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두개의 정체성 두겹의 눈, 아시아의 한인감독들 [1]
2004-06-09
글 : 오정연

칸에서 쿠엔틴 타란티노가 <올드보이>를 외치는 순간, ‘한국영화’라는 말은 금가루를 날리며 하늘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 순간이 ‘한국영화’의 외연과 내포를 점검해야 할 시점이라고 판단한다. <씨네21>이 최근 지속적으로 다루어온 ‘아시아 네트워크’의 연장선상에서, 그리고 한국영화를 재사유하는 개념틀로 제안했던 ‘내셔널 시네마’를 구체화하는 차원에서, 재외한인감독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재중’ 동포감독 장률, ‘재일’ 동포감독 리상일과 구수연은 각각 중국-한국, 일본-한국의 이중적 정체성 속에 포획된 혹은 연접한 혹은 탈주하려는 경계인들이다. 경계인이 만들어내는 사이공간(space between)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한국에서 만난 장률, 일본 현지에서 만난 리상일, 구수연 감독을 통해 듣는다.

편집자

* 455호 잡지 기사에서 리상일 감독의 얼굴 사진이 잘못 실렸습니다. 사진 속 인물은 안노 히데아키 감독입니다. 또 의 주연배우는 쓰마부키 도시오가 아니라 쓰마부키 사토시입니다. 이에 정정합니다. 리상일 감독과 관계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첫 번째 조우_ 재중동포 장률 감독

문학-영화, 중국-한국의 사이공간에서 쏟아지는 빛

2001년 부산아시아단편영화제에서 처음으로 알려진 장률(42) 감독. 당시 그는 ‘촉망받는 소설가이자 중문학 교수로 재직했던 경력을 가진 조선족 감독’이라는 독특한 배경으로 주목을 끌었다. 이후 그의 단편 〈11세>는 그해 베니스영화제, 클레르몽 페랑, 토론토 단편영화제 등에 진출하면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2002년과 2003년에는 그의 두 영화가 영화진흥위원회의 서로 다른 부문의 지원작으로 연달아 선정된다. 2002년에는 충무로에서 제작하는 35mm 장편영화 <청춘만세>가 예술영화지원작으로, 2003년에는 최두영씨가 제작하고 장률 감독이 베이징에서 촬영한 디지털 장편 <당시>(唐詩)가 키네코 지원작으로 선정된 것이다. 조선족 감독이 한국 영화계의 한켠에 꾸준히 등장하는 것도 예사롭지 않지만, 장률과 한국인 제작자 최두영씨의 관계도 우리의 관심을 끈다. 색보정기사였으며 <오구>의 촬영감독으로 알려진 최두영씨는, 제작 준비 중 엎어진 <청춘만세>를 제외하면, 장률 감독의 모든 영화의 제작과 후반작업을 맡았다. 그를 통해서 우리는 장률 감독이 <망종>(芒種)이라는 영화를 촬영하기 위해 준비 중이라는 근황에 대해서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 전주영화제에 초청된 <당시>의 상영일정에 맞춰 한국을 방문한 장률 감독과의 만남이 가능해졌다.

4월29일 인천국제공항에서 진행된 인터뷰에 자리를 함께한 최두영씨는 얼마 전 <당시>가 홍콩영화제에서 소개된 뒤, 세계 여러 영화제 프로그래머들이 초청 의사를 밝히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우리에게 알려진 재중동포 감독이 거의 전무하다시피한 상황에서 장률 감독에게 향한 관심이 일차적으로는 그의 출생배경 때문이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게다가 소설가라는 경력까지 가진 그가 불혹을 2년 앞둔 나이에 영화를 시작하게 된 동기는 더욱 궁금한 일. 그러나 앞선 그의 두 영화에서 그러한 궁금증을 해소하기란 쉽지 않다. 관객은 그의 영화 속 인물을 통해 민족적 특성이나 아픔 자체를 크게 느낄 수 없고, 그의 영화에서 문학적 내러티브는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를 직접 만난 자리에서 더욱 명확해졌다. 그에게 한민족이라는 정체성은 너무나 소중하지만 중국, 한국 등 국가의 구분은 지워버리고 싶은 경계이고, 문학에서의 경력 역시 영화를 하기로 마음먹은 지금에는 크게 부각하고 싶지 않은 과거일 뿐이었다. 센세이셔널한 개인적인 배경을 내세워 자신의 영화를 상업화시키기에는, 보편적인 영화 자체에 대한 감독의 호기심과 욕심이 너무나 진지했던 것. 반면 그가 영화를 통해 소외된 사람들과 그들을 둘러싼 삭막한 풍경을 그려왔고, 이후 계획 중인 장편들은 대부분 조선족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등 본격적으로 소수민족의 이중적 차별을 다룰 예정인 것은 사실이다. 또한 그가 문학의 매커니즘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는 것과 <당시>의 형식적 아이디어가 그의 문학사적 배경지식에서 나온 것도 부인할 수 없다. 끝내 버리고 싶은 것들을 다시 끌어안을 때, 우회로를 통해 다가온 진실이 빛을 발하는 법. 문학과 영화, 중국과 한국 사이에서 그가 겪는 갈등은 결국 그의 영화들을 더욱 깊고 치열하게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실 그의 성장배경에는 소수민족으로서의 설움이나 차별대우보다는 정치와 국가 같은 거대담론이 더욱 커다란 억압으로 자리한다. 그의 아버지는 독립군 출신 중국 공산당이었고, 문화혁명 때는 5년 넘게 감옥생활을 했다. 어린 시절을 낯선 오지에서 보내고 다시 도시로 돌아왔을 때는 사춘기를 훌쩍 넘긴 10대 후반. 말더듬이 증상까지 보이는 내성적인 소년은 모든 언론들이 거짓을 말할 때, 문학만이 진실을 말한다고 믿었다. 중문학 교수가 된 이후 80년대부터는 몇편의 소설을 발표했지만, 다시 천안문 사태 등의 정치적 사건들이 터진다. 그는 결국 모든 것을 그만두고 ‘아무일도 하지 않고’ 지낸다. 그렇게 10년이 흐르고, 그가 영화를 시작하게 된 것은 돌이켜보면 순전히 우연이었다. 감독인 친구가 시나리오를 써달라고 부탁했고, 그 친구는 그 시나리오가 당국의 허가를 받지 못하자, 일단 수정해서 허가를 받고 영화는 원래대로 찍자고 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수정한 것으로 영화를 찍었고, 체제 내 감독에 머물렀다. “배신감에 몸을 떨었다. 술먹고 그 친구한테 ‘내가 먼저 영화를 찍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근데 그 친구는, 영화공부 하나 안 한 내가 영화를 어떻게 하냐고 비웃더라.” 다음날 아침. ‘영화를 찍겠다’던 그 말만은 이상하리만치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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