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2004 상반기 한국영화 재구성 [4]
2004-06-01
글 : 김혜리

홍상수의 나르시시즘은 텅 비어간다?

허문영 | 저널비평 수준에서는 임 감독과 마찬가지로 홍상수 감독의 이번 영화도 전작보다 썩 잘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015#@정성일 홍상수 영화의 비평담론부터 논해야겠다. 여러 평을 읽다가 두 가지를 문득 깨달았다. 첫째, 홍상수 영화가 한국 영화문화 안에서 갖는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학습효과다. 즉 그의 영화를 이야기하는 많은 평들은 자기 눈으로 본 걸 믿지 않고 거의 관성적으로 남이 해온 말들을 끊임없이 반복 재생산해하는 게임에 뛰어든다. 홍상수는 너무 가혹한 표현이지만 그들을 파블로프의 개처럼 훈련시켜서 몇개의 힌트를 던져주는 순간 헐떡거리면서 반복하고 별 의미없는 것에 집착하고 의미있는 것을 놓치게 한다. 둘째,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는 홍 감독의 전작과 매우 다르다. 그러나 너무 많은 평들이 전의 영화들과 다르지 않은 평을 써서, 영화제목을 지워놓고 무슨 영화에 관한 평인지 시험문제를 내고 싶을 정도다. 너무 많은 비평담론이 촬영에만 매달리고 신과 신을 붙이거나 전개하는 방식은 놓치고 있다. 정작 홍상수가 만들어내는 시간 순서게임에 대해서는 여전히 읽지 않는다.

김소영 | 홍 감독에 관해서는 침묵하고 싶다는 욕구가 먼저다. 너무 평가절상되어 별로 말하지 않는 것이 담론의 생산을 멈추는 길이라는 생각이다. <생활의 발견>에서 어디로 갈까 궁금했던 것은, 그가 일종의 유예상태로 계속 회귀했고 그것이 굉장히 악순환적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는데 다시 유예를 선택한 것 같다. 홍 감독의 영화에는 멈춤의 순간들이 있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서 보경이 신문지를 깔고 창가로 나가고, <오! 수정>에서 케이블카가 멈추고, <생활의 발견>에서 문 앞에 멈춰서고, <여자는…>에서는 길에서 택시를 기다리며 서 있다. 어찌보면 이 멈춤의 상태에서 늘 많은 수수께끼를 발생시키는 구조를 견지하고 있는 것 같아 재미없다. 영화적으로 보자면 <여자는…>은 배우 연기가 지금까지 홍 감독 영화 중 최악임에도 어떤 전작보다 더 자기 리듬을 갖고 있다. 우리나라 감독 중에 자기 리듬을 가진 감독은 이명세, 허진호 정도다. 그러나 리듬의 나머진 멈춤과 유예를 반복하고 있는 것 같아 똥개 훈련에서 응하고 싶지 않은 느낌이 있다.

허문영 | 홍상수 영화를 얘기할 때는 그가 연작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해야 한다. 에릭 로메르 영화를 볼 때, 감독이 거의 자동적으로 연작을 만들고 있고 약간씩 달라지는 공간과 인물을 끝없이 변주하면서 한 영화 안에서 완결적 질서를 만들기보다 그 인물들이 감독과 긴 여정을 가고 있을 거라는 걸 염두에 두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도 여정의 일부라고 판단한다. <생활의 발견>에서 감독이 표면적으로 내세운 건 모방과 흉내인데, 그것은 표면적 기술에 불과했고 결국 그 영화가 다룬 건 닫힌 시간, 순환하여 과거로도 미래로도 열리지 않은 시간이었다. <여자는…>도 비슷하지만 다른 점은 주인공이 절대 집에 돌아갈 수 없다는 점이다. 이 영화에서 문호의 집을 겉에서밖에 볼 수 없는데, 최초로 집 나온 것을 우리가 목격한 뒤 집에 갈지 말지 망설이는 순간이 몇번 있다. 그런데 이 세계에 들어오면 귀가가 끝없이 지연된다. 감독이 선택하지 않은 결말에서도 궁극적으로 자기가 출발한 곳으로 돌아갈 수 없는 구조는 똑같았다.

김소영 | 보면서 문호가 집으로 못 돌아갈 거라는 생각은 못하고, 학교는 못 돌아가겠구나 하는 생각은 했다. (웃음) 김경욱씨가 쓴 홍상수 영화의 페미니즘적 비판을 흥미롭게 읽었다. 특히, 비평에서 사라지고 있는 윤리적인 부분들, 예컨대 이 여자도 남자의 미래건만 전혀 여학생의 미래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 부분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언급돼야 할 것 같다.

정성일 | 두 가지를 생각했다. 마지막 결말을 보면서 이걸 어디서 봤더라 했고, 그 전에 여학생이 나오는 순간 <강원도의 힘>의 오윤홍 얼굴이 떠올랐다. 연작이라는 말도 했지만 한편으로 <여자는…>은 <강원도의 힘>보다 나중에 만들어진 전편 같았다. 문호는 나중에 양주 들고 다니면서 교수시켜달라고 찾아다닐 거고, 그 여학생은 강사와 엮여서 강원도로 여행을 갔을 거 같다. 또 하나는 <강원도의 힘> 이후 다른 사람 영화에는 다 있는데 홍상수 영화에만 없는 것이, 시점 숏이었다. 컴포지션만 있지만 시점 숏이 없어서 거리가 사라지고, 숏으로 쪼개지 않는 신은 과대 의미와 과소 의미 부여의 긴장관계에 놓인다. 이번 영화가 다르다는 느낌은 패닝 숏에서 왔다. 단지 좌에서 우로 이동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숏이 움직이는 순간 좌우 균형이 무너지면서 시점 숏 역할을 한다. 그 시점 주인이 누구인지 궁금했는데 카메라가 움직이는 순간 홍상수가 실재와 환상 사이 경계를 숏을 쪼개지 않고 한숏으로 되돌아와 넘기는구나 하는 느낌이었다. 중국집에서 그 긴 장면을 롱테이크로 찍고, 회상을 넣고 창문 바깥에 오가는 여자의 액팅이나 연출은 영화과 학생의 것같이 유치했지만 그녀는 두 남자의 오가는 잡담 속에서 와이프 효과를 일으켰다. 여자가 들어오니까 헌준의 기억이 시작되고 그녀가 화면 밖으로 나가니까 문호의 기억이 시작된다. 중국집에 들어가는 장면도 나가는 장면도 없고, 정말 부천에 가긴 간 걸까라는 의구심이 든다. 중국집 바깥으로 나왔을 때 갑자기 내리는 눈도 너무 가짜 같아 못 뿌린 걸까, 안 뿌린 걸까 의심하게 된다. 이것이 홍상수의 학습효과다. 항상 홍상수는 시작할 때 자기 영화를 보는 방법을 가르쳐주는데, 이번에는 첫눈을 밟는 장면이 그렇다. 등을 보이고 걸어가는 인부와 메밀떡 장수의 숏도 그렇지만 맥락이 과잉한 장면들을 반복하며 <생활의 발견>에서 만든 방식과는 전혀 다르게 영화를 붙여나간다는 점에서 홍 감독이 변하고 있다는 느낌을 크게 받았다. <생활의 발견>은 완성도라는 점에서 앞에 만들어온 영화의 한 정점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여자는…>에서는 완전히 다른 쪽으로 나가고 있는 것 같아 이번 영화가 홍 감독의 팬에게는 큰 의미가 있을 것 같다.

김소영 | 일종의 파블로프 효과이기도 하고 홍상수 감독의 생존 알리바이이며 영화비평의 알리바이이기도 하다. 영화비평이 영양가 없다는 말을 많이 듣는데 그 와중에도 비평담론이 관객과 만나는 지점이 바로 홍상수 감독이다. 그래서 평론가들은 그가 뭘 만들건 놓아주고 싶어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리 알고 싶어하지 않아도 평론가들은 홍 감독이 영화에 내장한 수수께끼를 끝내 알려주려고 한다. 현상으로서 홍상수는 지겨운 일이다.

허문영 | 스스로도 이 짓이 의미가 있나 반문하기도 하지만, 다른 영화에 대한 비평과 홍 감독 영화의 비평에는 다른 점이 있다. 대개 비평은 과잉이라고 느끼는 것이 영화가 가진 형식적 자질의 결함에도 불구하고 메시지나 작은 시도나 징후를 지나치게 많이 읽어준다는 느낌이다. 결국 영화를 말할 때 그 형식적 자질과 대면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내 글을 포함한 많은 영화평은 자질보다 영화의 징후와 게임을 벌이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적어도 홍상수 영화의 평은 형식과 싸움한다. 물론 감독이 고의적으로 오도하는 방식이 있다. 숫자라든가 미끼를 던져 트릭을 부리는데 그것들과 대면하는 과정은 적어도 상대적으로 영화평의 일반적 지적인 작업보다는 훨씬 더 생산적일 수 있다는 생각이 있다.

정성일 | 지금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장 외스타슈의 <엄마와 창녀>가 상영되고 있다. 이 영화와 <여자는…>이 둘 다 연애에 대한 이야기이고 난교 섹스를 소재로 끌어안았는데 외스타슈처럼 형식을 뛰어넘어 시대 공기를 붙들고 훨씬 더 넓은 사회 맥락 안에서 형식을 반추, 반문하게 만들고 생각하게 만드는 지점이 홍상수에게는 전혀 없다. 그렇기 때문에 홍상수 영화를 보면 사람들이 그렇게 사는 거지 뭐에서 끝나지 심금을 울리거나 우리의 시대구나 하는 공감의 지평을 확장하지 못한다. 본인은 관심없다지만 거기에 끝내 가닿지 못하는 게 아닌가 아쉽다.

허문영 | 한국영화 전체지도에서 홍상수의 위치는 매우 독특한데 넒은 의미에서 홍상수 영화는 주체성의 불가능성을 말한다. 스토리나 메시지로서가 아니라 서사의 덩어리를 통해 그것을 말한다. 많은 영화들이 지속적으로 반복해서 허구의 이미지를 형성하고 구애를 반복하는 동안에도 그 주체 구성이 가능한 가를 질문하고 카메라, 편집, 텅 빈 이야기를 통해 그 질문을 표현한다.

김소영 | 그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해서 의미가 없다. 홍감독은 나르시시즘의 구조에서 그 작업을 하기 때문에 점점 에코가 줄어들고 있다. 비평적 무게를 주기에는 너무 텅 비어가는 것 같다. 어떻게 보자면 그 안에서 다른 것을 생성하려는 느낌은 전혀 없고 굳히는 느낌이다. 홍 감독 주변의 상징자본이 하나의 영토처럼 보인다. 홍상수 감독 영화 같은 영화가 자꾸 만들어지고 지탱되어 볼 수 있는 건 즐거움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굳어가는 영토를 와해시킬 필요는 있다.

허문영 | 텅 비어가고, 채우는 게 어떻게 불가능한지 보여주는 과정이 홍상수 영화라고 생각한다. 홍상수의 팬으로서 그의 시간이 어떤 방식으로든 확장되기를 기대한다. <강원도의 힘>에 대해 쓸 때 홍상수의 다음 길이 궁금하다고 했는데, 그 하나가 육체의 추함을 더욱 과격하게 몰고나가는 것이고 두 번째는 오늘의 육체적 추함이 문화적, 이데올로기적이고 역사적 시간의 일부임을 드러내는 풍자 해학 골계의 길이다. 아직도 홍 감독은 두 번째 길은 가지 않고 주저하면서 오늘 우리 육신의 추함과 주체성이 어떻게 끝없이 불가능한가를 연작형식으로 보여준다. <돼지가…>를 봤을 때 이 정도의 세계관으로 이 정도 만들었는데 다른 영화를 만드는 것이 가능할까 궁금했다. 이후 영화를 보면서 아직 그 궁금증은 갖고 있다. 아까 정 선배가 말한 부분도 사소한 변형을 통한 평자 현혹시키기 차원이라기보다 갇힌 세계 안에서 출구를 찾기 위한 몸부림이 아닌가 생각한다.

정성일 | 전적인 동의를 전제하고 그렇기 때문에 사태가 심각해졌다는 생각을 한다. 빗금쳐진 것은 좋지만 빗금쳐진 주체가 자기의 자리를 찾기 위해서 벌이는 놀이가 시간놀이가 됐을 때 사태가 심각하다. 시간놀이를 하는 순간 이 시간은 비시간, 비선형성 안으로 돌아온다. 이 빗금쳐진 주체가 빗금을 누군가에게 떠넘겨버리고 또 그 자리에 가기 위해서 이제까지 했던 건 시간놀이였는데, <여자는…>에서는 시간 안에 꿈이나 여타 방식의 기억으로 블랙홀을 뚫어버리기 시작했다. 이것은 우리가 기대한 출구 찾기의 노력과 반대다. 회전문을 통해서 나갈 수도 있었는데 여기서는 문조차도 트릭일 수도 있다는 것에 빠짐으로써, 빗금을 자작의 트릭 안으로, 하나의 필연으로 껴안음으로써 영화의 시간은 비시간성 안에 갇혀 떠돈다. 그러면 결코 어느 한순간에도 현실과 대면하는 순간을 맛보지 못할 것이고 그러면 끝내 억압에 대해 질문하지 못할 것이고 집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의 주인공들은 결국 영원히 가족과 만나지 못하고 아버지 멍에를 짊어지거나 마주하거나 자식을 마주하지 못한다. 사이렌들은 계속 노래를 부르고 율리시스는 그녀들을 쫓아다니면서 점점 집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다.

허문영 | 정리하자면 <여자는…>의 제작과정을 비교적 가깝게 지켜본 사람으로서 긍정적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방황하고 있지만 이 영화 안에서는 여전히 갇혀 있고 귀가하지 않고 주체성은 여전히 빗금쳐져 있지만 영역이 다른 층위로 옮겨갈 거라는 예감 정도는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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