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일본 젊은 감독 4인과의 조우 - <녹차의 맛> 이시이 가쓰히토
2004-08-11
글 : 박혜명
느린 이야기 속의 고운 상상력

이시이 가쓰히토 감독 프로필

1966년생

1992년 CF감독으로 데뷔

1996년 단편 으로 유바리국제영화제 그랑프리 수상

1999년 <상어가죽 남자와 복숭아 소녀>로 장편 데뷔

2000년 <파티7>

2002년 <킬 빌 vol.1>에서 오렌 이시이 어린 시절을 담은 애니메이션 시퀀스 연출

<녹차의 맛>은 이시이 가쓰히토 감독의 전작 두 편과 다르고도 같다. 소년의 성적 환상을 그린 <상어가죽 남자와 복숭아 소녀>, 할리우드 스타일을 모방하면서도 일본만화의 감수성으로 개성을 표현한 액션영화 <파티7>은, 화려하고 숨가쁘다. 반면 <녹차의 맛>은 일본 전원을 배경으로 한 정갈한 화면 속에 느린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학교에 갓 입학한 소녀 사치코와 중학생 오빠 하지메, 음반 엔지니어인 외삼촌 아야노와 괴짜 만화가인 친삼촌 도도로키, 애니메이터 일을 했다가 전업주부가 된 엄마와 변변찮은 정신과 의사 아빠, 그리고 과거 유명한 애니메이터였지만 지금은 괴상하게 생긴 눈썹을 실룩이며 손녀를 괴롭히거나 엄마와 어울리는 할아버지. 이들은 저마다 마음에 소원하는 바가 있다. 자신을 쳐다보는 커다란 자기 자신의 환상이 없어지는 것, 사랑이 이뤄지는 것, 사랑을 잊어버리는 것, 친구가 생기는 것, 일을 다시 시작하는 것, 유능한 의사로 인정받고 싶은 것 그리고 늘 가족들 곁에 있고 싶은 것. <녹차의 맛>은 이들의 소원이 이루어져가는 과정을 고운 상상력으로 이어나간다. 어린 사치코를 통해 보여지는 환상의 이미지나 의미없어 보이는 장면들이 촘촘히 연결돼가는 이야기의 진행은, 보는 이의 예상을 뛰어넘는 상상의 힘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끝자락에 지극히 향기로운 희망을 담은 이 영화는, “내가 하고 싶은 영화가 아니라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만들었다고 말한 이시이 감독의 소년 같은 인상과도 어딘가 닮은 듯하다.

이야기는 어떻게 떠올린 건가.

원래 이런 영화를 만들어야지 해서 만든 건 아니고, 평소에 아이디어 노트북을 들고 다니면서 재미있는 일이 생기거나 그림, 대사, 생각 등이 떠오르면 적어놓는데, 할아버지 캐릭터만 생각해놓다가 발전이 돼서 영화를 만들게 됐다. 유머, 만화, 공상과학(SF) 등 내가 좋아하는 요소는 다 집어넣었다. 다른 사람이 이런 영화를 만들어주면 좋을 텐데 안 만들어줘서 내가 직접 만들었다. (웃음)

할아버지 캐릭터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달라.

나 스스로, 이렇게 늙고 싶다고 생각해서 만든 이상적인 노인상이다. (웃음) 성격 하나를 예로 들자면, 내가 좋아할 때만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그게 싫을 때는 피하는 캐릭터. 처음의 발상은 정말로 단순했다. 할아버지가 있는데, 만날 어린 손자를 갖고 놀고 구박도 하는 거다. 근데 얘기를 계속 생각해내다보니, 할아버지를 이용해 개그를 하려면 상대가 있어야 해서 손주가 생겼고, 아이를 괴롭히면 엄마가 말려야 되니까 엄마가 생겼고 엄마가 있으니까 당연히 아빠도 있어야 하지 하면서 발전된 거다. 캐릭터들의 특징은 일단 주변 사람들을 기본으로 삼아서 만들었다. 상상력이 아주 흥미롭다. 해바라기가 우주를 삼켜버리는 비주얼이나, 이리 튀고 저리 튀는 듯한 스토리 진행도 그렇다. 그런 상상력들이 어디에서 나온 건지 궁금하다.

보통 영화를 만들 때는 스토리가 먼저 있고 그것을 어떻게 전개해가느냐에 따라 디테일이 나오는데, 이 영화는 시작부터 그런 제약 없이 만들어졌다. 내 노트북을 보면서 재미있게 볼 수 있는 것들만 조합하다보니 이런 영화가 나왔다. (웃음) 아이디어들만을 퍼즐처럼 뭉쳐놓아서 그렇게 된 것 같다. 스토리부터 생각했으면 그런 상상력이 나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점들을 막 찍어놓고 어떻게 이어갈지 고민하다가 나온 영화다.

2000년 <파티7> 찍은 뒤 장편 극영화를 쉬고 애니메이션 작업만 했다.

<상어가죽…> <파티7>을 만들 당시 있었던 회사에서는 월급밖에 못 받았다.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싶기도 했고, 장편 만들면서 힘만 들이고 돈도 안 되는 것 같아 지금의 회사로 옮겼다. 3개월에 한번 정도 꼴로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인센티브도 받았다. (웃음) 바빠서 장편 만들 환경도 안 됐지만, <녹차의 맛>은 그동안 축적된 소재가 있어서 만들어진 거지, 아니면 장편영화를 그만둘까도 생각했다.

혹시 지금 준비하고 있는 신작이 있으면 말해달라.

확실히 정해진 건 아닌데, <에반게리온>의 작가 에노 키도, <공각기동대>의 작가 사쿠라이와 함께 각본을 쓰는 중이다. 가제는 <데드라인>이고 장르는 SF다. 우주에서 아날로그 차를 끌고 나와 가혹한 레이싱을 벌이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내가 직접 연출을 할 경우엔 <애니 매트릭스>를 감독한 고이케와 공동으로 할 예정이다. 실사 영화도 있는데 촬영은 끝났고 편집 중이다. 단편 50편을 모은 2시간50분짜리 장편이다. 아주 짧게는 몇십초에서 길게는 몇십분짜리도 있다. 대학 동기이자 신인감독인 동료 두명과 함께 자기 좋은 대로 만들었다. 개그도 있고 멜로도 있고 춤도 있고 애니메이션도 있고 CG만으로 만든 것도 있다.

좋아하는 영화들은 어떤 게 있는지.

(한참 고민하다가) 음, 그래도 내 영화가 제일 좋다. (웃음) 미야자키 하야오의 초기 애니메이션이나 쿠엔틴 타란티노, 폴 버호벤, 코엔 형제, 시미즈 히로미 등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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