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일본 젊은 감독 4인과의 조우 - <오늘의 사건사고> 유키사다 이사오
2004-08-11
글 : 박혜명
사진 : 이혜정
세상의 중심에서 청춘을 외치다

지난 7월24일 폐막한 올해 부천영화제에는 현해탄을 건너온 영화들이 유난히 많았다. 전체 상영작 261편 가운데 일본영화는 82편. 특별전을 제외하고 정식 부문의 장편들만 따져봐도 64편 중 13편이 일본영화다. “일본 문화 4차 개방을 고려해 의도적으로 일본영화들을 많이 배치했다”는 부천영화제의 일본영화는 세계적인 감독의 화제작부터 생경한 신인들의 데뷔작까지 편수만큼 종류도 다양했다. 그 가운데 흥미로운 네편의 감독들을 만났다. 젊은이들의 하루 일상을 통해 시간의 의미를 묻는 <오늘의 사건사고>의 감독 유키사다 이사오, 원작인 동명 단편만화집을 고스란히 빼박은 <만가타로 단막극>의 감독 야마구치 유다이, 올해 칸국제영화제 초청작이며 조용한 상상력의 힘을 뚝심있게 보여준 <녹차의 맛>의 감독 이시이 가쓰히토,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라카미 류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쇼와 시대의 풍자극 <쇼와 가요 대전집>의 감독 시노하라 데쓰오. 오시이 마모루와 미이케 다카시는 여기 없지만, 현재 일본에서 또 다른 위치를 만들며 서로 다른 방식의 영화를 추구하고 있는 이들 네 사람의 이야기를 모아봤다. / 편집자

유키사다 이사오 감독 프로필

1968년생

이와이 순지의 <러브레터> <스왈로우 테일> 〈4월 이야기> 조감독

1998년 <오픈 하우스>로 첫 장편영화 찍음

2000년 <해바라기>로 부산국제영화제 국제비평가연맹상 수상

2001년 <고>(Go)로 일본아카데미상 최우수감독상, 일본국제비평가대상 감독상 등 수상

시바사키 토모카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오늘의 사건사고>는 눈과 귀가 예민한 영화다. 이 영화는 서로 다른 곳에서 하루 동안 벌어지는 크고 작은 사건들을 고루 지켜보고, 저마다 이야기가 있는 인물들의 대화를 참을성 있게 듣는다. 한 친구의 대학원 진학과 이사를 축하하며 모인 7명의 젊은이들은, 잊혀진 사랑을 추억하거나 진행형인 사랑에 맘을 앓거나 다가오지도 않은 사랑에 철부지처럼 덤빈다. 불법 도박장에 들이닥친 경찰을 피하려다 건물벽 사이에 끼어버린 남자는, 구조대원 중에 중학교 동창을 만나 잠시 마음의 의지를 얻는다. 자살하려고 외진 바닷가로 간 여고생은 난데없는 고래의 등장으로 고래 구조작업만 돕다 돌아간다. 별것 아닌 일에 화내고 울고 웃는 평범한 사람들의 하루라는 시간이 <오늘의 사건사고>에서는 소중하게 흘러간다. 보는 이에 따라서는 무기력하고 지루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의 어떤 하루가 지나간 방식이기도 하다. 극장 데뷔작인 <해바라기>와 국내 개봉작인 <고>(GO) 등으로 호평받았던 유키사다 이사오 감독은 “내가 아직 청춘이라 청춘영화를 리얼하게 찍을 수 있는 것 같다”고 농담처럼 말했다. “일본 영화의 고정된 틀을 깨부수는 역할을 하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는 이와이 순지의 조감독으로 있었기 때문일까. 그는 영화를 “시나리오를 깨부수는 과정”으로 정의하고, 인디 계열의 감독으로서 대작 기획영화를 맡은 의외성을 “작은 혁명”으로 표현했다. 서른 다섯살이 청춘이 아니라면, 유키사다 감독은 청춘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려는 사람이었다. 그의 최근 개봉작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는 현재 일본에서 80억엔 이상의 수입을 올리고 있는 중이다.

원작의 어떤 점에 끌렸나.

회사로부터 들어오는 일들이 주로 과격한 영화나 사람이 죽는 영화였다. 시키니까 어쩔 수 없이 하면서도 싫증을 내던 차에 원작을 읽게 됐다. 그때 마침 뉴욕에서 9·11 테러가 일어나 충격을 받았고, 내가 모르는 곳에서 일어나는 사건들과 일상에 대한 생각들이 떠오르기 시작해서 이 영화를 만들게 됐다.

원작과 다른 설정들은 어떤 건가.고래의 출현과 벽 사이에 낀 남자에 얽힌 얘기는 다 내가 썼다. 원작과 다르게 가고 싶었던 건, 모두가 우연히 스치고 지나가지만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구조다. 고래를 보러 갔다가 다시 만나게 된다는 설정도 그렇게 나왔다.

어떤 기사를 읽으니까, 주연배우인 쓰마부키 사토시가 애드립이 많아서 연기가 힘들었다고 하더라. 그러면서 자기 자신에게 가장 가까운 연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애드립을 주문한 연출이 영화의 의도와 잘 맞아떨어진 것 같다.

이번 영화는 대본에 주어진 것만으로 배우들이 하는 게 싫었다. 일단 배경이 교토다 보니 인물들의 간사이 사투리를 완벽하게 소화하도록 했고, 시나리오상에서 시간적으로 비어있는 부분을 애드립으로 표현하도록 주문했다. 갖고 있는 것을 보여주라고 모든 배우들에게 말했다. 나는 시나리오를 쓰고 나면 배우들한테 ‘이렇게 해라’가 아니라 ‘너는 어떻게 하고 싶은데’라고 묻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만든다는 건 수정의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시나리오는 완성된 공통의 교본일 뿐이고, 이것을 어떻게 부숴나가느냐가 영화를 만드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라는 영화도 원작이 있다고 들었다. 그런데 영화와 원작은 상당히 다르다. 원작이 30대에 접어든 남자가 백혈병으로 죽은 첫사랑을 회상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졌다면, 영화는 그 남자의 현재 약혼녀도 등장하고 배경도 쇼와 시대의 80년대로 되돌려놓고 있다. 원작에 매료된 부분과 설정을 다르게 간 이유가 궁금하다.

영화사에서 처음 제안이 들어왔을 때는 원작만으론 영화화가 곤란하다고 느꼈다. 일상적인 연인이 등장하는 뻔한 스토리였다. 그래서 고민하고 있는데 원작 소설이 굉장히 많이 팔리기 시작했고, 회사에서도 반드시 영화로 만들어야 된다고 하더라.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주제에 맞춰준다면 하겠다고 했고 회사에서도 오케이했다. 한마디로 원작을 내 맘대로 뜯어고치겠다는 거였다. (웃음) 내가 생각한 테마는 시간과 기억이었다. 이 테마에 맞춰 현재라는 시간을 넣고, 과거의 시간엔 일본인들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쇼와 시대의 분위기를 만들었다.

현재 찍고 있는 신작 <북의 영년>에 대해 말해달라. 메이지 시대 초기 개척지인 홋카이도로 한 여성이 이주해오면서 겪는 파란만장한 인생을 담은 사극이라고 알고 있다. 소재나 규모 면에서 이전 영화들과 전혀 다른 인상을 준다.

80% 정도 촬영이 끝난 상태다. 원래 이런 류의 기획 영화는 메이저 회사들이 한다. 우리처럼 인디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한테는 기획서 자체가 잘 오지 않는다. 근데 이 영화에 출연하는 일본의 대배우 요시나가 사유리가 내 영화를 보고는 나와 일해보고 싶다고 했다더라. 대작 기획은, 자기만의 색깔을 반영하기 힘들기 때문에 젊은 감독들도 잘 안 하려고 하지만 난 신경쓰지 않는다. 좋은 기회를 살리고 싶다. 나이도 경험도 많은 감독들이 찍으면 다 똑같은 영화밖에 안 되겠지만, 내가 찍으면 흥행엔 실패하더라도 작은 혁명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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