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두개의 정체성 두겹의 눈, 아시아의 한인감독들 [4]
2004-06-09
글 : 김영희 (한겨레 기자)

세 번째 조우_ 재일동포 구수연 감독

영화란 재미있는 말걸기이다

구수연(44) 감독의 이름은 아직 우리에게 낯설다. 영화로는 지난해 9월 일본에서 개봉한 <우연히도 최악의 소년>이라는 작품 한편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는 일본에선 데뷔한 지 20년이 다 되어가는 손꼽히는 CF 히트감독이며, 음반 프로듀서에 뮤직비디오 연출과 노래 작사가, <하드 로만티카>(2001)와 <우연히도 최악의 소년>(2002)이라는 소설을 발표한 소설가이기도 하다. <우연히도…>는 일본 가요계의 스타 나카시마 미카가 주연을 맡아 화제가 됐던 작품이다. 조연, 단역까지 일본의 유명스타들이 줄줄이 포진했다. CF에서 인연을 맺어온 스타들이 그의 첫 영화데뷔에 흔쾌히 나선 결과였다. 흥행수입은 1억1천만엔 정도로 화려한 캐스팅과 화제에 비해선 큰 성공을 거두진 못했지만, 최근 출시된 비디오와 DVD가 인기를 모으고 있다.

무엇보다 작품에 대한 평가가 극단적으로 엇갈렸다. 열광하는 이들의 반대편엔 “뮤직비디오 같다”, “도대체 뭔 소리를 하겠다는 거냐”, “이상한 영화”라는 비난이 거셌다. 이런 논란의 영화를 만든 감독은 어떤 사람일까. 인터넷에서 읽은 감독의 소개서에 “아나키에 호전적인 태도가 각 분야로부터 미움을 사고 있다”고 써 있는 터라 호기심은 더 했다.

금발의 부분염색에 분홍색 꽃무늬 남방을 걸친 채 그는 도쿄에 있는 한 CF 편집실에서 작업 중이었다. 시모노세키에서 재일동포 2세로 태어난 그는 “야간전문학교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배웠는데 그래픽 디자인 회사인 줄 알고 들어간 회사가 광고회사여서 할 수 없이 일을 시작했다”고 진지하게 말한다.

그는 영화감독으로선 좀 특이하다. 일단 영화라는 매체에 대해 ‘심드렁’하다. 그가 영화감독이 된 건 그의 영화 제목처럼 “우연히도” 였다. 간절히 영화감독을 원한 것도 아니다. “출간된 소설을 읽은 제작자가 영화로 만들자고 연락이 왔다. 처음엔 원작자로만 참여하는 거겠거니 생각했는데 점점 감독을 내가 해야 할 상황까지 되어버렸다.” 평생 한편이라도 찍고 싶어하는 이들이라면 웬 배부른 소리, 하겠지만 그는 말한다. “영화가 뭐 그렇게 대단한 건가. 자기가 보고 느끼면 되는 거지, 이렇게 저렇게 해석하고 영화가 최고의 매체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건 이해가 안 된다. 난 영화 보는 건 좋아하지만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은 싫어한다. 그리고 영화를 좋아하지만 영상을 ‘신용’하지 않는다.” 오랜 세월 CF 작업을 통해 그는 ‘영상=거짓말’이란 사실을 체감했는지 모른다.

구 감독에게 영화란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하나의 재미있는 이야기” 중 하나일 뿐이다. “본의 아니게 마니아적인 취향의 영화처럼 받아들여지게 되었지만” <우연히도…>도 그에겐 “재미있는 이야기”로 출발했다. 완성 뒤 PG-12등급을 받긴 했지만, 영륜에 시나리오를 제출했던 당시엔 대본에 8할 가까이 빨간 펜으로 ‘체크당했던’ 작품이기도 하다. 비디오를 구해 직접 보기 전, 인터넷에서 검색한 작품에 대한 설명을 보니 그럴 만도 하다 싶다. 등교거부, 이지메, 이혼, 강도, 공갈, 폭행, 민족차별, 상해, 자살, 드럭…. 작품에 등장하는 소재들이 하나같이 논쟁적이다. “강박성장애에 걸린 여자애도 나오고, 소재가 소재이다 보니 말이 많았지만… 결국 사람들이 보기에 여러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름대로 소화해 자신의 길을 가게 마련이다, 라는 지극히 낙천적인 얘기”라고 본인은 말한다. “모든 크리에이티브는 자기의견이 이렇게 잘났다고 자랑하는 게 아니라 커뮤니케이션의 도구가 되게 하는 것이 역할이다. 자기 자식이 바보라 생각했던 부모가 이 작품을 보고 어, 이놈도 뭔가 자기 나름대로 살아가겠지 생각하고 말을 걸어본다면 그걸로 만족이다.”

어두운 곳의 누구도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법

그는 또한 영화의 ‘문법’이란 면에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다. 영화에서 인물들은 합리적인 설명이 불가능하다. 인간은 불가해하다는 식의 얘기도 아니다. 논쟁적인 소재들은 절대 구조를 들추거나 깊이 들어가는 법 없이 툭툭 튀어나왔다가 사라지는 식이다. “영화나 소설이나 문법은 절대 취미없다. 문법을 중요시하는 사람은 새로운 걸 만들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어느 소설가가 ‘능숙해지지 말아라, 멋대로 해라’라고 했던 말을 정말 좋아한다. 20년을 광고를 찍으면서도 그 말을 명심하고 있다.” 관객의 취향을 따라가는 요즘 영화에 대해서도 할말이 많다. “창작이란 이런 게 좋죠? 하고 묻는 게 아니라 이런 것도 있어요, 하고 보여줘야 하는 것 아닌가. ”

작품엔 본인의 어릴 적 에피소드도 등장한다. ‘조센진’이라 불리며 이지메당하는 어린 소년은 “난 한국인이야”라고 울다가 엄마로부터 구박받는다. 조심스럽게 “어릴 적 상처가 되었겠네요”라고 말을 건네자 “전혀∼”라는 답이 금방 돌아온다. 그의 표현을 따르자면, ‘재일동포’란 자신의 존재는 “나의 무기”다. “‘우연히’ 재일동포로 태어났지만 한번도 내가 ‘재일’이란 사실을 잊은 적 없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내 성은 ‘구’였으니까. 아마 내가 한국에서 태어났으면, 공부도 못하고 그저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자기 나라가 아닌 데서 태어난 건 즐겁고 재미있는 일이다. 남들과 똑같으면 뭔가 하지 않아도 살아가기 쉽다. 하지만 남들과 다르기 때문에 소리를 크게 내야만 그들이 내 목소리를 들어준다. 차별? 그건 기쁜 일이다. 이지메당하는 건 무시당하는 것보다 낫다. 무시당해 자기 존재가 없어지는 것만큼 괴로운 일은 없다. 일본이 지극히 평화롭고 선한 나라면 안 된다. 환경이 괴로워야 내가 강해지니까.”

그가 27살 때 케빈 코스트너가 출연하는 광고를 찍을 때 얘기다. 당시 촬영현장에서 케빈 코스트너가 그에게 “사실은 내 몸에 인디언 피가 1/4이 흐른다. 난 이제 인디언에 서서 미국을 바라본 영화를 만들 거다”라며 보여줬던 시나리오가 <늑대와 춤을>이었다. 그러면서 “이 엄청난 돈이 들어간 CF를 찍는 당신이 재일동포라는 걸 알고 놀랐다. 당신 왜 영화를 찍지 않냐. 반드시 영화를 찍어야 한다”고 말했다며 “나이 40이 넘어서야 이제 영화를 시작하게 됐다”고 웃는다.

또다시 새로운 CF 작업 중인 그는 내년에 두 번째 영화를 크랭크인할 계획이다. <우연히도…>의 시나리오를 썼던 카피라이터인 동생 구광연씨와는 “서로 바보라고 여길 만큼 정말 사이 나쁜 형제”지만 함께 소설집을 낼 계획도 갖고 있다. 40살이 넘어서 만난 새로운 영역에 그는 “사는 게 갈수록 너무 재미있다”고 했다. 그가 공상하는 방송사는 ‘마니아 채널 방송사’이다. 음악이건 영상이건 CF건 각 분야에서 다양한 취향들이 공존하는 곳 말이다. <우연히도…>는 올 부천영화제 초청이 확정된 작품. 어쩌면 이번 여름 부천영화제가 열리는 부천의 거리를 큰 키에 약간 험상궂은(!) 꽃무늬 남방의 남자가 어슬렁 걸어다니고 있을지 모른다.

<우연히도 최악의 소년>은 어떤 영화

자극적인 색채들을 가볍게 공기 속으로 중화

이지메만 당하는 학교에는 가끔 나가보고, 가족과는 몇년째 얼굴도 마주하지 않은 채 인생 목표 없이 거리를 헤매고 다니는 재일동포 3세의 고3 학생 히데노리. 어느 날 누나가 손목을 긋고 자살을 한다. 강박성장애에 걸려 있고, 도벽이 있는 유미, 시부야 밤거리에서 알게 된 타로와 함께 히데노리는 누나에게 한국 땅을 보여주고 싶다며 병원 영안실에서 시체를 빼내온다. 시체 1구를 포함한 4명의 기묘한 로드무비가 시작된다.

히데노리는 길거리에서 부딪친다면 ‘어디 나사 하나 빠진 것 아냐?’라는 말을 쉽게 들을 것처럼 희죽희죽거리며 살아가는 인물이다. 누나의 시체 앞에서 “나도 죽어버릴까?”라고 웃다가 엄마한테 뒤통수를 맞을 정도다. 누나의 시체를 밀항시킬 돈을 마련하기 위해 급기야 강도짓을 하면서도 “너무 부끄러워요. 제발 도와주세요”라며 전당포 주인 앞에서 헤헤거린다. 이렇게 <우연히도 최악의 소년>의 인물들은 보는 이의 이해를 구하지 않는다. 언뜻 내용만 본다면, ‘정체성’의 이야기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애당초 그런 데도 큰 관심이 없다. 여동생이 왜 자살했는지, 영화 내내 무표정한 유미는 왜 강박신경증에 걸려 있는지 끝까지 설명은 물론, 추측의 단서도 주지 않는다. 히데노리가 유미에게 재일동포 1세였던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려주긴 하지만, 그런 상처도 지금의 히데노리의 모습에 대한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대신 영화 한편씩은 찍을 법한 소재들을, 아무렇지 않다는 듯 나열하는 방식을 통해 가볍게 공기 속으로 자극적인 색채들을 중화시켜버리는 방식은 독특하다. 그리하여 영화는 묘한 ‘우화’를 대하는 듯한 느낌이 되어버린다. 개봉 당시 “몹시 공격적이고 위험한 영화”라는 평가가 많았지만, 그건 소재에서 오는 선입견일 듯. 하카타, 시모노세키를 향해 질주감 가득한 영상도 인상적이다. 주연을 맡은 이치가와 하야토는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의 주역을 맡았던 배우며 <우연히도…>로 올 초 일본 아카데미상에서 신인남우상을 받았다.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