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파리와 도쿄의 시네마테크 탐방 [2]
2004-09-21
글·사진 : 김도훈
작은 도시, 그러나 위대한 문화도시

△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는 낡은 지금의 보금자리를 접고 파리의 ‘51 뤼 드 베르시’에 위치하고 있는 구 미국문화원 건물로 이사할 예정이다. 지금 한창 리모델링 중인 건물은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으로 널리 알려진 건축가 프랭크 게리의 작품. 이 새로운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건물 속에는 4개의 상영간과 도서관, 식당을 비롯한 부대시설이 다양하게 들어서게 된다.

변함없는 작은 기쁨이 있는 곳, 파리의 시네마테크

“파리는 작은 도시예요.” 통역을 도와주던 현지진행요원이 건넨 말이었다. “파리에서 볼 만한 지역은 여의도 안에 다 집어넣을 수도 있을걸요.” 과연 그렇다. 센강에 도도하게 떠 있는 시테섬을 중심으로 ‘당신이 파리에서 보아야 할 대부분의 것’들이 손에 잡힐 듯이 모여 있다. 교외지역을 모두 포함한 대(大)파리가 아닌, 우리가 알고 있는 파리는 서울 인구의 1/3도 되지 않는 사람들을 포옹하고 있는 조그마한 도시다. 그러나 이 작은 도시는 세계지도에다 ‘예술의 도읍’이라 이름붙여도 좋을 만한 영향력을 끼쳐오지 않았던가. 생미셸의 작은 거리 사이로 드문드문 들어서 있는 작은 아트시네마들은 전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수백편의 영화들을 오늘도 상영 중이다. <록키 호러 픽쳐쇼>가 20여년 동안 상영되고 있는 극장을 지나쳐 길을 올라가면, 파졸리니 영화를 하루도 빠짐없이 틀고 있는 극장에서는 오늘도 모여든 시네필들이 화면을 응시하며 마법 같은 순간에 빠져든다. 부대시설이 잘 갖추어진 영화도서관과 시민을 위한 공공 시네마테크는 영화를 공부하는 학생들과 엄마의 손을 잡고 온 아이들이 함께 공존하는 것이 낯설지가 않다. 파리에서 영화를 본다는 것은 스노비즘을 채워주기 위한, 혹은 두 시간의 찰나적 즐거움을 위한 오락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파리지앵들에게는 그저 생활의 일부와도 같은 것. 이 모든 축복받은 현장들은 격한 부러움을 불러일으켜 낯선 여행객의 심장을 요동치게 만든다.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미래, 51 뤼 드 베르시 프로젝트

그 모든 영화적 삶의 진원지를 알기 위해 가장 먼저 문을 두드려야 할 곳은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일 거라 생각했다. “영화에 관해 내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시네마테크에서 배웠다”고 장 뤽 고다르가 말하지 않았던가. 누벨바그 영화운동의 주역들을 키워냈던 것은 번드르르한 영화학교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한명의 시네필에 불과했던 앙리 랑글루아가 설립한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였다. 유학파 영화인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그곳. 지글거리는 불법 비디오로만 접하던 클래식영화들을 수도 없이 필름으로 접할 수 있었다는 바로 그 마술 같은 회고록 속의 장소. 기행은 그곳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 옳을 것이라 믿었다. 그래서 ‘파리의 미래’라 불리는 뤼 드 베르시(Rue de Bercy) 지역에서 순례의 첫발을 떼기로 했다. 메트로(파리의 지하철)역을 지나 밖으로 나와보니 갑자기 자크 타티의 상상력으로 빚은 듯한 새로운 건축물들이 들어선 세상이 펼쳐진다. 그곳을 헤매다보니 멀찍이 개축 중인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을 미다스의 손으로 빚은, 건축계의 거장 프랭크 게리가 지은 건물이라 들었기에 보기 전엔 꽤 기대가 컸건만 정작 현장은 개축 중인 건물 특유의 을씨년스러움만을 풍긴다(원래 이 건물은 미국문화원으로 쓰이던 건물이라는 것이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쪽의 귀띔이었다). 이곳이 바로 프랑스영화의 미래이자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새로운 둥지가 될 51 뤼 드 베르시다. 그러나 그곳에는 아직 아무도 살고 있지 않았다. 사실 이곳으로 굳이 온 이유는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새로운 청사가 건설 중인 현장을 보고 싶어서였다. 메트로를 타고 한참을 다시 달려 현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낡은 사무실에 도착했다. 비가 부슬부슬 오는 파리 특유의 날씨라 그런가, 좁고 높은 복도 사이에 전단지가 쌓여 있는 이곳은 지난 세기의 낡은 향취가 가득하다.

정부 불신 해소의 기대, 새로운 시네필의 욕구 충족

△ 현재 시네마테크 프랑세즈가 운영하고 있는 상영관은 피갈과 샤이어 궁전(사진) 두곳이다. ‘51 뤼 드 베르시’로 옮겨가게 되면 두곳의 상영관은 역사책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잠시 견학온 학생처럼 복도의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니 디렉터인 세르주 투비아나가 들어오라 손짓을 한다. 새로운 건물로 입주하게 될 것에 대해 미리 축하의 말을 건네니 짐짓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샤이오 궁전에 위치한 주상영관을 비롯해 겨우 2군데 남은 상영관으로 어찌어찌 상영회를 이어오는 지금과는 달리, 새로 보수 중인 건물은 상영관 4개와 식당을 비롯한 부대시설에 도서관까지 구비된 14만m2의 공간으로 꾸며질 예정이다. 그런데 새로운 장소로 옮기기 위한 결정의 시간을 회상하는 그의 얼굴이 찡그려진다. 사정은 이랬다. “영화는 예술이므로 보존해야 한다는 기치 아래 창설한 시네마테크 프랑세즈가 ‘51 뤼 드 베르시’로 그 터를 옮기기로 결정한 것은 20여년 전이었다. 하지만 프로젝트는 정치적 이해관계에 맞물려 칼춤을 추며 20년의 세월을 허비했다. 그러는 사이에 정부와 시네마테크 프랑세즈간의 신용은 사라지고 말았다”는 것. 원래 <카이에 뒤 시네마> 편집장이었던 세르주 투비아나가 문화부 장관의 요청으로 디렉터 직함을 계승한 것은 그런 와중이었던 게다. “51 뤼 드 베르시 프로젝트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프로젝트가 무산되어, 정부에 대한 불신이 겹겹이 쌓이던 중이었다. 하지만 이 건물이 완성된다면 그런 불신이 완전히 해소될 수 있다”는 것이 투비아나의 기대다. 그러나 정부와 시네마테크 프랑세즈간의 불신을 해소하려는 목적만으로 51 뤼 드 베르시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투비아나가 말하는 최근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화두는 ‘새로운 시네필의 등장과 디지털 혁명’이었다. 애초에 기대했던 답변이기도 했다. 파리의 시네필도 서울의 시네필과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새로운 영상문화를 창조하는 디지털 혁명은 막을 수 없는 물결이고 그에 따른 새로운 시네필의 등장 역시 당연한 일이리라. 그런고로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는 51 뤼 드 베르시의 견고하고 아름다운 벽돌의 성채에 채워나갈 시네마테크의 미래에 적지 않은 희망을 거는 중이다. “필름의 생명이 급속하게 짧아지고 있다. 이제 디지털화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라는 프로그래머 장 프랑수아 로저의 말에서 감지되는 일말의 불안한 느낌. 그 불안감을 극복하고 새로운 시대에 만반의 대비를 갖추기 위해, 51 뤼 드 베르시의 성은 1년간 보수작업을 거쳐 내년에 그 모습을 공개할 예정이다.

△ 파리 시내의 다양한 아트시네마와 공공 시네마테크들. 소르본대학 근처의 생미셸 지역은 다양한 성격을 지닌 아트시네마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시네필들을 유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