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리 시내의 다양한 멀티플렉스 상영관들. 거대 배급사인 고몽과 UCG가 미국 배급사들과 협력하에 경쟁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현재 두 멀티플렉스 체인은 한달에 약 25유로만 내면 영화를 마음껏 볼 수 있는 ‘무제한 카드’를 발급하면서 가난한 시네필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중복된 영화가 없는 진짜 ‘멀티’플렉스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 출발했으니, 이제는 생미셸 지역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아트시네마를 돌아볼 차례였다. 많은 장소를 들러야 하니 크레페로 든든하게 배를 채워놓고서는 샤틀레의 메트로역으로 향했다. 샤틀레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이나 라데팡스처럼, 새로운 파리의 상징으로 건설된 도심의 오아시스다. 지하에는 거대한 쇼핑몰이 들어서 있고, 그 위는 나무들이 우거진 인공적인 숲이 자리잡았다. 문제는 이곳이 애초의 기대와는 달리 강간과 마약거래 등 온갖 범죄로 들끓는 사각지대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사실 미테랑 전 대통령이 국가적 자존심을 걸고 진행시켰던 국책사업들은 무엇 하나 제대로 기능하는 것이 없단다. 샤틀레역으로 들어서자 왼쪽 구석의 멀티플렉스 극장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일단은 아트시네마 순방을 한 시간 미루고 멀티플렉스를 한번 돌아보기로 했다. 이런. 멀티플렉스는 어느 나라에서나 멀티플렉스다. 미국식 팝콘 세트를 손에 들고 온라인 예매로 영화를 즐길 수 있는 이 거대한 장소는 완벽한 무국적의 세계가 아닌가.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프로그래머인 장 프랑수아 로저가 “멀티플렉스의 존재는 긍정적이다.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이 영화를 보게 되고, 그런 사람들이 결국에는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로 걸어오게 만들어줄 것이기 때문이다”며 의외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던 것이 떠올랐다. 10여개관의 절반을 할애해서 한 영화의 공격적인 마케팅을 돕는 한국 멀티플렉스와는 달리, 파리 시내 어느 멀티플렉스도 한 영화에 두개 이상의 관을 할애하지는 않고 있었다. <반 헬싱>과 고다르의 신작 <우리의 음악>이 나란히 ‘예매 중’ 마크를 달고 경쟁하고 있었다. 파리의 젊은이들에게 멀티플렉스는 다양한 영화를 접할 수 있는 문화적 장소인가 보다하고 혼자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천만관객을 위해 절반의 스크린을 기꺼이 내어주는 한국의 흉악한 배급시스템이 생각나 몸서리가 쳐진다. 남들은 외국 나가면 애국자가 된다더니, 이럴 땐 아예 국적을 바꾸어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유럽과 아시아의 독립영화를 만나다, 시네마 뒤 팡테옹
△ 소르본대학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시네마 뒤 팡테옹은 1905년에 개장한, 파리에서 가장 유서 깊은 아트시네마 중 하나. 유럽과 아시아의 독립영화들을 주로 상영한다. 이날은 김기덕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 상영 중이었다.
‘그래도 멀티플렉스는 멀티플렉스지.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와는 달리 작은 아트시네마들은 거대한 배급시스템 앞에서 불안해하고 있을 테다’라며 비뚤어진 기자근성에서 발휘된 의문을 머릿속에 안고 생미셸 지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소르본 대학을 중심으로 카페와 레스토랑, 옷가게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는 생미셸 지역은 자그마한 아트시네마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일종의 ‘극장촌’이다. 처음으로 맞닥뜨린 것은 김기덕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포스터였다. 마침 김기덕의 영화을 본 관객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누벨바그 세대의 동창회라도 있었던 것일까. 대부분 머리가 희끗희끗한 50대 관객이다. 물끄러미 보고 서 있었더니 ‘당신네 영화 꽤나 마음에 들어’라는 표정으로 낯선 동양인에게 미소를 보낸다. 이런 순간에는 ‘서양 관객의 오리엔탈리즘’을 고민하는 게 부질없는 일이다 싶다. 어쨌거나 이 사람들은 낯선 나라에서 온 영화를 보기 위해 주말 저녁의 소중한 시간과 비용을 지불하고 있는 것이리라. 김기덕의 영화가 상영 중이던 시네마 뒤 팡테옹은 무려 100여년의 역사를 지닌 장소였다. 1905년에 창립된 이곳은 ‘와이 낫(Why Not)’이라는 프로덕션에서 운영 중이다. 이곳의 디렉터인 아니 토마스에 따르면, 일단은 와이 낫 프로덕션이 제작한 필름을 우선적으로 상영하고 나머지는 유럽과 아시아 독립작가들의 작품들에 스크린을 할애한다. 미국 작가들은 배제한다는 것이 이곳의 원칙. 관객층은 어린 시네필에서 나이든 사람들까지 다양하지만, 정기적인 관객은 머리가 희끗희끗한 계층이다. 재정적인 측면은 어떤지 궁금함을 보였더니 “지난해 3만5천명의 관객이 들었다. 최소한 4만명은 넘어야 수지를 맞출 수 있는데 시네필과 나이든 관객이 계속 찾아주긴 하지만, 멀티플렉스와 DVD의 영향으로 관객은 조금씩 줄고 있는 형편이다”라는 답변이 돌아온다. 그러나 안쓰러움보다는 놀라움이 앞서는 것이 당연지사. 생미셸 지역에 들어서 있는 십여개의 아트시네마 중 단 하나의 상영관일 뿐인 이곳이, 1년에 3만5천명의 관객을 끌어들이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2002년에 문을 연 서울아트시네마가 2년여 동안 끌어들인 관객 수는 10만여명. 그러나 서울은 인구 천만의 도시이며, 서울아트시네마는 서울의 단 3개 있는 예술영화 상영관 중 하나라는 것을 기억하자. 이러니 그의 고민은 정말 배부른 고민이라는 생각을 좀체 막을 수가 없다.
한 영화에 12만명을 동원한 아트시네마, 그랑 악시옹
△ 그랑 악시옹은 1년에 30만명 이상의 관객동원력을 자랑하는 아트시네마. 파리에서 70mm 필름을 상영할 수 있는 유일한 극장이며, 할리우드 배급사들이 DVD 출시를 위한 고전영화의 색채복원에 대한 고문을 의뢰할 정도로 자체적인 기술력을 갖추고 있다.
생미셸의 수많은 아트시네마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그랑 악시옹이었다. 겉보기로는 동네구멍가게만한 극장이다. 하지만 들어가 보니 3개의 커다란 상영관이 눈앞에 펼쳐진다. 입이 저절로 벌어진다. “파리에서 유일하게 70mm를 상영할 수 있는 곳이며 미국 배급사에서 DVD 복원을 위한 색채고문을 의뢰하기도 한다”는 디렉터 장 낙스 쿠세의 자랑이 이어졌다. 파리지앵들은 겸손할 줄 모른다더니. 하지만 이것은 참으로 기분좋은 거만함이 아닌가. 트뤼포의 소개로 부탁받은 히치콕이 “우리 극장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멘트를 만들어줘서 상영 전에 항상 틀기도 했던 유서깊은 그랑 악시옹은 1년에 30만명의 관객동원력을 지닌 내실있는 장소다. 프로그램 선정의 기준을 물었더니 “기준? 기준은 없다.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가능한 독립영화를 보여주는 것이 목표다. 앙리 랑글루아가 말했듯이 우리가 평가하기 전에 관객에게 먼저 보여준다는 철학이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파리의 아트시네마들은 약간의 거드름을 떠는 주인장들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그 철학만큼은 참으로 겸손하기 그지없다. 게다가 장 낙스 쿠세는 새로운 시네필에 대해서도 호의적이다. “예전 시네필들은 자기들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거드름을 피웠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지금은 반대다. 요즘의 시네필들은 자신들이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배울 자세가 되어 있다. 그런 만큼 우리 같은 아트시네마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다”라는 것이 그의 말이다. 그러나 일흔이 넘은 나이인 그가 새롭게 변해가는 세상에 대해서 항상 좋은 생각만 지니고 살까. 의심스러워 디지털 혁명에 대해 물어보았더니 “필름의 디지털화는 극장업주에게는 혁명이다. 테크니컬러로 찍은 것도 현상할 때 오리지널에 가까운 색깔이 나오지는 않지만. 디지털은 오리지널에 가까운 색을 유지할 수 있으니까. 게다가 시골의 조그마한 곳에도 운송료 없이 보낼 수 있고. 고다르는 영화란 버튼 하나면 누르면 되는 거라고 말했다지만, 그 친구 잠언은 이제 유효하지 않게 된 셈이다”며 껄껄 웃어젖힌다. 그랑 악시옹에서 가장 인기있었던 작품은 에른스트 루빈치의 <모퉁이의 작은 가게>. 12만명이라는 믿을 수 없는 관객을 동원했다. “오직 파리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다. 파리는 다양한 영화를 볼 수 있는 세계 최고의 도시다. 30만명의 관객이 해마다 꾸준히 독립영화와 클래식영화들을 보는 도시는 파리 한곳뿐이 아닌가. 이러니 대체 늙을 여유가 없다”며 웃는다. 갑자기 이 축복받은 도시의 찬란한 상황이 지나치게 달게 느껴져 씁쓸한 에스프레소를 목으로 삼켜버렸다.
예술 보존의 의지와 열의 “열의”
△ 시민들이 자주 찾는 퐁피두센터 역시 아트시네마 상영관을 갖추고 있다(세 번째, 제일 아래). 이처럼 ‘길을 걷다보면 영화가 발에 채이는’ 도시, 그것이 바로 파리다.
생미셸의 아트시네마들을 돌아보고, 피곤한 다리를 쉬어가기 위해 시끌벅적한 카페에 앉아 홍합찜을 먹다가 문득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프로그래머가 건넸던 말을 기억해냈다. 한국 정부의 미온적인 아트시네마 지원에 대해 토로하던 기자에게 그는 “자본주의적인 마인드를 지닌 정부 단체가 이런 곳에 투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프랑스는 예외적이다. 예술을 보존하려는 의지가 전통적으로 있었다. 프랑스 사람들과 정부, 공무원들은 그것이 매우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공무원들도 그런 마인드를 만들어나가야 할 것이다. 영화박물관을 어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의상이나 시나리오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새롭게 발견하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라고 조언했다. 공무원들이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고? 순간 의심이 들었지만, 이후에 들른 퐁피두센터의 영상센터 원장은 조용히 웃으며 이야기 했다. “나는 예술분야에서 일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공무원이다. 고다르는 문화는 규범이고, 예술은 예외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나는 예술보다는 문화에 가까운 사람이다. 물론 심심한 일이기는 하지만.” (웃음) 바로 거기서 답을 찾았다. 결국 ‘개인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아트시네마들의 뒤를, 고다르의 말을 인용하며 자신의 철학을 건넬 줄 아는 세련된 공무원들이 지지해주고 있다는 이야기다.
사실 파리는 언제나 세상에서 가장 급진적인 도시였다. 프랑스 혁명과 누벨바그, 68혁명, 전후 여성들의 옷차림을 바꾸어버린 코코 샤넬의 의상혁명은 어떤가. 그러나 파리가 서울과 다른 점이라면, 급진적인 혁명의 물결을 두손으로 고이 담아서 ‘전통’으로 환원해내는 포용력에 있다. 23년째 <록키 호러 픽쳐쇼>를 상영해오고 있는 소극장 시네마 그랑데에서 20년째 일하고 있는 검표원의 말처럼, 파리는 “변치 않는 작은 기쁨들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도시”이다. 그리고 ‘변치 않는 작은 기쁨’을 파리지앵에게 던져주기 위해, 아트시네마와 시네마테크, 그리고 그들을 지원사격해주는 정부의 보이지 않는 발걸음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아마 그것이 작은 도시 파리를 위대한 도시로 만들었을 것이다.
