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하류인생> 혹은 임권택 [4]
2004-05-25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정성일 | 영화를 찍는다는 문제만 갖고 얘길 하면, 이제 대부분의 한국 감독들에게 60년대는 사회적 공간이거나 상상적 공간이지, 경험한 공간은 아닙니다. 감독님이 1960년대를 다룰 수 있는 마지막 세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류인생>을 보러오는 관객은 텔레비전이나 자료로만 알고 있을 텐데, 감독님께서 이 젊은 세대를 설득하기 위해 배려한 부분들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임권택 | 이런 생각을 해요. 그 시대를 총체적으로 정리하는 것은 책으로도 충분한 거예요. 60년대라는 시대를 찍을 때, 고증하는 것이 중요한 건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고. 단지, 건달이든 누구든 실제의 삶을 영화 안에 드러내야 하기 때문에 리얼리티가 필요해진 거예요. 기왕이면 우리가 체험했던 실상, 그때의 생생한 모습을 충실히 함으로써 영화를 살아 있는 것으로 만들지 않겠는가 한 것이죠.

정성일 | 제가 <하류인생>에서 매우 신기하게 생각했던 점 중 하나는 <족보> 이후에, <태백산맥>을 예외로 치면, <하류인생>이 유일하게 플래시백을 쓰지 않은 영화라는 점입니다. 플래시백은 감독님의 스타일이자 인장 같은 것이었는데, 이 영화는 시작하면 한눈팔지 않고 일직선으로 곧장 나아갑니다. 감독님 영화의 어떤 변화를 예고하게 되는 것인지요?

임권택 | 진작에도 내 영화에 대해서 그런 지적들이 있었지만, 나는 지금까지 인위적이고 드라마틱한 운행에 대해 멀어지고자 노력을 해왔단 말이에요. 그런데 이번에야말로 그 시대의 삶의 편편을 꾸밈없이 찍어내는 과정에서 쌓여가는 그런 덕목을 갖춘 영화를 해보고 싶었단 말이죠. 어떻게 그 강렬한 드라마 같은 추진력을 낼 수 있겠는가 하는 것에 나는 주력했던 거요. 도리없이 덤덤할 수밖에 없는 일상에 어떻게 힘을 실어서 추진력을 줄 것인가, 그런 데에 가장 힘을 들인 작품인 거요.

정성일 | 그렇다면, <취화선> <서편제> 같은 구조, 그러한 과거와 현재의 복잡한 시제에 대해서 감독님께서 싫증을 느끼신 것은 아닌지요.

임권택 | 내가 플래시백을 이용할 때는 속도를 주기 위해서라고. 순서대로 가다보면 설명해야 할 것이 많아지고 영화도 길어지고, 영화 운행하는 속도가 느려지기 때문에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플래시백을 썼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것도 한두번이에요. <취화선> <서편제>가 다 그런 형식 아니에요. 물론 그걸 임권택표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또다시 그런 방식으로 해나간다면… 그게 무어 좋은 것이라고 만날 붙들고 늘어질 필요가 없잖아요. 아마도 기왕의 내 영화들과는 <하류인생>이 상당히 느낌이 다르게 보이지 않았을까 생각을 하고 있어요.

정성일 |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감독님 영화에 적응됐다고 생각하면 또 다시 낯설어지는군요.

임권택 | 아니, 난 또 그러기 위해서 죽을 지경이라고. (웃음)

정성일 | 이 영화의 시작을 1957년으로 잡으셨는데, 휴전이 지난 지 채 4년밖에 안 된 지점에서 시작하는 영화거든요. 그런데 이상하리만큼 한국전쟁에 대한 상처 같은 것을 완전히 배제한 뒤에 시작한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그리고 1972년에 영화를 끝내는데, 그러니까 역사의 연속성 속에서 시간들이 있기보다는, 감독님의 큰 시간 속에서 이 시간을 잘라내서 찍었다는 느낌도 있거든요.

임권택 | 명동이라는 거리가 전쟁 바로 그때에는 영화 속에 드러난 그런 거리가 아니었어요. 전쟁의 상흔이 처참하리만큼 드러나 있던 때란 말이에요. 내가 전쟁의 상흔, 그런 쪽에 관심을 가졌더라면 명동거리 세트가 지금처럼 지어져서는 안 되지. 폭격의 흔적이라도 드러나야 마땅하지. 그러나 그런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다루고는 있지만, 주제는 한 인간의 몰락을 추적해가는 영화란 말이에요. 전쟁이 남긴 그 흔적들까지 힘을 들여서 표현할 필요가 없는 영화예요, 이 영화는. 난 그렇게 판단을 했다고.

정성일 | 1957년을 시작 기점으로 잡으셨을 때 이 영화는 어떤 장점이 생기는 건가요?

임권택 | 1957년이 중요한 게 아니고, 유신을 어떤 나이에 맞느냐, 태웅이 어떤 사업을 할 때 맞느냐, 권력과 어떻게 유착되어 있는 시점일 것이냐가 중요한 것이었지. 거기서 필요한 것은 아직은 정신적인 맑음이 살아 있는 시점이요. 이 영화는 사람이 점점 탁해져가는 거니까.

정성일 | <하류인생>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감독님 영화 중에서 신이 가장 많은 영화가 되지 않을까 하는 점입니다.

임권택 | 어, 나도 신 넘버를 보고 놀랐다니까.

정성일 | 예, 186신에까지 이르고, 대부분의 숏이 대단히 짧습니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정말 빠른 영화라는 걸 알 수 있는데, 예전 영화들에 비하면 구조들도 굉장히 심플하게 가져간 영화입니다. 가령, <취화선>이 몽타주와 미장센을 혼융한 방식의 영화라면, <하류인생>은 몽타주만으로 만든 영화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특히 상필이 미도극장 앞에서 〈007 위기일발>을 보고 나오다가 총맞는 장면에서 총쏘는 인서트 컷을 넣은 걸 보고, 이제 감독님이 이쪽으로 완전히 옮겨오셨구나 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몽타주 영화로 완전히 옮겨오게 된 확신 같은 것이 있으십니까?

임권택 | 어쨌거나 이게 폭력적인 영화 아니요, 삶 자체가 폭력적이라고, 암투고. 처음부터 폭력을 다뤄요, 이 영화는. 그런 일관성이 필요한 거예요. <취화선>의 인물들처럼 그림이 주는 감흥이나, 아름다움을 여유롭게 느껴갈 만한 삶들이 아니란 말이에요. <취화선>은 미술을 하고, 미적인 것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지만, 이 영화 인물들은 그림 감상하는 법이 없잖아요. 그런 사람들에 대한 얘기를 하니까 그럴 수밖에. 이건 속도가 필요한 영화인 거예요.

정성일 | 저는 이 영화를 기점으로 감독님이 몽타주 영화로 넘어오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거든요.

임권택 | 그거는 또 해봐야 할 텐데, 전 작품들의 유장함과는 내가 벌써 이별을 하고 있는 것 같애. 유장함이라도 전의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단 말이에요.

정성일 | 그럼, 작품이 요구한다면 미장센 중심의 영화로 다시 돌아올수도 있겠네요.

임권택 | 그럼요, 그럴 수도 있죠.

정성일 | 저는 신중현씨의 곡 <님은 먼 곳에>가 쓰이는 대목들이 매우 인상적이었는데, 첫 번째는 태웅이 혜옥에게 카페에서 반지를 건네주는 장면에서였습니다. 음악이 쓰이는 방법이 매우 특별하구나 생각했습니다. 단지 카페 안에서의 배경음악일 뿐만 아니라 바깥의 싸움에 뛰어들 때도 여전히 음악이 흐르고, 그걸 내려다보는 혜옥의 얼굴에까지 그 음악이 뒤쫓아가서 붙을 때, 이 노래는 태웅의 노래가 아니라 사실은 혜옥의 노래구나 생각했습니다. 가사를 생각해보면 태웅이라는 사람이 참 먼 곳에 있구나 하고 느끼도록 가사를 맞췄다는 느낌도 있거든요.

임권택 | 그러니까 그 노래는 사실과는 무관하게 두고 있어요. 물론 설정상으로는 태웅이가 미리 틀어달라고 카페에 부탁을 해놨겠죠. 하지만 바깥에 싸움하는 데까지 그렇게 들릴 수가 없잖아요. 그러나 그 노래를 앞세우면서 태웅과 혜옥의 사랑 감정을 조금 강제로 만들어가는 수단으로서 사용한 거요. 상식적으로 보면 둘이 부부가 될 수가 없잖아요. 사회적 여건 같은 걸 봐도 그렇고. 그 곡의 가사가 갖고 있는 점이 맞아떨어지고 있다고. 신분이나 여건상 아픔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사이라는 것이 가사로 드러나고 있는데, 나는 그걸 오히려 거꾸로 이용하고 있는 거요. 사랑의 감정을 북돋우는 데에.

정성일 | 하지만, 두 번째 <님은 먼 곳에>가 사용된 부분은 좀 낯선 것 같던데요.

임권택 | 아니 그건 낯선 게 아니고, 무리수를 둔 거예요. 사실 그렇게 쓰면 안 되는 거요. 영화라는 게 참 우습다고. 예고편에서 그 음악을 썼다고. 그리고 예고편이 떴고. 이건 완전히 작전상 쓴 거예요, 작전상. 그러는 수가 있어요, 영화를 하다보면.

정성일 | 세 번째 <님은 먼 곳에>가 쓰인 부분은 태웅이 정보부 부장 뒤치다꺼리를 해주려다 머리가 깨지고 난 뒤에 아이들과 남아 있을 때 흐르는데요, 여기서도 음악을 붙여 쓴 이유가 있으실 것 같은데요.

임권택 | 태웅이는 외도를 하고도 아내가 가출했다고 오히려 화내는 놈 아니요. 하지만, 그런 외도가 두 사람 사이를 망칠 만큼은 아닌 거 아니요. 그거를 어디서부터 다시 봐야 하냐 하면, 애낳는 장면 있죠. 그걸 필요 이상으로 길게 찍었다고. 부부로서 깊은 가정 안에서의 신뢰나 믿음을 거기서부터 출발시키고 있단 말이에요. 자기 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존재를 사랑하는 마음을 환기시키기 위해서는 그 음악밖에 더 있겠어요.

정성일 | 태웅과 혜옥이 같이 나오는 장면에서 의외로 태웅의 등을 잡아서 혜옥의 얼굴을 긴 시간 동안 보여주는 숏들이 있었습니다. 이 순간에는 태웅이 아니라 혜옥의 얼굴을 보라, 라는 의미인 것 같은데요. 그때 태웅의 얼굴보다 혜옥의 얼굴을 보여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신 것 같습니다.

임권택 | 당연히 중요한 게, 혜옥이는 태웅이에게 누나이자 어머니인 대단히 중요한 존재라고. 그런데 혜옥이 등장하는 장면이 영화 속에는 많지 않다고. 태웅은 1시간40여분 동안 계속 나오는데, 그런 데서까지 보여줄 필요는 없는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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