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오하고 두려워했던 1960년대
왜 그러해야만 하는가? 내 질문은 여기서 시작한다. 생각해보니 신기하게도 임권택은 1971년 <잡초> 이후 두번 다시 1960년대를 다루는 영화를 만들지 않았다. 그 이후 49편의 영화를 만들면서, 멀리는 조선시대, 그러고난 다음 일제 강점하와 해방공간, 혹은 한국전쟁, 그러고나면 교묘하게도 언제나 그냥 동시대로 넘어왔다. 그가 현재와 맞닿아 있는 가장 가까운 과거까지 거슬러올라간 영화는 1970년대 그 어느 날 그렇게 무심코 시작하는 <창>뿐이다. 임권택은 그 시대를 하여튼 피하고 싶어했다. 어쩔 수 없이 영화 속에서 통과해야 할 때도 그것이 1960년대라는 그 어떤 지표도 지워버렸다(<아제아제 바라아제>). 그는 1960년대를 증오하거나, 혹은 두려워한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갑자기 그 시대 안으로 들어갔다. 이 말이 정확하다. 이 영화는 1960년대를 끌어안은 것이 아니라 다짜고짜 그 시대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마치 <하류인생>의 첫 장면이 그러한 것처럼, 그래서 태웅이 뛰어들어오듯이, 그렇게 시대 안으로 그 안으로 성큼 들어온다. 물론 그는 여전히 <개벽> 이후에 그러한 것처럼 여기서도 역사 속의 사건을 알려주는 자막이 인물들의 삶의 시간과 서로 끌어당긴다. 그래서 시대의 사건들이 인물들의 곁을 잔인하리만큼 그들의 그 어떤 의지와 상관없이 스쳐 지나가고, 인물들은 그 사건의 안에서 그것과 때로는 멀리 때로는 가깝게 오가면서 살아간다. 이 사건과 인물의 원근법은 임권택이 역사 안의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그러나 그것을 임권택은 이번에는 역사의 연속성 속에서가 아니라 마치 토픽을 절단하는 것처럼 그 15년을 잘라내서 그 안으로 태웅을 집어던진다. 그러니까 태웅은 그 어떤 역사의 연속성 안에서 필연적으로 이 자리에 도착한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던져진 시대를 살아야 하는 인물로 집어던져진 것이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고작 4년 뒤에 시작하는 이 영화의 어디에도 전후의 흔적을 볼 수는 없다 (한국전쟁이 자신의 삶 전체에서 가장 큰 영혼의 상처였던 임권택의 세상에 대한 이해 속에서 이것은 얼마나 낯설게 보이는가?). 태웅은 자기를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사건들의 필연성, 그러니까 왜 이승만이 독재정권을 하게 되었으며, 그것에 저항해서 4·19 학생의거가 일어났으며, 그것을 빌미로 5·16이 가능했으며, 그것이 결국에는 유신헌정에로 이르게 되었는지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시간에 던져진 사건들이다. 태웅은 자기에게 던져진 사건들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거의 동물처럼 반응한다. 태웅은 단 한번도 자기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를 돌아보거나, 물어보지 않는다. 그건 ‘주먹 하나로 살아간’ 김두한과도 다른 것이며, 혹은 일자무식이었던 장승업과도 다른 것이다.
태웅은 임권택 영화에서 지난 20년 동안 거의 처음으로 “내가 누구인가”라고 스스로에게 질문하지 않는 유일한 인물이다. 나는 왜 그럴 필요가 없었는지가 궁금하다. 왜냐하면 그 질문을 던지지 않기 때문에 이 영화에는 플래시백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결국 플래시백이란 나는 누구냐고 질문하는 영화적 코기토의 과정이다. 그러니까 태웅의 실존은 질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 속의 행위에 있다. 영화는 질문을 따라가지 않고 행위를 따라간다. 혹은 그 행위에 대해서 아무도 질문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의 행위는 주변 인물들을 닮아가는 것이며, 동시에 그의 주변 인물들은 그를 닮아간다. 그러므로 그가 싸우는 (혹은 태웅이 살아가는 방식으로서 행위하는) 대상은 인간들에서 사회에로 점점 옮겨간다. <하류인생>이 처음 시작했을 때 태웅이 싸우는 상대가 분명했던 그 대상이 점점 집단화되어가고, 마침내 그를 죽도록 때려서 쓰레기처럼 내다버린 상대가 익명으로 남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태웅은 점점 사회화되어가고, 그러기 위해서 동물보다 교활하고, 영리하며, 잔인한 인간들을 닮아간다. 그렇게 닮아가면서 태웅은 세상을 배운다. 그러나 그 배움은 결국 그를 부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의 거의 마지막 장면, 그러니까 정보부 직원들에게 매를 맞기 직전, 그 자신을 이 지경으로 만든 세상에 저항해서 시위대가 (그를 대신하여) 구호를 외칠 때도 태웅은 “씨발, 학생 놈의 새끼들이 공부는 안 하고, 왜 지랄이야”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태웅을 둘러싼 모든 인물들은 예외없이 부서져간다. 더 부서지건 덜 부서지건 결국 그건 같은 말이다. 그들 중 누구도 시대와 싸우기에는, 그 시대가 너무나도 길고 지루하게, 혹은 잔인하고 참혹하게 그들을 끌고 간다. 치과의사가 되었을 상필은 깡패가 되고, 민주화를 위해 시위에 참여하던 승문은 돈벌레가 되어간다. 항상 태웅의 곁을 지켜주는 혜옥은 단 한번도 자기에게 주어진 시대를 탓하지 않는다.
‘시선’과 ‘시간’으로 엮은 <하류인생>
임권택에게서 1960년대에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누구라도 ‘하류인생’을 살아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삶을 다루는 모습에서 내가 가장 이상하게 여긴 것은 분명히 태웅(과 그의 가족들)은 지금 여기 살고 있을 터인데 영화는 1972년에 그냥 끝난다는 점이다(마지막에 엔딩 크레딧과 함께 오르는 가족 사진은 시사회에서는 없었다가 나중에 덧붙여진 것이다). 그저 1975년, 태웅은 그 일을 그만두었으며 “그의 인생이 맑아진다는 조짐이었다”라는 말을 남기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냥 끝나버린다는 점이다. 임권택은 이 이야기를, 혹은 이 인물을 지금 여기 2004년으로 연결시키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냥 거기서 끝나기를 바란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나는 태웅을 열심히 뒤쫓다가 그냥 1972년에 남겨진 느낌을 받았다. 임권택은 이 이야기가 우리 시대 안의 시간의 문턱을 넘기를 바라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어쩌면 이 영화에서 (임권택 영화의 인장이기도 한) 플래시백이 없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혹은 이 자체로 이미 1960년대의 플래시백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다. 어쩌면 임권택은 <취화선>을 만들고 난 다음 지나치게 자기만의 세상에 들어왔다고 생각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기억의 공통 분모를 찾아내서 명동이라는 거리를 주인공으로 하는 세상의 이야기를 끌고 들어왔을지도 모른다. 그는 함께 생각하고, 함께 기억하고, 함께 경험한 세상의 공간으로 들어와서 공감의 세상을 만들고 싶어한 것일지도 모른다. 말 그대로 <하류인생>은 그 시대를 경험하고 기억하는 사람들이 만든 영화이다. 임권택과 (이 영화를 촬영한) 정일성, (조명을 한) 김동호, (음악을 하고 주제가를 부른) 신중현, (그리고 물론 제작한) 이태원은 이 시대의 명동을 그들의 가장 젊은 시절에 살아간 사람들이다(그리고 이제 그 시대의 그 장소를 다룰 수 있는 마지막 세대들이다). 그 모든 인물들은 그들의 기억 안에 모델을 지니고 있으며, 그 모든 사건들은 그들의 기억 안에 그들의 방식으로 저장되어 있으며, 그 사건이 벌어진 날 그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는 그들의 삶의 시간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그 사건이 벌어지던 날 그들은 모두 자기의 방식으로 쳐다보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1960년대에 대한 시선의 영화이다. <하류인생>은 그러므로 시대를 쳐다보는 시선의 영화이다. 물끄러미, 혹은 탄식하거나 무서워하면서, 또는 화가 나서, 때로는 부끄럽게, 하지만 그 안에서 어쩔 수 없이 살면서. 여기서 “그래, 그럼 뭐 하류인생이라고 하자”라는 말이 5·16에 아이를 낳은 (그런데 이 모든 1960년대의 사건들은 결국 1961년 5월16일 ‘이후’의 역사이다) 산부인과에서 그 아이의 산파인 의사의 입에서 던져질 때 그것은 그들 모두이자 동시에 이 영화의 시대를 기억하고 경험한 그들 자신들에게 하는 말이(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그 시대를 살아남은 그들 자신이 그들 다음의 세대들에게 스스로를 향해서 하는 말이다.
신기하게도 이 영화에서 임권택은 그 어떤 장면에서도 그 시대의 낭만을 담지 않는다. 기억해보라. 명동은 그 당시 모든 문화의 최첨단의 거리였으며, 모든 유행은 명동에서 시작되었다. 또한 서울의 멋쟁이들은 모두 명동에 모여들었으며, 문학과 음악을 벗삼은 그 시대의 보헤미안들은 명동에서 그들의 삶을 소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태웅과 그 주변의 누구도 명동의 멋을 돌아보지 않는다. 혹은 마주치지 않는다. 태웅의 시선에는 명동의 그들이 보이지 않는다. 시선에 보이지 않는 것은 그 대상이 자아에로 이끌리는 매듭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직 거기에는 부딪쳐야 하는 사건과 그에 이웃하는 (계열을 따라가는) 시간만이 있다. 그렇게 헛되이 보내버린 그 시간, 그 안에서 그들이 깨달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마지막 순간에조차 태웅은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그래서 마지막 자막은 임권택의 근심이며, 그래도 버리지 못하는 기대이다. 임권택이 <하류인생>을 만든 것은 그 자신이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으려 하거나, 혹은 잘못된 시간의 세상에 대한 또 다른 가능한 세상에로의 그러했어야 할 시간에로 나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정말로 단 하나의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 다시 되풀이될 수 없는 시간, 그 시간 안에서 그러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계열의 순서에 관한 그 절차를 다룬 영화이다. 그래서 동시에 <하류인생>은 시간에 관한 영화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그들 모두의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영화이며, 그것을 그렇게 되살리려는 시간으로 향하는 영화이며, 되찾은 시간 안에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탄식하는 영화이다. (내 생각에 그런 의미에서) 시선과 시간은 <하류인생>의 씨줄과 날줄이다. 그러니까 <하류인생>은 또 다른 의미에서의 <태백산맥>이다. 그는 이 시대를 (아무리 피해도) 결국에는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참혹했던 자기의 이십대 안으로 뛰어들어야만 했다. 임권택은 마치 이십대처럼 태웅과 함께 돌아보지 않고 달려가지만, 한편으로 이제 그의 나이 칠십에 이르러 그를 가엾이 여기면서, 혹은 너그러이 바라보면서, 그래도 기대를 버리지 않으려 한다. 무엇이 그의 심경에서 변한 것일까? 혹은 그의 영화가 다루려는 그 구도를 허물고 세워서 다시 또 다른 세상에로 옮겨가고 있는 것일까? 나의 질문은 여기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