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2004 상반기 한국영화 재구성 [1]
2004-06-01
글 : 김혜리
<씨네21> 편집위원 김소영, 정성일, 허문영 대담

1천만 관객 동원의 태풍이 지나간 자리에서 정신을 수습할 즈음에, 한국영화 두편을 경쟁부문에 초대한 칸영화제가 절정으로 달려가는 즈음에, 후텁지근한 여름영화의 장마가 막 시작될 즈음에, <씨네21>의 김소영, 정성일, 허문영 편집위원이 한자리에 모였다. 2004년 상반기 한국 영화문화의 사건과 징후들을 재구성해보기 위해서다. 세 사람은 1천만 영화가 남긴 파동을 곱씹었고, 3·12 탄핵의 이미지가 상반기 최고의 스펙터클이었다는 사실에 전율하기도 했다. 1990년대 기획영화의 새로운 후예를 짚었고 한꺼번에 신작을 낸 흥미로운 감독들의 도태와 성장을 논의했고 그럼에도 너무 많은 영화를 놓쳤음을 깨달았다. 부쩍 길어진 초여름 해에도 불구하고 장편영화 서너편의 러닝타임을 잡아먹은 세 사람의 대화는 밤 깊숙이 계속됐다. 편집장

애타게 자기 이미지를 찾아나선 한국영화

허문영 | 오늘이 5월17일이고 여름영화는 개봉 전이니 상반기를 회고할 적절한 시점이다. 일단 상반기에는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의 관객 1천만 동원과 그것이 영화문화 내지 영화산업에 끼친 파장, 그 텍스트들이 지닌 어떤 경향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있었다. 두 대박영화와 그들 전후에 개봉한 화제작이 공통적으로 실패한 남성의 이야기라는 점, 그 과정에서 여성들이 피해를 입고 슬퍼하는 주변인이길 강요받았다는 점이 지적된 바 있다. 과거를 다룬 영화가 과거를 일종의 악몽의 기록으로 삼고 역사적 시간을 정면으로 응시하지 않았다는 평도 있었다.

김소영 | <실미도>와 <태극기…>가 보여준 것은 새롭다기보다 한국 영화사에서 계속적으로 발현된 하나의 긴장이다. 우리에게 국가는 항상 악한 이름이었다. 지금 국가는 무섭지는 않지만 유령이고 결국 나쁜 이름이다. 두 영화는 국가라는 ‘나쁜 이름’과 믿을 만한 공동체- 민족이건 가족이건 연인이건- 사이에 있는 긴장을 단순무식하게 극화했다. <실미도>는 국가에 대한 증오, 혐오를 임의적으로 중앙정부에 밀어버리고 그것을 국가주의적 폭압으로 단순화해서 관객을 끌었다. <태극기…>는 민족공동체, 가족공동체를 동시에 끌어안으면서 국군이 인민군 참호를 몇 시간씩 달릴 수 있는 거의 희화적인 장면까지 연출했는데, 이 어처구니없는 장면이 가능했던 것은 관객이 자신을 투사할 여지를 주었기 때문이다. 국가와 민족, 가족공동체의 긴장을 전유한 두 영화가 마케팅과 멀티플렉스 환경을 만나 1천만 관객을 폭발시켰다. 반면 이 현상은 국가와 가족공동체의 긴장이 영화를 통해 허구화(fabulation)될 수 있고, 지금의 단세포적인 상상을 넘어 차후에는 좀더 복잡하게 허구화할 수 있는 공통의 기반이 존재한다는 의미로도 보인다.

정성일 | <살인의 추억> <장화, 홍련>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황산벌> <올드보이> 등 최초로 300만 그룹이 5편을 넘긴 2003년은 한국 영화산업 종사자에게 가장 행복한 해였다. 하지만 그래봐야 500만 이하였던 분위기에서 1천만으로 갑자기 점핑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 있었을까? 왜 <살인의 추억>은 1천만이 못 됐을까?

김소영 | 사실 정확한 숫자인지 회의도 든다. 1천만 관객으로 도약했다기보다 산업적 요구가 있지 않았을까. 제작비가 80억, 100억원을 넘기면 오히려 펀딩이 되고, 그 영화들이 다시 1천만 관객을 모아야만 하는 시점이 왔다는 걸 방증하는 것 같다.

허문영 | 이 숫자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진지하게 대해야 하느냐에는 애매한 문제가 있다. 김소영 선생 말대로 두 영화는 만드는 이들이 이미 그 정도 숫자를 염두에 둔 것 같다. <태극기…>의 손익분기점이 500만이었으니 흥행고지는 당연히 1천만을 생각한다. <실미도>도 주변의 산업적 상황이 안 좋을 때 강우석 감독이 던진 상업적 승부수였다. 그러나 마케팅이 늘 성공하는 것이 아닌 다음에야 이 텍스트들이 충족시킨 모종의 요구가 뭐냐는 질문은 남는다.

정성일 | 일단은 1천만 시대가 관객은 물론 영화문화 종사자까지 이 현상을 담론화해야겠다는 강박관념에 말려들게 해 거꾸로 한국 영화담론을 세계영화 속에 고립시켰다는 느낌이다. 앞서 말한 실패한 남성성 문제나 여성의 주변화에 공감하지만 한편으로는 <실미도> <태극기…>, 그리고 둘 사이에 낀 <말죽거리 잔혹사> 세 편이 삼형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또 세편의 기묘한 특질을 가장 잘 보여준 것은 거꾸로 <말죽거리 잔혹사>라는 것이 사후의 내 생각이다. 세편은 남자가 괴물이 되어가는 영화다. 김일성 목 따러 간 남자들이 모두 착란에 빠져 전원 자살하러 갈 때, 형이 동생 대신 죽겠다고 자살하듯 전장을 뛰어다닐 때 과연 이 괴물들이 누구에게 하소연하는지 생각했다. 영화 안에서 여성들은 주변에 있고 <태극기…>는 순결 이데올로기까지 들이대지만 관객문화에서 보면 이 영화의 남자들은 여성에게 제발 날 천사로 만들어달라고 호소한다. 남성성의 강조나 재림이라기보다 남성성의 허무주의라고 부를 이 간절한 갈망이 무엇을 목표로 하고 무엇을 끌어들이려 하는 걸까.

김소영 | 관객이 1천만이 되려면 여성에게 말을 거는 장치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정 선배가 말한 미녀와 야수의 구조랄 수도 있지만 <말죽거리…>는 고전적 액션영화에 가깝다. 사실 액션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몸에 대한 컨트롤이고 젊은 남자들은 거기에 매료된다. <말죽거리 잔혹사>는 자기를 재남성화해서 완벽하게 컨트롤하는 게 아니라 삶을 그럭저럭 매니지(manage)하는 정도의 이야기에 그친다는 점에서 <실미도> <태극기…>의 괴물화와는 좀 다르다. 오히려 <말죽거리…>와 연결시키고 싶은 영화는 <아라한 장풍대작전>이다. <아라한…>의 젊은 경찰은 공생할 그룹을 찾기 불가능한 사회에서 어떻게든 공생을 찾는다. 홍콩이건 할리우드 액션이건 각종 장르를 끌고 와 공생하고 초역사적인 칠선과 공생하며, 피도 눈물도 없는 사회에서 젊은 남자애가 어떻게든 삶을 매니지할 방식을 허구화를 통해 찾는다. 이소룡, 칠선, 주성치에게 배우는 상호 텍스트성을 갖고 자기 텍스트를 만드는 거다. 이런 남성성은 좀 귀엽다. 그런데, 이 경우 섹스를 하지 못하는 희생이 좀 있긴 하다. (웃음)

허문영 | 야수가 되어 여성관객에게 구애를 하는 양상은 부분적으로 동의한다. 그럼에도 단순하면서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이들의 육체가 그대로 보존이 된다는 사실이다. <말죽거리…>나 <태극기…>는 꽃미남들을 전혀 훼손하지 않고 야수성을 사용하는데, 이런 야수성은 좀 다르게 봐야 하지 않을까.

정성일 | 1970년대 한국영화의 이분법은, 몸은 창녀 영혼은 순결이라는 분열증의 문법에 여자를 밀어넣었다. 위 영화들 속에서 꽃미남의 이미지는 그것의 전도된 양상이다. 이미지는 보존이 되지만 영혼은 괴물이 되어 여성관객의 눈물을 통해서만 구원될 수 있다는 점이 이상한 사회적 카타르시스로 작동한다는 생각을 했다.

허문영 | 1천만 동원까지 포함해 말하자면 한국영화는 애타게 자기 이미지를 찾아 헤매고 있고, 그것은 한 문화권에서 영화의 대단히 중요한 역할일 수 있을 것 같다. 1930년대에서 50년대까지 미국에서 그런 역할을 한 사람은 프랭크 카프라였고 미국인들은 스미스, 디즈, 존 도우에게서 자기 이미지를 형성했다. 지금의 한국 관객이야말로 자기 이미지를 원하는데, 노스탤지어영화건 역사영화건 부분적으로 그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고 거기에는 야수성도 포함된다. 그러나 그 야수성은 반드시 실패해서 연민을 구한다. 실패건 재남성화건 문제는 역사적 시간이 탈맥락화되는 거다. <말죽거리…>는 자신의 성장통을 다양하게 나열하면서도 상처의 중심부로는 진입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가 피해자임을 지속적으로 상기시키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진행하다가,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면서 나는 승리자가 아니더라도 견뎌냈다는 식으로 귀결된다. 이것이 정당한 이야기의 방식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의 모습이 결국 이 정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