요. 상필이의 영화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태웅의 인간적 변질을 추적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 분량을 들여와서 할 이유는 없는 거요.

정성일 | 제가 그 느낌을 말씀드린 이유는 한편으로 감독님이 지식인, 또는 먹물들에 대한 조소가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혹은 믿을 수 없음이라고 할까요?

임권택 | 조소라기 보다는… 지금 시대를 한번 봅시다. 국회의원도 몇 빼놓으면 다 지성인이요. 그 사람들 뭐하고 있소. 하지만, 내가 특별히 무슨 감정을 보이는 것은 아니요.

정성일 | 강원도 보광사 내려가는 길에 혜옥이 태웅에게 동생 승문의 탄식을 들려주지 않습니까. 권력과 조폭의 유사성을 말하는데, 그건 감독님의 한국 근대사에 대한 코멘트라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감독님이 생각하시기에 한국 근대사의 가장 큰 문제점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임권택 | 문제는 나라를 운영해야 할 핵심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 권력을 쥔 자들이 그 권력을 잘못 운영해 온 병폐라고 해야 하나. 우리는 많은 피해를 입고 살아온 거 아니에요, 지금까지. 일본 점령, 이승만 권력 장악, 박정희 시대를 겪으면서.

정성일 | 깡패 같은 인간들하고 살고 있구나 하는 감독님의 직접적인 표현인데, 관점에 따라서는 나쁜 놈과 더 나쁜 놈들의 세상을 견뎌내면서 살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임권택 | 그럼, 그럼, 그런 얘기야.

정성일 | 영화의 뒷부분이 앞부분에 비해서 너무 빠르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그리고 또 하나, 이렇게 속도를 밀어붙이는 형식의 영화는 균형을 잡는 것이 굉장히 어려울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에피소드를 필요 이상으로 디테일하게 썼을 때도 위험하고, 그렇다고 해서 건너뛰기에는 불친절한 느낌을 줄 수 있기 때문에. <하류인생>의 경우에는 그 균형을 잡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임권택 | 그 균형은 이거예요. 몇 토막으로 나눌 수 있잖아요. 깡패생활, 학교 생활, 영화 제작시기, 건축업. 그 어떤 삶의 역정이 있단 말이에요. 어떤 심리적 기준이 있어요. 그걸 살펴가면서 해나가는 거요.

정성일 | 영화를 보면서 태웅이 가장 괴물이 되었을 때를 감독님께서는 어느 대목이라고 생각하셨나요?

임권택 | 제일 괴물이 된 건 마지막 컷이요. ‘정보부에 끌려가서 병신이 되었을 텐데, 이렇게 맞고 때워서 잘됐다’고 웃는 얼굴. 그 흉포한 폭력으로 나라를 끌고가고 있는 정치권력에 대해서 저항할 생각이 없는 것. 잘 길들여져 있는 거지, 그 얼굴은.

정성일 | 그렇다면, 마지막 자막이 없었다면 이 영화의 마지막 순간이 가장 절망스러워졌겠네요.

임권택 | 아, 그럼.

정성일 | 그런데, 감독님의 연출역량이라면 충분히 압축해서 1975년까지 올 수 있었을 것 같거든요, 그러니까 맑아지는 조짐이 보이는 그 시점까지 와서 끝낼 수 있었을 것 같은데, 72년에 끝냄으로써 마지막 에피소드가 마치 에필로그 같다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왜 75년이 아니라, 72년에 끝내야 한다고 생각하셨는지, 이 질문은 그걸 여쭤보는 겁니다.

임권택 | 최악의 상황을 잡아내기 위해서죠. 가장 악랄한 때를 기점으로 잡은 거죠.

정성일 | <씨네21>에 기고한 조선종씨 글에 의하면 엔딩을 잡기 위해서 매우 고민하셨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맨 처음 트리트먼트 단계에서 이 영화의 엔딩은 어떤 것이었나요?

임권택 | 유신이라는 큰 정치적 상황을 묶어들어간다는 것은 기본이었지만, 태웅의 경우 구체적인 모습이 있었던 건 아니었죠. 태웅이라는 인물을 좇고 있는 것이니까, 얼마나 그 정신적 황폐함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가 관심이었지. 하지만, 그 정신적 황폐를 구체적으로 찍는 건 영화 전체의 인상에 탁한 느낌을 줄 것 같아서 포기한 거고.

정성일 | 엔딩을 찍으면서 <짝코> 이후 25년 만에 처음으로 슬로모션 액션장면을 넣으신 셈인데요, 예전에 <짝코>의 그 장면에 대해 감독님은 비판적으로 말씀하셨거든요. 그런데 이 대목에서 그 슬로모션을 쓰셨을때는 미학적으로 효과가 있다고 판단하신 걸 텐데요. 어떤 이유로 그런 판단을 하셨습니까?

임권택 | 모든 것이 정리되고 텅 비어버려야 하는 느낌, 그런 것이 하고 싶었던 거죠.

정성일 | 아, 그래서 사운드도 다 지워버리고 에코 효과로 바꾸신 거군요.

영화는 새벽장면으로 끝나는데, 첫 번째 시사는 사진을 넣지 않으셨지 않습니까. 그런데 두 번째 시사에는 사진을 넣으셨는데, 사실 저는 좀 의아했었습니다.

임권택 | 너무 빠르게, 너무 느닷없이 끝난다는 아우성이 오는 거예요, 아우성이. 그래서 넣게 된 거지.

정성일 | 그런데 사진이 들어가게 되면 감독님의 의도와 좀 배치가 되지 않나요?

임권택 | 배치고 말고 없어요. 그뒤에 맑아질 조짐이 보였다는 게 다요, 이 영화는.

정성일 | 지엽적인 질문을 하나 더 드리면, 정보부 직원들이 와서 모질게 혜옥의 배를 걷어차지 않습니까. 어항이 깨져서 금붕어들이 쏟아져내리고, 혜옥이 태웅을 찾아냈을 때 카메라는 팬 해서 다리에 흘러내리는 피를 보여주면서, 누구라도 유산했을 거라고 생각하게 하는데, 사진에서는 딸이 있습니다.

임권택 | 그거는 오해를 낳고 있는데, 혜옥이 또 임신을 안 했으리라는 법이 없어요. 유산이 안 된 것이냐? 그렇게 보면 안 되는 거지. 유산하고 또 애를 낳을 수도 있는 것이고.

정성일 | <하류인생>의 마지막 자막은 감독님의 영화에서 사용되는 자막 중에서는 가장 따뜻한 것이 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하류인생>은 가장 따뜻한 영화라고 생각할 수 있겠네요. 혹시, 앞으로 감독님의 영화가 따뜻해질 조짐이 보이는 것은 아닌가요?

임권택 | 그 조짐이 나한테 생기는 것 같애. 나이가 들면 세상을 젊었을 때처럼 난도질해서 보는 게 없어져요. 젊었을 때의 패기를 영화에 담으려고 하면 나는 안 되는 감독인 거요. 내가 얼마나 변한 것이냐 하면, 영화를 통해서 우리 삶을 좀더 풍요롭게 하는 데 기여하고 싶은 거요.

정성일 | 서둘러 질문을 드리자면 혹시 다음 100번째 영화의 소재로 염두에 둔 것이 있으신지요?

임권택 | 아니, 아직은, 아직은 없어요. 나는 100번째가 아무 의미가 없다고 아무리 얘기해도…. (웃음) 그러다보니까, 이 100번째가 무시해서는 안 되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고.

정성일 | 특별히 독자나 관객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면.

임권택 | 나는 무엇에 대해 기대하느냐 하면, 탁한 인간에 대한 얘기를 그리고 있는데,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는 자기의 변질에 대해서 알아차리려는 노력이 있는지… 태웅의 삶을 영화로 보면서 자기 삶을 한번 돌아보는 그런 걸 요구하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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