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청연> 촬영현장, 일본 우에다를 가다 [1]
2004-06-08
글 : 남동철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사진 : 정진환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날씨였다. 지난 5월23일 <청연>의 촬영현장인 우에다로 가기 위해 도쿄 나리타 공항에 내렸을 때, 하늘은 잔뜩 지푸린 얼굴이었다. 기자와 동행한 <청연>의 배우 겸 캐스팅디렉터 김응수씨는 비가 오면 내일 촬영이 취소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당장 조바심이 일었다. 단 2박3일의 취재일정, 만약 24일 촬영이 취소된다면 아예 현장을 못 보고 돌아갈 수도 있겠구나, 싶어서다. 일요일 아침 8시에 인천공항에 도착해 12시에 도쿄에 도착했지만 촬영지인 우에다까진 여기서 차로 4시간을 더 가야 하니 잘못하면 하루를 촬영장에 도착하는 데만 쏟게 생겼다. 그런데 내일 비가 와서 촬영이 취소된다면? 생각하기도 끔찍한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아무튼 마음을 가라앉히려 우에다로 가는 버스 안에서 <청연>의 시나리오를 다시 한번 읽어본다. <청연>이라는 영화가 아니었으면 몰랐을 이름, 박경원. 그녀의 마지막 비행 때도 비가 왔다. 박경원이 조종하는 비행기 청연은 고국을 향해 이륙했지만 폭우로 인해 현해탄을 건너지도 못하고 추락했다. 그때가 1933년, 그녀의 나이 33살 때 일이다. 70여년 전에 사라진 인물을 되살리기 위해 <청연> 제작진은 1주일 전에 우에다로 떠났다고 했다. 해발 500m에 위치한, 양잠으로 유명하다는 이 도시에 무엇이 있기에? 궁금증은 버스가 촬영을 진행 중인 우에다의 신슈대학으로 들어서면서 자연스럽게 풀렸다. 100여년 전에 지은, 일본적 정취가 물씬 풍기는 건물이 눈앞에 들어온다.

3D와 비행, 인물과 감정의 스펙터클

일본에서 이마무라 쇼헤이 영화학교를 졸업한 김응수씨는 〈2009 로스트 메모리즈>의 몇 장면도 우에다에서 찍었다고 알려준다. 19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고풍스런 일본 건축물이 그대로 남아 있는 장소인데다 영상위원회의 활동이 활발한 곳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우에다는 잘 보전된 옛날 건물로 인해 얻는 관광수입이 상당한 도시였다. 촬영이 진행 중인 신슈대학 내 다도회관에 들어서니 좁은 마루가 놓인 다다미방이 보인다. 거기 주연배우 장진영은 어느새 비가 내려 다소 쌀쌀한 날씨 탓인지 잔뜩 웅크린 모습으로 앉아 있다. 오후 4시가 지난 시각, 이곳에선 이날 촬영분의 마지막 장면을 찍고 있었다. 실의에 빠진 박경원을 위로하러 동료 조종사 기베 마사코(유민)가 박경원의 하숙집을 찾아와 대화하는 장면이다. 시나리오상 아주 후반부에 나오는 신인데 <청연>의 촬영일정은 영화의 시간순서를 무시하고 진행되고 있다. 미국, 중국, 일본, 한국 등 4개국 로케이션을 하다보니 장소별로 몰아찍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거듭 촬영 중인 장진영과 유민의 대화장면이 어딘가 감독의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다음 테이크를 위해 휴식을 갖는 사이 장진영이 스탭들이 안 보이는 건물 뒤편으로 걸어간다. 감독에게 뭔가 할말이 있는 걸까, 싶었는데 어깨가 들썩거린다. 울고 있는 배우와 다독거리는 감독의 모습을 보자니 <청연>이 <소름>의 감독이 만드는 두 번째 영화라는 게 실감이 난다. <소름>에서 김명민이 장진영을 목졸라 죽이는 장면을 기억한다면 윤종찬 감독의 연출 스타일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이날 촬영에는 <소름> 때와 또 다른 어려움이 겹쳐 있었다. 본격적인 드라마 부분 촬영 4일째에 감정적인 클라이맥스로 치닫는 장면을 찍고 있는데다 유민과 일본어 대사를 주고 받아야 하니 웬만한 배우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다. 10여분간 감독과 배우의 작전타임이 진행된 뒤 촬영은 다시 진행된다. 그러나 작전타임으로 상황이 쉽게 반전되는 건 아니다. 연기가 만족스럽지 않다고 여긴 감독은 “커트”를 부르고 거듭 장진영에게 다가가 여러 가지 주문을 한다. 어느새 밤기운이 찾아오는데 반드시 낮에 찍어야 할 장면은 계속 제자리걸음인 상황, 이럴 때 배우는 자기 몸의 몇 십배 무게를 혼자 짊어진 것처럼 보인다. 어렵게 10번째 테이크만에 OK 사인이 난 것은 해가 거의 저물 무렵이었다. 장진영은 너무나 지쳐 보였는데 우연인지 의도인지 이날 10번 테이크를 간 장면은 극중 박경원이 아주 힘들어하는 모습을 담아야 하는 장면이었다.

“일본어로 리액션을 하면 그걸 받는 게 너무 힘들어요.” 저녁식사를 하면서 장진영은 이날의 어려움을 감독에게 토로했다. 윤종찬 감독도 배우의 고충을 모르는 게 아니다. 극의 시간순서와 거꾸로 영화를 찍는다는 건 감독에게도 엄청난 부담이다. 이날 밤 진행된 인터뷰에서 그는 “한편을 찍는 거지만 영화 2∼3편 찍는 것 같은 경험을 한다”며 <청연>이 만만치 않은 도전이라고 말했다. 외부에서 보기에 순제작비 70억원의 대작이라는 점만 특별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청연>이 맞고 있는 과제는 그것만이 아니다. 일단 <청연>은 항공촬영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영화다. 제작진은 지난 4월 중순 미국에 건너가 열흘간 비행장면을 찍었는데 그 분량만 360컷에 이른다. 쌍날개가 달린 프로펠러 비행기인 복엽기가 나는 6개 시퀀스는 상영시간만 20분을 넘을 것이다. 과거 <유령>이 한국영화 최초의 잠수함영화로 기획된 것처럼 <청연>은 항공촬영으로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할 예정. 이를 위해 미리 3D 콘티를 만들었는데 애니메이션 기법으로 만든 이 콘티는 윤종찬 감독이 <청연>을 찍고 싶었던 이유를 한눈에 보여준다. 콘티로 표현된 바에 따르면 <청연>의 비행장면은 때리고 부수는 스펙터클이 아니라 인물의 감정과 정확히 일치하는 스펙터클이다. <소름>의 롱테이크를 대신하는 무엇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항공촬영이 가능한 유일한 곳이 미국이었던 반면 복엽기 비행장을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중국에 있고 1920∼30년대 일본 건물을 담을 수 있는 데는 일본이다. 이런 다국적 로케이션은 누구보다 프로듀서에게 벅찬 일일 것이다. <청연>의 프로듀서는 베이징영화아카데미 출신으로 <아나키스트>를 진행했던 이치윤씨. 그는 어려움이 따르는 만큼 다른 영화에서 볼 수 없던 장면을 만들어낼 것이라고 기대한다.

◁ 오른쪽은 눈덮인 겨울이지만 왼쪽의 나무들은 초여름 기운을 머금고 있다. 겨울장면을 찍기 위해 나무가 없는 건물쪽에 눈을 쌓았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